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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아침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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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끝기도
성녀 마르타 기념
마리아와 라자로와 형제간이었다. 베다니아의 자기 집에 주님을 맞아들여 정성껏 시중들었다.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님께서는 그의 오빠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복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지상의 허다한 걱정 속에서 일하는 가운데에도 우리가 향하는 어떤 한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아직 안식처에 도달하지 못한 길 가는 나그네로서, 아직 본향에 닿지 못한 여정 중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무엇을 향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언젠가 그 곳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게으름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앞으로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간이었습니다. 혈육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으로도 자매간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주님께 매달려 그분께서 세상에 육신으로 현존하실 때 한마음으로 섬겨 드렸습니다. 마르타는 마치 나그네를 맞아들이듯 주님을 맞아들였지만, 사실은 종이 주인을, 환자가 구원자를, 피조물이 창조주를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적 양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인간으로서 육신적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실 주님을 맞아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종들로부터 육신의 양식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고 다만 사람을 생각해서 받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양식을 요청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볼 때 명예였습니다. 그분은 배고프고 목말라 하는 육신을 지니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손님으로 오실 때 당신 백성 모두가 그분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종들을 받아들이시어 당신의 형제들로 삼으시고 공동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중 혹시 누가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육신으로 계신 주님을 볼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실상 그 분께서는 우리가 육신으로 계시는 당신을 볼 영예를 앗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여, 여하튼 나는 당신이 시중을 들었기에 평화를 얻어 복되다고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안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들의 육신이라 하지만 그래도 썩어 버릴 육신에다 양식을 공급하는 데에 당신은 너무 정신없이 바쁩니다.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이 거룩한 본향에 도달할 때 거기에도 맞아들여야 할 나그네가 있겠습니까? 당신 빵을 나누어 주어야 할 굶주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실 것을 주어야 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방문해 주어야 할 병자가 있겠습니까? 화해시켜야 할 분쟁에 휩싸인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장사지내야 할 죽은 이들이 있겠습니까?
저 위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마리아가 택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즉 시중드는 것보다 시중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기서 마리아가 택한 것이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주님의 부요한 식탁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부스러기만 모았을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거기에서 우리가 받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주님 친히 당신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말한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신약성서의 인물: 아름다운 여성적 특성을 드러내는 마르타와 마리아
신앙활동에 있어 여성의 역할은 교회를 유지 지탱하는데 있어 큰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일학교에서 여성의 위치는 두 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성서에서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논쟁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소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밝히고 싶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라는 곳에 들어가 보니 성서 인물 공부를 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실려 있어 그 내용을 기초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루가(10, 38-42)와 요한(11장)에서 ?아 볼 수 있다. 루가 복음에서는 지리적 배경에 대한 암시 없이 마르타-마리아 자매 집에서 집회시에 있었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여기에는 자매에 얽힌 하나의 논쟁이 시사되고 있는데, 마르타는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맞이하여 접대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장면이 그 논점을 시사한다.
