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일[2019. 04. 07]
오늘 복음 장면에선 한 여인이 잔인한 형태로 고해를 강요당하고 있다(요한 8,1-11). 일종의 강요된 간증이라고나 할까. 사실 진상은 드러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치유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초대 교회의 고해 관습이 ‘일회적이고 공개적’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신학적 출발점은 아벨 살인 이후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카인에게 주님께서 찍어주신 표(히브리어로 ‘오트’)이다. 자신의 형제에게 저질렀듯 스스로도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숨겨야 하는 법이지만, 주님께선 오히려 표를 찍어 드러내신다. Ecce Cain.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오트’는 그리스어로는 주로 ‘세메이온’(한국어로 표징)으로 번역된다. ‘오트’는 창세기와 탈출기에서 두 번씩 더 등장한다. 노아의 홍수 이후 주님께서 당신과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표징(창세 9,12.17)으로서 구름 사이의 무지개와 주님께서 당신과 성별한 백성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징으로서 안식일 계명(탈출 31,13.17)이 바로 그것이다.
카인의 표 역시 구름 사이의 무지개와 안식일 계명처럼 모든 생명과 연관되고 본질적으로 시간적 차원에서 의미부여 받는다. 우선 카인의 표로 대표되는 고해 성사는 온 세상을 싸안을 정도로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지금 행하는 사적 개별 고해 형태는 6세기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관습에로 소급된다. 원래 공개 파문(Excommunicatio)되고 참회와 화해(Reconciliatio)를 통해 일생에 단 한 번 용인된 고해가 7세기에는 사적 차원에서의 (영적 진보와 정체에 대한) 근심과 염려까지 다 포함하면서 개별적 비밀 고해 형태로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급속도로 적용된 것이다. 많은 장점이 있지만, 죄와 그 결과의 연대성과 공동체적 차원이 문제이다. 나의 죄가 어떻게 내 주변 및 세상과 연관되는 지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사적인 차원에 국한된 채 머무는 죄는 없기 때문이다. 사적인 차원에로 축소된 죄는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게끔 이끈다(Entculpatio).
십계명 중 신학적 중심을 차지하는 안식일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시간적 차원에 무게 중심을 둔다. 공간을 성별한 것은 인간이었지만, 시간은 하느님께서 직접 성별하셨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고해 관습 역시 시간적 차원을 강조했다. 대 바실리오의 >서간<에는 참회 기간과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첫째 단계 참회자, 일명 ‘우는 자’들은 성당 문 앞에서 3년간 성당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기도를 청하며 울먹인다. 둘째 단계 참회자, 소위 ‘듣는 자’들은 성당 문 옆에서 3년간 말씀의 전례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셋째 단계 참회자, ‘무릎 꿇는 자’들은 성당 안에는 들어올 수 있었으나 3년 동안 무릎 꿇은 채 말씀의 전례에만 참석 가능했다. 마지막 네번째 단계 참회자, 곧 ‘서 있는 자’들은 2년간 선 채로 말씀의 전례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죄와 그것에 수반되는 결과는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계속 기워 갚아야 한다. 고해 후 사제가 사죄경을 바로 읽는 것이 아니라, 보속이 채워진 후 죄인의 용서를 위한 중재기도가 드려졌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원래 보속은 상당한 시간과 대가를 요구했고 사적인 차원을 넘어섰던 것이다.
리용의 이레네오가 “Quod non assumptum, non sanatum est(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았네).”라고 강조한 것처럼, 죄와 그것에 수반되는 결과는 시간을 두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하는 법이다. 나의 죄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고해성사를 앞두고 비껴갈 수 없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