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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의 맞은편에는 러시아의 최고급 백화점인 국영백화점(GUM)이 위치하고 있다. 1890년부터 3년에 걸쳐 세워졌으며 러시아혁명 뒤인 1953년에 지금과 같이 개조하였다. 이 백화점은 3층 건물이며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건설된 굼 백화점은 모스크바의 또 다른 상징이다. 유리 지붕과 정면부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구조물은 6500평방미터에 달하는 지대에 다리와 보도로 연결된 다섯 개의 평행 통로가 있다. 아라비아의 시장 ‘바자르’를 닮았으며 15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굼 백화점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상가에 더 가깝다. 공산주의가 절정기였을 때 굼에서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볼프강 쾨펜(Wolfgang Koppen)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복도 · 휴게실 · 계단 등지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긴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여기는 분명 사회주의사회이다. 구매자들 대부분 줄을 서 있는 동안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건물이 너무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밖에서 바라볼 때에는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전으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외모를 지녔다. 하긴 냉전시대에 소련 공산당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었다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아무튼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변신하여 현재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아치형으로 만든 출입문 건너편에 ’크렘린‘과 ’레닌 묘‘가 나타난다. 굼 백화점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굼 백화점은 겉에서 보면 사각형의 거대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남북으로 길게 4개의 큰 건물을 지어놓고 그 외곽만 이어 붙인 형태이다. 내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통로는 비어있다. 통로의 위는 전체가 유리로 된 반구형의 돔(dome)으로 만들어져 있어 자연광(自然光)이 그대로 들어온다. 이층과 삼층은 두 건물 사이의 뚫린 공간을 구름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다리의 위가 일류의 ’포토죤(photo zone)‘이 된다. 특히 삼층의 구름다리는 쉼터의 역할도 겸하는 것 같다. 삼층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사들고 나와 구름다리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백화점 내부 풍경이 나름대로 볼만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하나 같이 아름답고 럭셔리(luxury)한 브랜드들을 눈에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우리는 광장에 섰다. 주변 명소들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람구경도 재미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보이고 전세계인종이 다 보인다. 특히나 중국 사람이 많다. 러시아 젊은이들이 커다란 붉은 공을 들고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아내와 둘이서 엣 생각을 하며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강 쪽으로 간다. 2018년 올림픽을 준비하는지 한참 공사 중이다. 광장의 남단으로 빠져나오면 모스크바 강이 나온다. 그 위에 놓여있는 다리가 ‘레츠치다리’이다. 모스크바 최고의 명소인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가 다리 위에 있다. 다리에 서면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광장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가보지를 못했다. 그런 정보를 여행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느껴진다고까지 극찬을 들을 정도의 경관인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음부터는 관련 정보를 더 꼼꼼히 챙겨봐야 하겠다. 중세 유럽 축성(築城) 예술의 본보기라는 크렘린(Kremlin)의 남쪽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거대한 성곽이 시야를 가득 메워버린다. 크렘린 성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당 탑들의 모습이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다. 총안(銃眼)이 뚫린 크렘린의 붉은 벽돌 벽과 20개의 탑은 1485-1495년에 이태리 건축예술가들과 건축기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성벽의 총 길이는 2,235m이다. 잘 구워 낸 큼직큼직한 벽돌(한 개 중량 8㎏)을 쌓아서 만든 성벽은 지면의 기복에 따라서 그 높이가 5m에서 19m에 이르며 벽의 두께는 3.5-6.5m이다. 탑들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구세주 탑과 삼위일체 탑이다. 1990년 유네스코는 이곳 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합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바 있다. 참고로 크렘린(Kremlin)이란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을 의미한다. 보로비츠카야(Borovitskaya) 광장에는 성 블라디미르 1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러시아의 왕이었으며975년~1015년에 활동했다. 