흔히 이것은 여성적 소임을 다하지 않고 (남자들처럼) 방안에 앉아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여자를 예수님이 두둔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당시 랍비들의 집회가 랍비와 그의 제자들인 남자들만의 잔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 당시 성해방적주의인 진취성을 한 눈에 보여준다. 실제로 예수님의 집회는 신분에 관계없이, 성에 관계없이, 심지어 어른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개방된 '열린 대화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장면은 예수님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장면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리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집주인의 몫이며, 특히 집안 여인들의 과제다. 마르타는 그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일손이 달렸고, 그래서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마리아를 꾸짖은 모양이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는 역성을 냈던 것 같다. 마리아를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성다움에 대한 통념적 해석을 비판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주의적 해석 이면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다. 예수님이 시중드는 여인이라는 여성다움에 대한 통념을 비판했다면, 왜 마르타에게는 밖에서 부산떨지 말고 들어와 집회에 참석하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 일이 어느 정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면, 뒤치다꺼리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 접대의 부산스러움을 최소화하는 것에 대한 충고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혹은 주변에 있는 남자들 몇에게 마르타를 도와주라고 하면 더욱 안성마춤이 아닌가? 단지 마리아를 편드는 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인습적 가치에 공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타를 이와는 다르게 대조하는 해석도 있다. 예수님 발치에 다소곳이 않아 있는 소극성이 과연 칭찬할 만한 자세인가의 문제다. 오히려 마르타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성서 본문이 그의 행위를 '디아코네인'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식사를 준비하는 활동을 말하는 용어가 아니라 더 큰 의미 즉, 사도들의 활동을 말하는 봉사의 직무를 의미한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 디아코네인이라는 제자들의 직무에만 한정된 용어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르타의 움직임은 분명히 교회 봉사 활동의 중요한 위치를 갖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행동에서 마르타를 칭찬하기 보다 마리아를 두둔한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 답은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타 자신이 가진 몫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참 좋은 것이기에 서로 비교하여 적극적 활동과 소극적 활동에 대해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몫이라는 것이 있다. 그 몫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느님 눈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에 교회 활동이나 사회 생활에 있어 자신의 몫에 만족할 때 다른 어떤 몫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대조되는 성격차를 더 잘 보여주는 본문은 두 자매의 오빠이면서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의 소생에 관한 이야기(요한 11장)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예수님에게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떠나지 않고 이틀을 더 지체한다. 그후 마르타의 집이 있는 베다니야에 이르니, 이미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예수님이 전갈을 받을 때 이미 죽었거나 그 직전 또는 직후에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을에 당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르타는 얼른 당신을 마중나왔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다. 오라비가 죽은 경황없는 상황이다. 마음도 몸도 기력이 없는 상태인데다, 아직 상중인지라 손님이 북적거리던 때였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집안에 앉아있는 장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타는 마중나간다. 그 상황에도 예의를 차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대단히 강하며, 공적 활동에 익숙한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중나온 마르타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자. 마르타가 먼저 말을 건넨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손님에 대한 매우 예의바른 말이다. 이에 예수님은 답한다. "라자로는 다시 살아날 거야"라고. 위로의 말치고 뜸금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상식 밖의 말인 것이다. 죽은 이가 살아난다니. '죽은 이에 너무 연연하지 말거라'라든가, '고인의 뜻을 잊지 말게'라거나 하면 좋았을 것을 …. 하지만 마르타는 힘있게 답한다. "물론이죠. 마지막 부활 때에는 그리될 것을 믿습니다." 자신의 신실함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 그는 예수님의 이상한 말을 나름대로 최선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식과 예수님의 상식밖의 말을 조화시켜 이해할 만큼 능숙한 대화의 기술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응대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얼핏 들으면 죽었지만, 본질은 죽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다소 뉘앙스가 다른 표현이다. 마르타는 마지막 때엔 살아날 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현상은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니 그리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믿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르타는 거창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중의 제자인 베드로만이 이 위대한 답을 해냈다. 그런데 마르타가 그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물음에 더 없는 정답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는 어떤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찾는다는 마르타의 귀뜸을 듣고 마리아는 달려나간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문장만으로는 마르타와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통곡하며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슬픔이 얼마나 절절하게 표현됐는지, 예수님은 마음이 격앙되었고 산란해졌다. 예수님은 묻는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가?"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자매를 각기 만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마르타와의 만남은 마치 지혜문답과 같다. 마치 세례문답처럼,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과 더 없는 올곧은 대답으로 일관된다. 무슨 만남이 이리도 의례적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마르타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죽이고, 방문한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데 치중하고 있다. 반면 마리아는 어떤가? 만나자마자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예수님님도 슬퍼 울음을 터뜨린다. 마리아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차리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출시키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타가 활동적이라면, 마리아는 소극적인 다소곳한 여자다. 마르타가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는 이성적 여자라면, 마리아는 자기 중심적인 감성적이며 직선적인 여자다. 마르타가 공적 활동에 익숙한 여자라면, 마리아는 매우 사사로운 친밀감에 익숙한 여자다. 그리하여 마르타가 어머니와 같은 여성성을 상징한다면, 마리아는 딸 같은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에 대한 논쟁이 단지 사회적 성적 갈등의 문제를 나타낸다기 보다 여성적 특성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있어 아직도 많은 편견들이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고유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 있음을 피부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보았듯이 여성 안에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마르타나 마리아의 성격을 통해 드러나듯이 우리들도 각자 내면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준 아름다움이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 아름다움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할 때 오는 받아들임에서 오는 내어 줌일 것이다.
