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701.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등 )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당시 율법 학자들 가운데 보기 드문 존재입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입니다.
우선 그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주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이 교사들이기에 늘 주님을 트집 잡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의 저도 훈장 기질이 있어서
늘 남을 가르치려 들었고 지적질하기 바빴으며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 누구를 진심으로 스승 삼은 적도 없고 삼으려고 들지도 않았었지요.
어쨌거나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주님을 스승 삼으려고 든 것만으로도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는 말도 훌륭함을 보여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합니다.
의미를 굳이 가르자면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스승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며,
그래서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요한 가르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스승에게 거는 것이며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에 늘 자기를 위치시키는 법이지요.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보이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렇다. 나를 따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각오하여라.’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 입회하려는 성소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며
상당수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습니다.
수도자의 경우 수도원은 천사들만 살 것 같은 환상이 있고,
연인들의 경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달콤한 꿈만 있지,
같이 살아야 할 고달픈 삶은 생각지 못하고 기대 심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이건 연인이건 풋사랑일 때는 이런 기대 심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성소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수도원에 들어오고 누가 시집 장가가겠습니까?
지금 많은 젊은이가 수도원도 들어오지 않고 시집 장가가지도 않는 것이
이런 풋사랑의 낭만이 없고 현실의 어려움을 너무 크게 보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 지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고,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수난의 사랑(Passio)으로 사랑이 성장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길임을 묵상하며 감히 따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아버지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유명 축구선수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에 등록시켰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볼을 차는데, 자기 아이는 구석에 쭈그려서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된장찌개도 처음 먹으면 맛이 없잖아. 그런데 자꾸 먹으니까 맛있어지지? 축구도 그래. 자꾸 하다 보면 좋아져.”
이 말에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약 먹으면 쓰지? 그런데 계속 먹으면 달아? 나에게는 축구가 그래.”
그날로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축구는 쓴 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있는 반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각자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몫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남들처럼 살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즐거운 된장찌개 대신 쓴 약을 힘들어도 선택합니다. 즐겁지 않은 노력만을 기울이면서 말이지요.
고 이어령 선생님께서 생전에 강의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났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예요. 360명이 한 방향으로 경주하면 1등부터 360등까지 있겠지만, 내가 뛰고 싶은 방향으로 각자가 뛰면 360명이 다 1등이 될 수 있어요. 베스트 원이 될 생각을 말고, 온리 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세요.”
하나밖에 없는 ‘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이유는 자기의 삶을 살라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명성 높은 율법 학자를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제자로 사는 것이 그 시대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당신께서 머무시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어떤 이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시지요. 즉, 세상의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길을 살라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만이 인생에서 유의미하다(재키 로빈슨).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네 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8,18).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이 가지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곳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따라라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와 편안함을 포기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라라”는 부름은 지체 없이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 없고,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가정의 여러 문제, 자녀의 결혼, 출산, 재물이나 교육 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의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 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채워주십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것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참 스승은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말씀하신다. ”자로(子路)가 여쭈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쭈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 ”(논어).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만나려고 휴스턴에 다녀왔습니다. 댈러스에서 왕복 10시간 걸립니다. 지난번 꾸르실료 교육 때에 휴스턴 봉사자들이 댈러스로 올라왔고, 꾸르실료 교육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저도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오고 가는 길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던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도 너 닮은 자식 한번 낳아서 키워 보아라.” 직접 내려가서 봉사자들을 만나니 모두 좋아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 절대 쉽지만은 않습니다. 발품도 팔아야 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장거리 운전에 허리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보람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 있는 일은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 있는 일은 하느님께 축복받습니다.
매일 아침 산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는 길에 저를 보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근길에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고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신독(愼獨)은 대학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자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가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면 선을 행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악을 행한다면 이는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시편 139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를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공기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몰라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24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7월의 첫날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따르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무엇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도제교육’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학교 교육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학교와 같은 모습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교육제도가 바로 ‘도제교육’입니다.
‘도제교육’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일정 기간의 모든 시간을 함께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걷고 듣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잠자는 모습까지 배웁니다. 스승의 숨결까지 닮으려 합니다. 이런 교육의 모습은 스승의 전체가 제자의 생활 전체가 됩니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지식만을 전하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도제교육은 지식이 아닌 스승의 모든 것을 전하는 교육이었습니다. 물론 도제교육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많은 제자를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모든 제자와 함께 지내기 위해 스스로 모든 곳에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지식을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든 것을 체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숨결과 그분의 고통과 그분의 기쁨 등의 모든 것을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모습 안에 주님을 담아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머리로서뿐만 아니라 마음 가득히 주님을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사랑은 ⭘⭘가 더 어렵다.