키예프에서 스바토슬라프 대공작의 서자로 출생했다. 989년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 비잔틴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의 개종은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개혁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한편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그리스 선교사를 영입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와 대사를 교환하였고, 특히 성 보니파티우스의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키예프 인근의 베레스토바에서 서거하였다. 성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호성인이다. 우크라이나 키에프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블라디미르<Vladimir>는 슬라브어권의 남자 이름이기도 하지만, '통치한다.'는 뜻 владь(블라디)와 뛰어나다 · 훌륭하다는 의미의 мѣръ(메러) 혹은 평화 · 세계를 뜻하는 миръ(미러)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владь(블라디) + мѣръ(메러) = 위대한 통치자(ruler with greatness), миръ(미러)와 결합되면 평화로운 통치자(peaceful ruler)로 나누어지지만 보통 전자로 해석한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된 성 블라디미르 1세가 유명하며,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도 잘 알려져 있다. 10년 전에는 없던 동상이다. 새로 만들어졌나보다.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에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광장의 대로에는 차가 엄청 밀린다. 길 건너편에 좌우대칭으로 아름다운 궁전이 보인다. Pashkov House란다. 파샤코프 하우스는 크렘린 서쪽 언덕에 있는데 신고전주의 저택이다. 바실리 바조소프에 의해 설계되었다. 19세기 모스크바 공공 박물관의 시초였고 지금은 시립도서관이 소유주란다. 잘 꾸며진 귀엽고 아름다운 카페를 지난다. 궁전 계단 난간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쉰다. 차들이 참 많이 다닌다. 복잡하다. 우리는 황금빛 돔을 갖고 있는 정교회를 찾아간다. 볼혼카 거리를 걸어서 간다. 모스크바 강변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다. 그 앞에 있는 푸쉬킨 미술관(The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을 먼저 만난다. 그리스식의 대리석 기둥이 인상적인 미술관은 알렉산더 3세 미술관을 모체로 하여 기부에 의해 완성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식품을 비롯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걸작들, 보티첼리, 렘브란트, 루벤스, 반다이크, 들라크루아, 세잔, 피카소 르누아르, 모네, 드가, 고갱 등 현대 회화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모두 합치면 2,000여점 이상 된다고 한다. 이 미술관은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진자가 아니라 많은 수가 모조품이란다. 잘 구별해야 한다. 조각은 거의가 다 모조품이고, 회화는 진품도 꽤 있단다. 다양한 민족들의 고유 조각품 및 응용 예술 작품들도 많이 전시하고 있다. 길을 건너 만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모스크바의 정신적 중심지 중 하나 ‘흐람 흐리스타’는 100년 전의 불우한 운명을 딪고 재건축되어 지금은 모스크바의 명소가 되었다. 공산주의 시절 이 사원을 무너뜨린 볼셰비키들은 여기에다 엄청난 규모의 레닌 석상을 세우고 대규모 야외 수영장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번이나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1995년까지만 하여도 야외수영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후 다시 사원으로 재건축되었다. 지하에 가면 이 성당과 관련된 박물관이 있다. 그곳에 원래의 계획과 조감도,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정교회 성당 중 제일 높은 성당이다. 황금돔 위 십자가를 포함해 103m인데, 그것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삭성당보다 1.5m 높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러시아 황실 군대의 추모비가 모인 곳으로 이곳의 벽에는 장군들과 1812년 조국전쟁 전사자들과 1797~1806년과 1813~1814년간의 해외원정에서 죽은 군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할 때 알렉산드르 1세는 1812년 12월 25일 러시아 사람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의미로 ‘ 러시아에 드리웠던 불행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한 신의 섭리를 알게 한 것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을 짓겠다고 서명하였다. 워낙 거대한 건물이었기에 공사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1883년 그의 아들 니콜라이 1세의 손자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 전날에 축성되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성당의 완공을 상상하며 1812년 서곡을 이곳에서 초연한 1882년에서 다시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강을 끼고 있다. 멀리 크렘린 궁전도 보인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벽에는 청동 부조가 만들어져 있다. 신부의 동상도 있다. 아래에는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동상도 있다. 성당 뒤편에는 모스크바 강이 흐르고 있다.