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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5일 토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4,6ㄴ-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6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며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사이들이 항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안식일 규정을 내세워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열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는 규정을 강조하며 이 정신을 왜곡하였습니다.
성경의 전통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신 까닭은,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지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맡기신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올바른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또 얼마나 큰 자비로 세상을 돌보시는지 깨닫고자 진심으로 노력하는 하루를 보내기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주일에 드리는 미사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봉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의무이기에 참례하기보다 하느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참례합시다. 그렇게 미사를 드릴 때 그 미사는 기쁨과 찬미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한 세기를 살아간 여성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여성의 이름을 적으라는 설문 조사 때마다 첫 자리는 언제나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1910~1997)이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일컬어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에 지나지 않는다며 극구 자신의 선행을 감추었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막사이상, 슈바이처상, 요한 23세 평화상,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업적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1997년 9월 5일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 인도 정부는 국장으로 타계를 애도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시 사후 5년이 지난 후에야 시복 절차를 추진하는 관례를 깨고 선종 6년만인 2003년 10월 19일에 그녀를 복녀품에 올렸습니다.
후에 ‘계시의 날’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 1946년 9월 10일 데레사 수녀님은 피정을 위해 콜카타를 떠나 다르질링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또 하나의 부르심이자 ‘부르심 안에 부르심’이 될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이웃들 가운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웃들을 섬겨라!” 수도복 대신에 인도 전통 의상인 투박한 ‘사리’를 걸치고 간단한 의료지식만을 익힌 그녀는 무작정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가 가장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사도직의 모토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임종자의 집, 나환자 치료센터, 무료급식소, 결핵요양소, 에이즈 치료센터와 같이 너무 힘들어 기존 수도회들이 꺼리던 사도직,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만인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던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영성생활의 정점을 찍은 살아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던 무거운 십자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생애 내내 짙게 드리웠던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그녀의 시복 청원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은 사랑의 선교회 소속 브라이언 콜로디 척 신부입니다. 그는 그녀가 살아생전 영적 지도자들과 주고받았던 서한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제목이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입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자신이 남긴 모든 기록을 태워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사려 깊은 영적지도자들은 언젠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필요한 자료라 여기고 많은 편지들을 보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의 서한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자주 자신이 겪은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시복시성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더 큰 놀라움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계속되는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하느님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영적 지도자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고통스런 내적 경험들이 위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콜카타에서 봉사를 시작한 1947년 이래 1997년 돌아가실 때 까지 약 50년간에 걸쳐, 다시 말해서 전 생애에 걸쳐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을 지속적으로 겪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위대한 사업이 시작될 무렵(1946~1947년) 그녀의 영적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 순수한 사랑, 강한 믿음, 열렬한 기도로 충만했습니다. 더 나아가 환시, 탈혼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달콤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분과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 그분으로부터 오는 한없는 위로는 찰나였습니다. 길고도 메마른 영적 사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영적생활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욱 더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고 특히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분과 하나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가난한 이웃들인 콜카타의 빈민가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했습니다.
“빈민가를 걸어가거나 어둡고 누추한 곳에 들어설 때 주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그 결과 연옥체험과도 같은 혹독한 영적 시련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로 그 위대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해나간 것입니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그녀 내면의 심연의 고통을 감추었고 내면의 골고타를 감추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는 영적 지도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성녀가 된다면 분명 ‘어둠의 성녀’일 것입니다. 언제나 어둠에 빛을 밝히러 세상에 내려가 있을 테니 천국에는 없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짙은 영적 어둠과 심연의 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 인생의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를 바꾼 발명품 가운데에는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된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무거운 물건을 옮기려면 더 많은 사람이 모여 더 세게 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물건을 더 세게 끄는 대신 그 밑에 둥근 바퀴를 달고 굴대와 연결했습니다. 힘을 더한 것이 아니라 마찰을 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에게 더 무거운 짐을 끌게 하려고 채찍질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의 목을 조르는 대신 어깨로 힘을 쓰도록 마구를 바꾸었습니다. 말의 힘을 키운 것이 아니라 힘이 흐르는 길을 바꾼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잘 타려면 고삐를 더 강하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사람의 발 아래에 작은 등자를 달았습니다.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바꾼 것입니다. 바퀴와 굴대, 말의 마구와 등자는 거대한 물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발상의 전환이 인류의 이동과 농업과 전쟁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힘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방향과 구조를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우리에게 더 많은 힘을 가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참된 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신앙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발상의 전환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하느님께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고, 많은 제물을 바치며, 엄격한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께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왕의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병든 이들의 몸에 손을 대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높으신 분이 낮아지셨고,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생명의 주인이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과 성공을 쫓아갑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며, 더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원수를 이겨야 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받은 만큼 돌려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와 패배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먼지 나는 길을 걸어온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가장 낮은 사람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인이 종을 섬겼고, 스승이 제자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권위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일으켜 주고,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며,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는 권위였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위대함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에도 발상의 전환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온달을 가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놀렸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평강 공주가 온달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강 공주는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금 부족한 모습만 보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성실함과 용기를 보았습니다. 평강 공주의 믿음과 격려를 통해 온달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훌륭한 장수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자, 그 사람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재산과 학벌과 능력으로 판단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캐오를 욕심 많은 사람으로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실패한 제자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과거보다 그 사람이 변화될 가능성을 먼저 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굶주린 제자들보다 안식일의 규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안식일의 규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억압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친 사람이 쉬고, 굶주린 사람이 먹으며, 병든 사람이 치유되고,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회복하도록 주어진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없애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고, 전례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존재하며, 교회는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목적을 잊고 수단만을 강조하면 좋은 제도와 규칙도 사람을 억압하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일이 아니라,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일입니다. 미사는 의무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성체로 힘을 얻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시간입니다. 교회의 봉사는 나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자리입니다.
