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을까? 어떤 언어도 닿지 않은 사유의 덩이들 혹은 그 조각들, 나는 견고한 말, 견고한 책을 동경한다. 그러나 견고한 말이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읽히기를 희망한다. 나는 풀과 나무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등불이 된다. 오늘도 지붕 위로 엽서만 한 저녁이 내린다. 그러나 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 ...이기철 詩集(민음의 시 - 124) ..『 가장 따뜻한 책 』중에서
...."이것만 쓰네"
.......................- 이기철 시인 -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산방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同詩集에서 -
."씨뿌리는 사람 1"
......................- 이기철 지음 -
저녁에 씨뿌리는 사람은 추억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태양이 짓다 둔 낮의 형식을 하나하나 갈무리해서 잠재우는 사람이다 씨앗들이 은빛 숨 쉬며 잠들 때 내 길러온 언어들은 어린 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이 한없이 낮고 고요해지는 이 저녁 들판은 오늘 하루만큼 성숙해지고 어린 저녁은 오랫동안 해의 젖가슴을 만진다 햇빛 뒤에서 집들이 저녁 등 내걸 때 모든 사나운 것들은 유순해진다 어둠의 소리를 듣는 씨앗들의 환한 귀 그 고요함이 아픈 세상을 낫게 한다 씨앗들은 잠 속에서 풍요를 꿈꾸고 씨 뿌리는 사람은 그 풍요를 들으며 낮아서 편안한 처마 아래로 돌아간다 저녁에 씨 뿌리는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 同詩集에서 -
."저녁 거리에서 생을 만나다"
.....................- 이기철 시인 -
문 닫는 상점들의 저녁 거리에서 남은 하루를 만난다 춥지 않으려고 나무들은 어둠을 끌어다 제 발등을 덮고 불만 없는 개들은 제 털이 어둠 속에 쉬이 따뜻해지리라는 것을 안다 난폭한 철근들이 잠드는 일은 나를 두렵게 한다 철든 나무들이 어두워진 도시를 달래고 팔려가지 않은 시금치와 조잘대던 완구들이 침묵한다 저 첨탑들은 얼마나 우둔한가 어리석게도 우리는 거기서 생의 열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쉽게 지워지는 종이의 약속 거기서 우리는 생이 꽃피리라 믿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휴식의 빵을 뜯고 어린 옷가게들은 왜 도시가 어두워지는지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한다 모든 식사들은 활발하고 부엌과 식당에는 늙은 식욕이 혼자 않아 있다 비탄 한 꾸러미씩 사 들고 가는 사람들 사무원들이 두들기던 자판의 하루가 쉬이 저물고 지나온 습관은 닳은 신발을 맹목이게 한다 어둠 속에 생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별을 쳐다보는 나와 함께 이 도시를 떠밀려 가는 사람들 그들의 내일이 환히 꽃피기를
.- 同詩集에서 -
.........■ 表 誌 文 -
.이기철의 시를 읽으며 나는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활짝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시는 때로는 낮게 깔리며 엄숙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속살거리며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현대인들에게 교화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우리의 척박한 삶을 시로 윤택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기철의 시는 자기 성찰과 참회 또는 속죄의 노력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게 한 특징입니다. 미처 진심으로 깨닫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세상살이에 대한 통회와 안타까운, 살아가는 일의 죄스러움을 씻으면서 감사와 은총의 길, 사랑과 섭리의 길로 나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텅 빈 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히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서문시징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영변 경수로 김정일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은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 同詩集에서 -
."유등리"
..................- 이기철 시인 -
지나는 어디에도 유등리는 있다 오래 만진 삶이 문고리처럼 닳아 반짝이고 잘못 만지면 바스러지고 말 집들이 종이 연처럼 가볍게 추녀 끝에 걸려 있다 닳은 신발 잠시 뜨락에 벗어놓으면 굳이 문자로 쓰지 않아도 언문체로 남을 골목들 나는 어제도 이 비슷한 골목을 걸어갈 것이다 돌담 아래 겨우 몸 부지하고도 제 기쁨만큼 웃는 꽃들을 보면 가난이 아름다움임을 여기서 깨닫는다 가을이 조금씩 여름의 치마끈을 물어뜯는 유등리에 와서 오래 잊고 있던 들깻단과 들판에 내려앉는 구름 그림자에 마음 베이며 한 촌락이 외씨 같은 사람들을 키우고 조선 솥 같은 사람들을 껴안는 것을 본다 남쪽 섬돌에 벌레가 울 때까진 나는 길 떠나지 않으리라 돌담처럼 오래 여기 서 있으리라 ------------------------------------- 유등리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유등리
.- 同詩集에서 -
."카뮈"
........................- 이기철 시인 -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카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 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새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첫댓글 와~! 시와 그림과 음악. 창문과달빛님 덕에 오감 만족 누리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무소유님 팬이니까 이정도야 ㅋㅋ~ 종종 올려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