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산성(華山山城)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 산230
198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화산(華山)에 있는 미완성의 산성이다.
1709년(숙종 35)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윤숙(尹淑)이 4개소의 성문(城門)을 기초로 한 뒤 먼저 북문(北門)과 수구(水口)를 만드는 등 축성을 시작하였으나 흉년이 들고 질병이 만연하여 공사를 중지하였으며 이후로는 방치되었는데 성벽의 대체적인 길이는 1.7㎞이다.
북문은 무사석(武砂石)을 이용하여 홍예(虹霓)를 틀어 정교하게 만들었으나 완공을 보지는 못하였다. 수구(水口)는 자연석으로 교안(橋岸)을 마련하고 한가운데에 네모난 돌로 여러 겹 쌓아 석주형(石柱形)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장대석 1매를 건너지르고 동틀을 목침 놓듯이 드문드문 놓은 뒤 장대석을 건너질러 멍에귀틀처럼 하여 전체적인 형태는 갖추었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늘전망대 : 경북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 1567-2
풍차전망대(風車展望臺)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 산243
삼국유사(三國遺事)테마파크
소재지 :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이지리 1653 (삼국유사면 일연테마로 100)
삼국유사 테마파크의 핵심인 ‘삼국유사’를 테마로 일연대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麟角寺)’의 지붕과 일연대사를 형상화하고, 삼국유사를 고서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와 ‘삼국유사 테마파크’의 정체성을 함께 담아낸 디자인입니다.
군위(軍威)화본역(花本驛)
소재지 :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1224-1
화본역(Hwabon station, 花本驛)은 중앙선의 철도역이다.
군위군 유일의 여객열차 정차역으로, 일부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했다.
1938년에 중앙선의 보통역으로 여객 취급을 시작했으며, 중앙선의 복선 전철화와 함께 의흥면 파전리 방향으로 철로가 이설됨에 따라 의흥면 연계리에 신설한 군위역으로 업무를 이관한 후 2024년 12월 20일에 봉림역 및 우보역과 함께 폐역됐다.
관광테마 역으로 최근 개발되었기 때문에, 역사 건물 자체와 급수탑은 관내 유적으로 보존 중이다.
역 구내에 급수탑이 남아 있으며, 한국철도공사 선정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역 광장에는 박해수 시 '화본역'이 적힌 시비가 있다.
한밤마을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은 대구 군위군 부계면에 자리한 곳으로 집집마다 야트막한 돌담들이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나누듯 정겨운 모습으로 둘러져 있는 마을이다.
1000년 세월에도 10리의 돌담과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주변의 정자와 조경들이 아늑하여 찾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950년경 부림 홍씨의 입향조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 이름을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후 밤야(夜)자 대신 대율(大栗)로 고쳐 부르게 되어 대율리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天主敎) 한티순교성지(殉敎聖地)
소재지 : 대구광역시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5
경상도지방 신앙공동체 형성과 신유박해(1801)초대 한국 천주교신자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박해가 없는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했다.
황사영 『백서』와 「사학 죄인 사영등 추안」,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말하는 황일광, 김종한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했던 때는 1798년 전후이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더욱 늘어났다.
1800년 순조純祖 즉위년에는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정순왕후 (貞純王后)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다.
노론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실권을 잡자 남인 시파를 탄압하려는 의도로 남인계 서학자 들을 구속했다.
서학을 금하는 포고가 발표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실시돼 천주교에 대한 수색이 엄격해졌다.
이 엄중한 감시 하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이 든 정약종의 서책함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남인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붙잡혔다.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강완숙 등은 참수당하고, 권철신 등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이 박해는 지방으로까지 번져 이존창이 순교하고, 주문모 신부가 자수해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백서사건 이후에는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돼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1801년 말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반포 이후 끝났으나 이 박해로 천주교신자 400여 명이 유배되고, 100여 명이 처형돼 초창기 한국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신자들의 지역 분포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신자들은 서울,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이 박해로 인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
특히 신유박해가 영남지방에까지 미치지 않자 경상도지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안전지대로 인식됐고,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도 점차 증가됐다.
또한 신유박해 때문에 소위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이 전국 여러 지방으로 유배(流配) 또는 도배(徒配)됐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1811년 작성된 『사학징의』에 의하면 신유박해 때 경상도 지방에 유배된 이들은 71명이다.
‘한티’는 ‘큰 고개’, ‘큰 재’라는 뜻이다. 이 말처럼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또 달리 전해지는 말도 있다.
한티는 ‘함께’라는 뜻을 지닌 경상도 방언 ‘한테’에서 유래했다고도 전해진다. ‘한테’가 변하여 한티가 되었다면 한티 순교성지는 그 말 뜻대로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묻혔다는 의미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