실패를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실패는 새로운 길을 배우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용서할 때 미움의 감옥에서 먼저 풀려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퀴는 더 많은 힘을 만들지 않았지만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말의 마구는 말의 힘을 키운 것이 아니라 힘이 흐르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등자는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의 생각과 시선과 자리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지배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판단하는 시선에서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옮겨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판단보다 자비를 먼저 선택하며, 높은 자리를 찾기보다 낮은 곳에서 기쁘게 섬기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믿으며 복음이 보여 주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사람 일 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지요
쉼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쉼을 위해 쉬는 것은 아니지요
일을 위해 쉬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쉬는 것이지요
사람이 일해야 할 때 일할 수 있고
사람이 쉬어야 할 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기에 일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답게 일할 수 있고
사람답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 일을 위해 있지 않고
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사람이 쉼을 위해 있지 않고
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일도 쉼도 사람을 옥죄지 않고
사람이 일도 쉼도 누려야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살맛나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하느님나라이지요
오늘의 성인
성녀 데레사(마더)(Teresa(Mother))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 콜카타(Kolkata)
활동연도 : 1910-1997년
같은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시성식을 마친 성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ia, 또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터키가 점령 중이던 알바니아(Albania)의 스코페(Skopje)에서 알바니아계인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네 보약스히야(Drane Bojaxhiu)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음날 곤히아 아녜스(Gouxha Agne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태어난 지 2년 뒤인 1912년 알바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스코페는 여전히 알바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스코페는 세르비아를 모태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은 그녀는 9살 때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소녀 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8세 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평소 선교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이 자신을 수도성소에로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회원인 본당신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그 해 11월 29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전교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1929년 인도(India)에 도착하여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Darji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하면서 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그 후 7년간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지명은 캘커타, Calcutta)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1944년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 참석차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그녀 스스로 후에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묘사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녀는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구식 수녀복장이 아닌 인도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사리를 수도복으로 택한 그녀는 우선 성가정 병원에서 속성으로 기초 간호학을 이수한 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성모여자고등학교 출신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수도회에 받아주길 간청해 첫 지원자로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7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살고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부터 함께한 12명의 회원들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찼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과 콜카타 외곽에 나환자들을 위한 자립 센터도 열었다.
1965년 2월 1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교구 설립 수도회로서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만 활동하던 사랑의 선교회가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이미 사랑의 선교회에는 3백여 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에 해외 첫 분원을 연 이후 아프리카, 호주, 유럽 등 여러 대륙에 진출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더 테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그녀가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50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조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의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상을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섬기고 사랑한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후 사랑의 선교회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1970년 이후 마더 테레사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시설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도 설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들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선종 소식에 종교와 이념,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가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었다며 애도하였다.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선종 6년 만에 거행했다. 교황은 3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다”며 그녀의 시복을 선언했다.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Lawrence Justinian)
신분 : 총대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베네치아(Venezia)
활동연도 : 1381-1456년
같은이름 : 라우렌시노, 라우렌시누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씨노, 라우렌씨누스, 라우렌티노, 라우렌티누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유스티니아니, 주스티니아니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그는 19세 때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처녀로부터 영원한 지혜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본적인 욕망에 만족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참된 행복을 찾아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성 라우렌티우스는 산 지오로지오(San Giorgio)의 아우구스티노회에 있는 그의 삼촌 마리노 퀘리노(Marino Qeurino)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삼촌은 그에게 수도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집에서부터 명예와 부 그리고 세속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수도자적인 금욕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그의 건강을 염려한 그의 어머니는 결혼 계획을 통해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삼촌의 충고를 감추고 성 라우렌티우스는 어머니의 소망을 거부하고 대신 삼촌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자주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산 지오로지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생활과 참회의 생활을 통해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또한 미사 집전을 통해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돕고, 그들이 거듭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켜 주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그는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의 행정과 재정 관리 등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는 그를 베네치아 교구의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1456년 1월 8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성인의 축일을 9월 5일로 정하였다.
그는 라우렌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n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노 유스티니아노)로도 불린다.
성 베르티노 (Bertinus)
활동년도 : +700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생베르탱(Saint-Bertin)
같은 이름 : 베르띠노, 베르띠누스, 베르티누스
프랑스의 쿠탕스(Coutance) 근교에서 태어난 성 베르티누스(또는 베르티노)는 뤽세이유(Luxeuil)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그의 친구인 테루안(Therouanne)의 주교 성 아우도마루스(Audomarus, 9월 9일)는 성 베르티누스와 같은 지방 출신인 몸몰리누스(Mommolinus)로도 불리는 성 뭄몰리누스(Mummolinus, 10월 16일)와 성 베르트란드(Bertrand, 1월 24일)를 초대하여 자신을 도와 프랑스 북부 파스 드 칼레스(Pas-de-Calais) 지방의 모리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였다.
성 베르티누스는 동료들과 함께 시티으(Sithiu)에 수도원을 지었고, 성 아우도마루스 주교는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의 수도 규칙을 따르도록 하며 성 뭄몰리누스를 수도원장으로 지명하였다. 콘스탄츠(Konstanz) 출신으로 뤽세이유에 머물던 성 뭄몰리누스가 661년경에 누아용(Noyon)의 주교로 임명되자 성 베르티누스가 원장이 되었다. 그는 시티으 수도원을 프랑스의 학문과 선교의 중심 수도원으로 육성하였다. 후일 시티으 수도원은 성 베르티누스 사후 그를 기념하여 생베르탱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성 베르티누스의 문장은 배이다.
성 베르트란드는 성 아우도마루스와 성 베르티누스의 동료로서 생캉탱(Saint-Quentin)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 전에는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의 선교사로 활약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