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라오콘의 표정과 앙소르의 가면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라오콘 군상 (200 BC ~ 70s AD), 바티칸 미술관/ 위키백과
참아온 분노가 끝내 폭발한 운전기사 기택은 칼을 들어 박사장을 찌른다. "냄새가 선을 넘지…." 몰래 엿들은 박사장의 뒷담화가 마음 속 깊이 남았던 터다.
그 행동의 방아쇠는 박사장의 찡그린 표정과 틀어 막은 코다. 자신의 체취를 혐오스러워 하는 표정에 일어난 참극. 영화 <기생충> 클라이맥스의 한 장면이다.
감정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그리고 때론,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표정이 우리의 감정을 뒤흔든다.
1,500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다 포도밭에서 발굴된 <라오콘 군상 Gruppo del Laocoonte>을 보수한 이는 미켈란젤로였다. 평생 독신으로 산 퉁명스런 ‘조각 덕후’ 의 환희는 어떤 표정이였을지 궁금하다. 라오콘은 그리스 고전 예술의 정수이자 예술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다.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정의내린 클래식 양식의 ‘고요한 위대성’ 은 사실 정적靜的인 작품이 아닌 라오콘에서부터 시작된 표현이다. 그는 비극적 사건의 한 장면을 포착한 라오콘을 통해 고대 그리스를 관통하는 미의식을 깨달은 것이다.
<라오콘 군상>은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충직한 사제로 트로이 목마의 진실을 미리 알리려 했지만 당시 신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신은 두마리의 뱀을 보내 그와 죄없는 두 아들까지 꽁꽁 졸라 죽게 한다.
라오콘은 애국자요 선지자였다. 그의 비극에는 특별한 당위성이 없었다. 인간은 최선을 다해 비극을 예측하고 피하려 하지만 종종 삶의 비극은 베토벤의 운명처럼 노크하지 않는다. 비극의 불친절함과 고통은 비례한다.
군상의 미적 수준에 경탄하는 우리의 눈은 중앙에 위치한 라오콘의 얼굴로 자연스레 초점을 맞춘다. 인지상정으로 사람은 부정적 감정 표현에 시선이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의 표정은 비통하기 그지 없다. 원망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표정에 마음이 편치않다. 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선뜻 그에게 다가서지 않는 감상자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마치 화재를 보고 먼 발치에서 멍하니 관망하듯, 우리는 그를 이미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듯 하다.
위로와 연민. 공감과 동정. 라오콘은 마치 그것조차 쉬이 허락치 않는 비극의 본질을 보여준다. 고통은 언제나 오롯이 겪는 자의 몫 아닌가.
빙켈만이 감탄한 것은 라오콘은 그 참담한 실존적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고결한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조각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과연 인간의 고통이 전부였을까.
영화 속 예쁜 여 주인공은 절대 추하게 넘어지지 않는다. 멋진 남 주인공은 곧 죽어도 방정맞게 죽지 않는다. 실제 라오콘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참으로 ‘근사하게’ 비통한 표정이다. 고통받는 육체의 형상들 또한 조화롭게 아름답다.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이 라오콘의 표정을 의도된 '위대한 해부학적 실수’ 라고 했다.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표정이라는 것이다. 이마의 주름살은 고뇌할때 나타나는 주의력 근육으로 라오콘의 육체적 고통이 주는 단발마와는 모순되는 표정이다.
라오콘의 정신은 의지인지 무언지 모르겠지만 그 고결한 ‘줄’을 끝내 놓지 않았기에, 빙켈만은 이 순간, 인간 정신과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복수극 영화다. 주인공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사실 오이디푸스에서 따온) 는 어느날 영문도 모른채 사설독방에 갇혀 15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독방에서 수차례 자살 시도를 하지만 바로 되살려지는 끔찍한 시간.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을 수련하다 다시 이유도 모른채 풀려나 또 다른 비극의 여정을 떠난다.
독방엔 TV 와 함께 두 장의 그림이 있다. TV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여흥(이자 고문)이고 두 장의 그림은 가둔 이의 메시지 였다. 그 중 하나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년)의 <슬픈 남자>(The Man of Sorrows)이다.
이 그림엔 누군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았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오대수의 고통은 슬픈 남자의 얼굴과 오버랩되어 잔혹한 복수극 내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슬픈 남자 (1891),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위키백과
<슬픈 남자>의 표정은 라오콘과는 반대로 '줄'을 완전히 놓아버린 듯 하다. 큰 슬픔에 빠진 남자는 당시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있던 작가 자신이자 고난 속 예수 그리스도의 중첩된 표현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사실 15세기 엘브렉트 보우츠 (Albert Bouts)의 동명 그림을 재 창작한 것으로 원작은 종교화였다.
앙소르는 평생 급진적이고 어두운 화풍으로 세간의 외면 속에 살다가 말년에 이르러 빛을 발해 결국 벨기에의 국민화가로 등극했다. 앙소르는 20세기 초 표현주의 (Expressionism)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이다. 표현주의자들에게 예술이란 인간의 주관적 감정과 감각의 격렬하고 직접적인 표현이였다. 선과 형태, 색채는 그것에 봉사하기 위함이고 균형과 비례의 법칙은 언제든 무시되어도 좋은 틀이였다.
앙소르는 ‘가면’ 을 자주 그렸다. 실제 어린시절 그의 어머니는 가면으로 가득찬 골동품 가게를 운영했다. 가면들을 통해 사회와 인간의 이중성과 사악함, 나약함과 모순을 표현하는 것을 즐긴 앙소르는 통렬한 풍자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위선적인 모든 것들에 저항했다. 그 대상엔 화가 자신도 포함되었다.
어찌보면, 위선과 고결한 정신의 위대성은 종이 한끝 차이일 수 있다. 그가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의 절제는 숭고함이 될수도, 철저한 위선이 될수도 있다. 앙소르는 자신처럼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는 것을 사랑했다.
우리 마음 속 드러내기 싫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그 중 하나 아닐까? 슬픈 남자의 감정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과장되고 극단적인 표정으로 나타난다. 표현주의의 관점에선 그래서 더욱 생명력 있는 원시성을 강조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감정은 끊임없이 통제당한다. 라오콘의 표정은 절제된 감정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상理想’ 이라는 것이 또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불건강하게 만드는 ‘억압’ 으로 변하는지를. 지나치게 억압된 감정은 묵혀둔 쓰레기처럼 언젠간 악취를 풍긴다.
볼 일을 본 후의 변기처럼, 여미기 전의 음식물 쓰레기처럼, 우리 마음 속 깊은 감정들의 표정은 항상 근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랴. 그래서 또 인간인것을. 가끔 스스로 망가질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건강하다.
상처받고 고통받은 감정들을 끝내 외면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고요한 위대성’ 은 어느날 악취가 새어나오는 무표정한 ‘가면’ 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예술은 사회와는 달리 모든 감정을 포용하고 미술은 부정적 감정들을 안전하게 표출할 수 있는 따뜻한 통로다. 표현주의는 향후 미술치료(art therapy)를 비롯한 예술심리치료분야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음이 힘들 때, 표현주의 미술이 주는 감정의 쉼표와 미술치료를 통해 마음의 쓰레기통을 탈탈 비워 오늘의 소중한 감정들을 맞이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겠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