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터널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작은 다리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전에는 없었는데....... 다리에 올라서니 왼쪽에 강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다리 건너편에 있는 붉은색 건물은 Red October 건물이다. 강을 따라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보인다. 이 동상은 모스크바 강과 보두쯔보드니 운하의 서부 합류지점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동상이다. 17세기 초까지도 유럽의 변방으로 아시아의 미개한 족속 중 하나로 천대 시 되었던 러시아를 오늘날의 우럽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제의 칭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모스크바는 동상의 도시라 할 만큼 많은 동상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동상은 규모에 있어서 단연 최고다. 1997년에 세워진 이 동상은 98m로 높이로는 세계 8위이며 무게도 스텐레스와 황동, 구리 600톤을 포함하여 약 1,000톤이나 된단다. 그루지아인 디자이너 주랍 쩨레텔리에 의해 표트르 대제가 창건한 러시아 해군 3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2008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추한 10대 건축물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가장 추한 동상들 리스트에 등재되기도 했단다. 형상이 캐리비안 해적의 유령선처럼 생겼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모스크바를 싫어해서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긴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모스크바에 세우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디자인한 주랍 쩨레텔리 가 모스크바 전임시장 유리 루즈코프의 비호아래 구세주그리스도대성당, 마네쥐 광장, 전쟁기념관 등 예술적인 건축물을 재건 또는 복원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더욱 말썽이 일기도 했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동상이다. 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유람선을 타고 가며 보았던 동상이다. 성당 정면으로 와서 길을 건넜다. 왼편에 푸쉬킨 박물관(State Museum of AS Pushkin)이 있다. 이 박물관은 푸쉬킨이 사용하던 물건과 작품 등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다. 푸쉬킨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서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푸쉬킨의 죽은 얼굴을 석고로 떠 놓은 데드 마스크도 있다. 시대별로 푸쉬킨이 태어나기 전의 해부터 푸쉬킨이 죽은 해까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있다. 우리는 푸쉬킨 부부의 동상이 있는 아르바트 거리로 가기로 했다. 전에 방문했지만 또 가고 싶었다. 지도를 보고 골목길을 거쳐 겨우 아르바트 거리에 들어섰다. 처음 만난 동상이 전에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의 오쿠자바의 동상이다. 러시아의 저항시인이었던 오크자바(1924~1997)는 시인이자 작곡가이며 가수였다고 한다. 그의 조지아인 아버지는 공산당에 의해 총살되었고,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는 18년간 수감생활을 했다고 한다. 서정적인 그의 시가 저항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것 같다. 다시 찾은 아르바트 거리는 좀 더 깨끗해 진 것 같다. 벤치에 앉아서 빵을 먹었다. 배가 출출하다. 심심하고 여유가 있다. 줄지어 있는 가게들이 화려하다. 기념품 가게들이다. 목각인형 마뜨료쉬카를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종류도 다양한데 대체적으로 화려하다. 가격이 제법 비싸다. 푸쉬킨 부부상을 만났다. 반가웠다. 항상 젊고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구나. 그림을 파는 노점상이 많이 보이는데 같은 그림을 팔고 있다. 화가들이 아니고 장사꾼들인 것 같다.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 같다. 붉은 광장의 겨울 풍경 그림이 많이 보인다. 화려한 색상이라 눈에 금방 들어온다. 아르바트 거리를 걷다보니 끝에 도착했다. 구 소련 건물이 나타난다. 외무부 정부청사 건물이란다. 1951년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기아자동차 선전 글씨도 보인다. 길 건너편은 공원이다. 사진에 정부청사를 넣으려고 길을 건너 공원에서 앵글을 잡아본다. 정말 높고 특이한 건물이다. 길을 건너 다시 아르바트 거리로 왔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 사람들도 보이지만 주로 중국 사람들이다. 중간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교회들도 있다. 빅토르 최의 담벼락을 다시 찾았다. 전에 담벼락보다 더 선명하고 깨끗하고 넓어지고 정리된 느낌이다. 모자이크로 나타낸 얼굴과 흑백 사진도 있어서 보기 좋다. 전에는 많이 낡고 지저분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고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1962년 6월 21일에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Kzyl-Orda)에서 태어나서, 5년 뒤에 레닌그라드(Leningrad)로 이주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림과 조각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겼다. 특히 여러 차례 당국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아마추어 록그룹을 조직하였으며, 1982년에는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록 음악이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소련 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방정책으로 인해 서구와 교류가 더 쉬워졌고, 당국의 간섭도 확연히 누그러졌다. 