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미·일·러와 동질이 아니다
- 한국전쟁으로 본 중국의 실체
“김일성의 용감한 모험은 실패했다. 남한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고 군사력도 우세하다고 큰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만 믿고 남침에 동의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현재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고 이미 발표해 버렸다. 전쟁터에서 미군과 충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공군력을 동원해 엄호하겠다.”(스탈린)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마오쩌둥)
두 권의 책,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455쪽)와 해리슨 E.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783쪽)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 파병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중국인 이야기>에서는 주로 중국 내부 사정과 김일성이 많이 거론되는 반면, <새로운 황제들>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첨예한 갈등상이 펼쳐진다.
2008년 노무현은 10·4선언 기념식 연설에서, “6·25는 남침이었고 한국전쟁은 ‘내전’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6·25와 한국전쟁을 구별해서 파악한 것이다. 노무현이 말한 ‘한국전쟁 내전론’은 진보학계에서 취하고 있는 유력한 관점 중 하나이다. 그리고 ‘6·25 남침설’은 이제는 보수건 진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남침을 ‘죄악시’한다. 그런 나머지 김일성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조차 꺼려한다. 꺼려하기 때문에 잘 알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 거의 모르는 채로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종종 김일성과 박정희의 동상 사진을 나란히 올리면서 두 사람을 거의 동질로 취급하는 포스팅을 대하게 된다. 정말 두 사람은 동질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관점이 제시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6·25 남침’을 비난하려면 최소한도 왜 그런 일이 빚어졌는지 전후의 인과적 팩트는 알고서 해야 하지 않을까? 김일성이건 이승만이건 폭력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김일성은 강했고 이승만은 강한 척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38선에서 무수한 도발을 감행했다. 동시에 단지 반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은 이럴 때에 일어나는 법이다.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향해 허세와 폭력만을 일삼을 때, 약한 국가는 어김없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949년 4월,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장제스의 국민연합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양자강을 건너는 순간은 중국 인민혁명의 클라이맥스였다. 참고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원래 홍군으로 불리다가 1937년 2차 국공합작(1차 국공합작은 1924년~1927년) 이후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분할, 개편된다. 이때 동북에서는 중국과 조선 연합군의 성격을 띤 동국항일연군이 주력군이었다. 지금 중국 군대의 정식 명칭인 인민해방군은 1947년에 채택된 것이다.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양자강을 건너려 하자 뜻밖에도 스탈린이 제동을 걸어왔다. 스탈린은 미국과 국민군과 인민해방군 3자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미국 편을 들었다. 결국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마오는 무서운 분노를 표출했다.
“아아. 스탈린, 이놈이 양자강을 조선의 38선인 줄 아는구나.”
마오의 인민해방군은 너비 500km의 도강전선을 형성하여 파죽지세로 양자강을 건넜고, 1949년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고, 5월 27일에는 대륙의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으며,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에서 하늘을 오성홍기로 물들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중국 오성홍기의 별들에는 조선인의 피가 배어 있다.”
이것은 27년 동안 중국 총리직(외교부장 겸직)을 견지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가 남긴 말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거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조선인 군대는 중국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위기마다, 고비마다 중국군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나는 만약 조선인의 가열 찬 지원이 없었더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좌절되었거나 상당 기간 늦추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중국 국공내전의 연장선으로 ‘조국통일전쟁’을 수행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남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말대로 김일성은 실패했다. 김일성은 실패한 이유로 미군의 개입을 첫째로 들었다.
그러나 마오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마오는 미군의 개입을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펑더화이의 지휘로 압록강을 넘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국 폭격기의 위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일찍이 대장정에서도 항일전에도 국공내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위력이었다. 마오의 아들 마오안닝이 미군기 B-26의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은 압록강을 건너온 지 불과 34일 만의 참사였다.
공군력은 공군력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군의 파병을 부추기면서 했던 약속인 공군력 지원을 스스로 식언으로 만듦으로써 마오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아, 스탈린... 이 자가 또...”
북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6·25 사흘 만인 6월 28일이었다. 김일성이 ‘조국통일’의 무지개를 그리고 있을 때, 북경의 마오는 비서 스저에게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김일성은 대단히 용감한 지도자’라고 칭찬만 해오던 마오가,
“김일성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조선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쉬었다가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마오의 뜻이 전달되었지만 김일성은 끝내 듣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휘와 관련된다고 본다. 스탈린이 노렸던 것은 마오를 미국과의 전쟁에 몰아넣는 일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황제들』의 저자 솔즈베리는 ‘삼중의 속임수’라고 표현해 놓고 있다. 다만 마오는 조선 인민군이 남으로 계속 내려가자 말없이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이 붕괴되자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패배’로 규정하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였을 뿐이다. 러일전쟁 때 겉으로는 전쟁하는 척하면서 이면에서 미국과 야합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독식하도록 협조한 것은 러시아였다.
6·25 직후 소련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함으로써 미국 참전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역사를 모르는 입진보들은 소련을 과대평가했다. 나는 이것을 강자선호의 유럽사대주의와 관련된다고 본다.
반면에 아직도 입진보들은 중국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본다. 하지만 중국은 대국주의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제국주의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 지도부가 다소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마오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와 한데 싸잡아서 중국을 동질로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세련된 태도인 양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이 빈약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