요리사의 수호성인 마르타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르타의 모습이다.
마르타는 이렇게 예수님을 환대하여 모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이다. 그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을 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마리아는 눈앞에 모신 예수님을 지극한 마음으로 모셨다. 마르타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을 알아들었고, 그 뒤로는 기도와 묵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항상 주님과 일치하고자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였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을 한 마르타는 또한 이렇게 소박하고 강하게 신앙을 고백한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을 모심에 주저함이 없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통해 극진히 예수님을 접대하는 마르타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신앙에서 멀어지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요리사의 수호성인 마르타의 축일은 7월 29일.
[경향잡지, 2007년 10월호]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46. 마르타
부엌일 하는 것에 화난 듯한 마르타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작품 해설 : 벨라스케스, 〈마르타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 1619-20, 60 x 103.5 cm, 캔버스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부엌 저편 방에서 예수 말씀 듣고 있는 마리아 바로크 시대 때 일상 묘사하는 ‘풍속화’ 유행 마르타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언니이자, 죽었다가 부활한 라자로의 누이로 성경에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이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므로 마르타는 손님께 대접할 음식 준비로 분주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안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귀한 말씀을 듣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보다 못한 마르타가 선생님께 불평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참 야속하신 주님의 말씀이시다. 우리가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부수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 성경의 이 구절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들 중요한 것만 추구하며 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을 도외시 한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마르타처럼 일상에서 필요한 것을 해내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가정도, 교회도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르타 같은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그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타 역시 정녕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주부가 그러하듯이.
마르타가 등장하는 두 번째 사건은 라자로의 부활에서이다. 여기서 성경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베타니에라는 마을에 살았던 세 남매임을 밝히고 있다. 오빠 라자로가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다급한 상황을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알렸으나 예수님께서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셨고, 라자로는 그새 세상을 떴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오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타도 마리아도 생각했다. 속으로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셨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하느님이 보낸 분임을 믿게 한 사건이 되었다.
마르타가 등장한 마지막 사건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발라 드렸을 때에 그곳에 마르타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도 마르타는 잔치 준비를 하는 등 시중을 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성경의 기록에 따라 마르타는 성화에서 보통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평범한 여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은 대표적인 예이다. 마르타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작은 절구에 무언가를 갈고 있는 듯하다. 혼자만 일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듯 얼굴은 뾰로통한 표정이다. 식탁 위에는 비늘이 반짝거리는 신선한 생선들, 계란, 마늘, 마른 고추, 기름병 같은 것이 놓여있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다. 부엌 저편에는 예수님이 의자에 앉아 있고, 마리아는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풍속화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장면을 그리는 새로운 장르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필립페 4세의 궁정화가로 스페인 회화의 전성기를 연 장본인이다. 궁정 화가면서도 성경의 한 장면을 소박한 서민의 모습으로 과장 없이 그려낸 대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당대 최고의 걸작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일] |
첫댓글 7월29일=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루스의 누이인 성녀 마르타는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으로 그녀의 성격을 잘 묘사하는 내용이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이런 기사 때문에 그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성녀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처럼 공경을 받는다. 성 라자루스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는 성녀 마르타이고, 성녀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요한 11,20).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루스는 예수님의 사후에 프랑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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