이 때 빅토르 최의 록 음악 활동은 절정에 이르러, 1988년부터 덴마크, 프랑스,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였고, 1990년에는 일본도 방문하였다. 잦은 해외 공연을 경험한 그는 소련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나타냈지만, 1990년 8월 15일에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28세였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한국계 록가수 빅토르 최의 동상이 모스크바 대학가에 세워진단다. 빅토르 최는 구 소련 말기에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 싹트던 시절 변화와 개혁을 노래하며 소련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한 바 있다. 모스크바 시의회는 최근 사망 15주년을 맞은 빅토르 최의 동상을 모스크바 국립대학 부근에 세우기로 했다. 동상은 당초 빅토르 최의 추모의 벽이 있는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세우려 했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모스크바 국립대학 부근으로 장소를 옮겼다. 동상은 빅토르 최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청동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구 소련 말기,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 싹트던 시절 빅토르 최는 록 그룹 '키노'를 결성해 변화와 개혁을 노래했다. 한국계 소련인, 즉 까레이스키였던 그는 '러시안 록'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소련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는데 그가 출연한 영화 ‘이글러’는 엄청 히트를 쳤단다. 특히 구 소련체제를 비판한 노래를 많이 불러 자유와 반항을 갈구하는 80년대 러시아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우리는 빅토르 최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가 비극적으로 죽어서 유감이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언제나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빅토르 최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가 새로운 세상에서 평안을 찾았으리라 믿는다. 그룹 키노와 가수들은 살아있고, 빅토르는 단지 담배를 피우러 간 것이다." 빅토르 최의 인기는 사후에도 여전해 모스크바와 카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등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빅토르 최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지 15년이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매일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싱싱한 꽃을 갖다놓고 추모 벽 아래에는 담배가 올려 진다. 그의 묘는 그가 활동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원묘지에 있다. 아르바트 거리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인 발레리나 분수 상은 수리를 한다고 비닐로 감싸놓았다. 그래도 황금 천사상이 보인다. 거리 중앙에는 벤치와 함께 예쁜 목조 가게들이 있다. 꿀도 팔고 기념품들도 팔고 있다. 예술의 거리 아르바트를 걷다보면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강남스타일의 싸이의 커다란 인형도 만난다. 비대칭의 예술적인 건물들도 만난다. 식당과 카페도 많다. KFC를 발견했다. 손님이 많다. 우리도 치킨 한 통을 주문해서 야외 탁자에서 먹었다. 시계탑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한다. 아르바트 광장에서 고행자 시몬의 교회(Khram Prepodobnogo Simeona Stolpnika na Povarskoy)가 있는 곳으로 간다. 초록색 양파 모양의 돔이 인상적이다. 오래되고 수수해 보이는 교회다. 왜 고행자 시몬의 교회라 이름이 붙어있는지는 모르겠다. 걷다보니 러시아 동방정교회(Temple of Great Ascension Nikitsky Gate)를 만났다. 규모가 제법 크다. 노란색이 인상적인데 주택가 안에 있다. 더 걸어가니 큰 대로가 나온다. 쿠린드 스카야 광장 빌딩(Kudrinskaya Square Building)이 나온다. 구 소련의 스탈린 스타일의 고층 빌딩이 7개(세븐 시스터즈)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다.원래는 8개의 건축물이 예정되어있었으나 자르야드 행정 빌딩은 건설되지 않았단다. 1950년에 시작되어 1954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그래서 보통 스탈린의 고층 건물이라고 부른다. 높이가 160m로 22층 건물이다. 스탈린 통치 막바지에 지어졌다. 7개의 건물은 우크라이나 호텔, 모스크바 대학, 러시아 외무부 건물, 호텔 레닌그라드 코텔니체스카야 제방 빌딩, 레드 게이트 행정 빌딩이 있다. 비슷한 건물이 동구권 나라에도 여러 개 있다. 특히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도 보았다. 길 건너가 동물원이다. 보통 동물원은 외곽에 있기 마련인데 모스크바 동물원은 시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지하철도 있다. 이 동물원은 역사도 깊어 개장 150주년을 넘었단다. 1864년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모스크바 동물원은 아직도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꿈과 추억이 간직된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백호랑이를 비롯한 전세계 희귀종을 포함 550여종, 3,300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생활하는 현재 방대한 규모다. 모스크바 동물원은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치루 던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문을 닫지 않고 개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볼거리와 놀이 거리가 없었던 당시에 동물원은 모스크바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서 모두가 한번쯤 꼭 가고 싶은 여행 장소였다고 한다. 모스크바 천문대(Moscow Planetarium)를 만났다. 최근 재건축된 모스크바 천문대는 과학적 목적과 교육적 목적이 혼합된 주요 관광지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이들의 방학 활동 추천지역으로 부모들과 자녀가 함께 방문하여 위성과 행성의 고리를 직접 관찰하기도 한다. 둥근 회색 지붕이 인상적이다. 길을 건너 작은 공원(아쿠아리움 공원)에 들어서니 공연예술 극장(모스소비에트 극장 Mossovet State Academic Theatre)이 있다. 극장 앞에는 켄타우로스가 팬플릇을 부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말인 상상의 종족의 일종이다. 몸에서 말의 부분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며, 이 힘을 다스리는 정신이 상반신을 이루는 사람 부분에 있다. 공연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앞쪽에는 세계최초의 풍자극장 사치르가 있다. 길가에 있는 건물이 1940년에 개관한 차이코프스키 콘서트 홀(Tchaikovsky Concert Hall)이다. 공연 포스터가 잔득 붙어있다. 길 건너편에는 스탈린 건축물의 냄새가나는 베이징 호텔 건물이 버티고 있다. 그 앞이 개선광장이다. 이 광장은 모스크바 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의 광장이다. 이어지는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다. 커다란 그네가 인상적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다인용 그네다. 연인과 함께, 또는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그네를 탄다. 커다란 그네에 혼자 타는 사람도 있다. 그 뒤로 동상이 하나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동상이다. 1958년 조각가 키발니코프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Pamyatnik V. V. Mayakovsk)는 출생이 1893. 7. 19 러시아 조지아 바그다디이고, 사망은 1930. 4. 14, 모스크바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볼셰비키 혁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한 그는 공산당의 열렬한 대변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다. 15세 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에 입당하여 반국가활동으로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었다. 1909년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석방된 뒤 모스크바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러시아 미래주의 모임에 참여해 곧 그들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의 시는 눈에 띄게 자기주장이 강하고 도전적인 형식과 내용을 지녔다. 그의 시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소비에트 문단에서 가장 정력적 활동을 인물이었던 그는 서정적인 시들과 혁신적 기교로 많은 소비에트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4년에는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비가를 총 3,000행에 걸쳐 써냈다. 1925년 이후에는 유럽·미국·멕시코·쿠바를 여행했으며, 신랄한 소묘를 실은 소책자 〈나의 미국 발견 Moye otkrytiye Ameriki〉(1926)과 여러 편의 시에 자신의 인상을 기록했다. 또한 틈틈이 영화 대본을 썼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사랑에 실패하고, 소련의 현실과 점차 멀어지고, 해외여행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자 그는 모스크바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비에트 문단에서 가장 정력적인 인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공리주의적·시사적인 그의 시가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극히 서정적인 시들과 혁신적 기교로 많은 소비에트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에 스탈린이 그를 일컬어 "우리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훌륭하고 재능있는 시인"이라고 선포한 뒤에는 러시아 밖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들어섰다. 이 거리에는 이미 14세기에 모스크바와 트베리를 연결하는 길이 나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서는 막강한 러시아의 대공들의 세력으로 모스크바의 중요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후 100년이 지나 이 거리는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길의 초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다라서 이곳에는 자연스레 모스크바 상류사회가 자리 잡았고, 그 덕분에 아름다운 궁궐과 대 저택들이 즐비하였다. 1896년에는 99개의 아름다운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 후 1932년 스탈린 정부는 막심 고리키의 이름을 이 거리에 붙이게 된다. 이 시기에 아름다운 저택과 궁궐들이 많이 소실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0년 거리의 이름은 다시 트베르스카야로 돌아오게 된다. 이 거리는 크렘린 북단에 위치한 마네쥐 광장 북서쪽에서부터 시작된다. 트베리는 1135년에 건설되었으며, 1485년까지 트베리공국의 수도였다. 1931년부터 1990년까지 칼리닌 시라고 불리웠다. 현재 오래된 건물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트베르스카야는 옛도시 트베리로 연결되는 거리라는 뜻이며, 레닌그라드 대로는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의 제2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이름)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1 트베르스카야 얌스카야 거리에서 얌스카야는 역, 역참, 여인숙의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역참이 있던 곳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는데, 비슷한 점이 재미있다. 비즈니스 센터(Oruzheynyy)건물이 뒤로 보인다. 현대식 아름다운 건물인데 도시와 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메리어트 그랜드 호텔도 있고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 건물도 있다. 민스크 호텔 건물 맞은편에는 국립 중앙 러시아 현대역사 박물관 건물이 있다. 더 걸어가니 1880년에 오페쿠쉰에 의해 완성된 푸쉬킨 동상이 있고, 푸쉬킨 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이즈베스티야, 노보스티 등 러시아의 주요 언론사가 모여 있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벤치가 즐비한 곳에 비둘기들이 유난히 많다. 주변에 러시아 전통음식 블린과 통감자를 현대식으로 체인화 시켜 광장부근에서 팔고 있다. 예전에 줄서기로 유명했던 러시아 최초의 맥도날드 매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광장 뒤쪽에는 샘과 가로수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독서를 하며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즐긴다. Molotoff Hotel이 있는 건물의 대형 광고판이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빛이 난다. 오후 4시 8분이다. 대로에서는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충돌해서 사고가 났다. 차들이 밀려있고 경찰들이 모여온다. 오토바이는 누워있고 승용차는 비딱하게 돌아서 있다. 우리는 갈 길을 간다. 오스트로프스키 집 박물관도 있다. 장군 기마상이 있다. 모스크바를 처음으로 세운 유리 돌로루키의 동상이다. 동상이 서 있는 곳이 트베리 광장이다. 그 앞에 모스크바 시청이 있다. 8개의 원주로 둘러싸인 2층짜리 건물이다. 대형 온도계가 정문에 붙어 있는 러시아 교육부 건물도 있다. 마네쥐 광장이 보인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메이어홀드 집 박물관, 에르몰로바 극장이 있다. 두 사람이 서있는 동상(Monument of the Stanislavsky and Nemirovich-Danchenko)이 있다. 네미로비치 단첸코(1858~1943)는 러시아의 극작가·소설가·연출가다.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1863년~1938년)는 러시아의 연출가이며 배우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er)을 창립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한 연기 기법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연기 방식의 원조이자 모범이 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의 모스크바 음악 극장을 설립했다. 짼뜨랄라야 호텔 뒤편에 있다. 골목으로 들어가니 체홉의 동상이 구석에 있다.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의 일류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근대 단편소설에서 가장 앞선 거장으로 꼽히며 19세기말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특출한 존재이기도 하다. 걸작으로는 〈갈매기 Chayka〉·〈바냐 아저씨 Dyadya Vanya〉·〈세 자매 Tri sestry〉·〈벚꽃 동산 Vishnyovy sad〉이 있다.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휴양지인 얄타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병고에 시달리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창작열은 왕성하여 여러 소설을 집필했다. 1900년에는 러시아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희곡 〈세 자매〉로 그리보예도프 상을 수상했다. 1904년 건강이 악화되어 아내 크니페르와 함께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떠났으나 그해 7월 15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조국으로 돌아와 모스크바 노보제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더 걸어가며 보행자 도로 길 가운데를 걷고 있는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 1891~1953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동상도 만날 수 있다.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대전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음악가의 본분을 잃지 않고, 폭넓은 영역에서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으며, 음악원에서부터 러시아 음악의 혁신에 열중했다. 1918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고무되어 신작들을 쏟아냈지만, 이내 혼란을 피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했다. 1921년 미국에서 자작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상연했고, 프랑스에서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성해 자신만의 역동적인 민족양식의 정점을 기록했다. 1934년 귀국해 소련 문화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고, 전통적인 조성·선율 기법과 20세기 음악의 양식적 개혁을 결합시켰다. 1952년 최후의 대작 제 7교향곡을 남기고, 다음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마네쥐 광장으로 왔다. 엄청 복잡하다. 2층 버스에 트럭과 승용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보인다. 오전에도 많았는데 오후에는 더 사람들이 참 많다. 다시 붉은 광장으로 들어갔다. 굼 백화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저물어가는 날과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그것도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예쁜 자전거 카페가 옆에 있다. 사람이 참 많다. 언제 봐도 지겹지 않다. 사진 찍는 이들이 엄청 많다. 떠나야 하는 우리도 아쉬워 사진을 찍어본다. 굼 백화점에 들어가 보았다. 중앙 분수가 있는 곳에 임시로 마련된 작은 코너 에서는 20루블(400원)하는 아이스크림이 불티나게 팔린다. 줄을 서서 산다. 백화점을 둘러보고 나오는 계단에서 밖을 보니 광장에 있는 레닌 묘가 정면으로 보인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결혼식 사진을 찍는 신랑신부와 친지들이 정겨워 보인다. 해가 길다. 이제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기위해 역으로 간다. 모스크바의 총주교(總主敎)였던 ‘에르모겐 동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건너편에 있는 World Clock Fountain(분수)의 유리 원형 지붕위에는 말 탄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계절을 나타낸다는 4마리의 말 조각상을 또 만났다. 그 옆을 보니 작은 냇가(수로)에 여러 가지 동화 속 주인공을 기념물로 만들어 놀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여우와 두루미, 개구리 왕자, 백조와 공주, 미운오리 새끼, 곰과 여우, 어부와 부인, 이야기를 하나씩 기억해 보니 기념물이 더 재미있다. 모스크바 국립대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Institute of Asia and Africa MGU)앞에는 앉아있는 동상이 보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작은 슈퍼에 들러서 우유와 소라빵, 물을 샀다. 밤새 기차를 타고 달려가야 한다. 메트로를 찾아간다. 열심히 메트로를 타고 깜사몰스카야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온다. 야로슬라블 역(Yaroslavsky Railway Station)이 보인다. 역 건물이 멋지다. 야로슬랍스키 역(Ярославский вокзал)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9개의 철도역 중 하나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이며, 몽골이나 중국 및 북한 등지로 가는 국제 열차가 대부분 출발한다.역이 위치한 콤소몰스카야 광장을 접하고 레닌그라드스키 역과 카잔스키 역이 위치한다.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과 5호선의 환승역인 콤소몰스카야 역이 광장에 있다. 역 건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똑같은데,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건물이 이 역을 따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메트로 건물도 예쁘다. 그 옆에는 레닌그라드 역(Leningradsky Railway Station)의 시계탑이 오후 5시 15분을 가리킨다. 우리는 길을 건너 카잔 역으로 갔다. 짐을 찾았다. 역 매장에서 캐피르와 빵, 쥬스를 구입했다. 이제는 기차를 타는 것이 할 일이다. 18시 50분,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밤차를 탄다. 4번 트랙이다. 9호 차량에 탑승했다. 기차를 기다리다가 새동을 맞았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철 구조물 밑인데, 새들이 잔득 앉아있다. 6인실 51번 52번 자리다. 창가라 맘에 든다. 기차는 출발했다. 기차 시간표를 보니 우리 기차의 최종 목적지는 첼랴빈스크 행이다. 몽골 만주 노선이다. 가는 길에 우리는 내려야한다. 이제 기차에서 살아남기를 해야 한다. 창가에 앉아서 오늘 일정을 정리한다. 100달러가 6037루블이다. 1달러는 약 60루블, 1루블은 20원으로 정했다. 금방 모스크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들판으로 접어든다. 자작나무 숲이 나타난다. 해가진다. 왠지 쓸쓸해 보인다.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 데 허술한 통나무(판자) 집에 만들어진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기차 안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음식 냄새가 난다. 뜨거운 물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바쁘다. 저녁식사 시간인가 보다.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같은가 보다. 가지고 온 음식들을 펼쳐서 각자 식사를 한다. 우리도 포터를 꺼내 컵라면을 넣고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남은 닭고기를 반찬 삼아 식사를 했다. 기차는 계속 달려간다.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한다. 흐뭇하다. 뜨거운 물이 잘 나와 좋다. 식사 후 그릇은 휴지로 닦고 화장실에 가서 씻어왔다. 간단하게 해결했다. 얼마입니까? 라는 러시아 말을 찾아 중얼거렸다(스꼴꺼 스또잇). 앞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우리 발음을 듣고는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칭찬해 준다. 먹고 눈치껏 침대를 정리하다보니 달리는 기차 창밖은 어둡다. 역무원이 준 시트를 깔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작은 역은 스쳐 지나간다. 아내는 위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아래층에 누웠다. 편안했다. 흔들어주니 잠이 금방 온다. 깜깜해서 밖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속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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