가까워지면 무례하게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해졌다 싶으면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떠한 동의도 없이 말입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그 관계 맺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시작하는 것보다 유지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우리 사랑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더 조심해야 하고 더 배려해야 합니다. 더 많이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포기한다면 시작된 그 사랑은 금방 깨지거나 식어 버릴 것입니다.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종의 자세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삶은 늘 끝이자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함이 영성생활의 요체입니다. 7월 달력을 펼치는 순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가 떠올랐고 나눕니다. 7월이 되면 늘 떠오르는, 모두가 애송하는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흡사 오매불망 스승을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만일 애국시인 이육사(1904-1944)가 주님을 만났더라도 훌륭한 제자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육사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옥사한 분입니다. 의열단에 소속된 시인은 갖가지 사건으로 대구와 북경의 감옥에서 무려 17회나 징역을 살았고 마침내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육사의 시로서는 드물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초인’은,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모습을 달리해 있고, 백마를 타고 오는 대신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많은 이들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7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시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신선한 감동을 주는 맑고 깨끗한,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님은 7월 첫날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우리를 죄와 내외적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찾아 오시고,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청포도의 시인처럼 주님을 환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추종의 자세를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직의 엄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눈부신 치유이적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하면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스타였을 것이며 제자가 되려는 열망도 지녔을 법 합니다. 아마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한 율법학자가 주님을 찾아 제자가 될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율법학자의 감상이나 허영을, 환상을 일거에 거둬 버리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정신과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는지 묻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모두를 버린 하느님의 제자였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라나섰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독자인 우리에게 주님을 추종하는 자세의 엄중함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려면 세상 재물 욕심에 초연해야 하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고난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 어른이 단단한 까닭은 겪어온 무수한 고난을 주름에 갈무리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의 길은 꽃길이 아닌 산전수전, 무수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정화되어가는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자승자강(自勝者强),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는 이런 사람이겠습니다. 이어 주님의 제자들중 하나의 청원과 주님의 답변도 우리에게는 깊은 묵상감입니다. 역시 제자직의 엄중함을 환기시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제자직에 관한, 이해하기 힘든 참 난해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앞서 말씀이 소유와의 단절을 말한다면 이 말씀은 세인들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인정이 많으면 도가 성글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학자들은 주님의 말씀임에 동의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는 충격요법의 과장법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엄중한 의무도 참된 제자직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에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후에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예전 법정 스님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불자 수도승으로서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참석 못했던 풋열심의 젊은 시절의 행태에 대한 반성입니다. 까짓 수도생활이 뭐라고 사랑했던 할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편협했던 생각을 크게 뉘우치는 스님의 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에 온힘을 다했던 분으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해이해진 자세에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참 훌륭한 제자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철저하기로도 예수님과 막상막하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던 백성이 주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도 사랑과 정의를 유린한 행태들에 열화와 같은 분노와 더불어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그 누구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기보다는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오늘날도 주변 곳곳에서 무지하고 무절제한 사람들이 자초한 심판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중산층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경고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초발심의 열정과 순수로 주님을 찾고 따르는 제자로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 아멘.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그곳에 이를 때까지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비록 그 길의 끝 모르지만
지금여기 그 끝이 아니니
잠시 머물던 자리 훌훌 털어내고
힘차게 또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지금 함께 하는 벗들의 환호와
지금 누리는 모든 기쁨을
먼 길 쉼 없이 내딛어야 할
힘겨운 발걸음에 밑거름 삼아
모든 것 미련 없이 내려놓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또 한 걸음
끝 모를 그 곳에 이를 때까지
그래 쉼 없이 걷는 거야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마태 8,18)
자제심을 키워 주시다
예수님께서 겉치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참조: 마르 1.34; 루카 4,41). 군중에게는 물러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하심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자제심을 길러 주시며 뽐내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시샘을 잠재우십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육신만 아니라 영을 치유하는 분이시며 인내를 가르치는 교사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의 병을 치유하심으로써, 그 다음에는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동안 군중은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 감탄하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을 누가 떠나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분의 얼굴과 그런 말씀을 하시는 입을 언뜻밖에 볼 수 없다 해도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영혼 안에는 만물을 똑같이 기쁘게 마주하는 능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가장 하찮은 것과 가장 소중한 것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대합니다. 이 능력은 “지금” “여기”를 넘어서서 만물을 이해합니다. “지금”은 시간을 뜻하고, “여기”는 장소, 곧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뜻합니다.
만일 내가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자아를 온전히 비웠더라면, 아버지께서 나의 영 안에서 외아들을 낳으셨을 것이고, 나의 영도 그 외아들을 다시 낳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영혼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만큼이나 잘 준비되어 있다면, 아버지께서는 외아들 안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내 안에서도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194)
----------------------------------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빙엔의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는 녹색의 개념을 의학으로 발전시켰다.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녹색의 힘은 신의 창조력과 성령의 회복력에 의해 만들어져 치유와 구원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녀는 여기에서 모든 활동적 녹
색이 생겨나게 되는 잠재적 녹색 힘에 대해서 언급한다. 녹색 힘은 빛에 자극을 받지만 마지막으로는 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 신의 손짓인 녹색이여, 당신의 손에 녹색 식물을 심어 놓으셨으니’ .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태초에 녹색 힘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인간이 땅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어떤 농사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외면하여 ‘타락’ 했기 때문에 녹색 힘이 아주 약화되어 모든 녹색은 시들 위협을 받아 계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녹색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영원성의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힐데가르트는 믿었다. 그녀는 녹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떠한 생명도 죽어야 할 운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바로 생명 안에 었다. 어떤 나무로 녹색의 힘없이는 녹색으로 될 수 없고, 어떤 돌도 녹색 습기를 지니지 않는 것이 없고, 어떤 피조물도 녹색 없이는 특별한 자연력이 없으며 살아 있는 영원성 자체는 녹색에의 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힐데가르트에게 녹색 힘은 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피와 살에도 작용한다. ‘영혼은 육체의 녹색 힘이다; 영혼은 육체에 의하여, 육체는 영혼에 의하여 작용한다.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 에너지에 녹색이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여성의 전성기 그 자체이다. ‘녹색 힘은 여성과 남성을 결합시킨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영적 글에서 가장 내적인 마음의 녹색 푸름을 자주 맹세했다.
‘하느님을 사랑으로 에워씨는 모든 녹색이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너의 신전을 신중하게 정돈하여라.’
힐데가르트는 녹색 힘에 대한 특별한 관계는 바로 인내심이라고 여겼다.
‘나는 모든 녹색의 부드러운 입김이다 ... ’
넓은 도량과 침착함과 사랑은 녹색 푸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을 나타낸다. 힐데가르트의 자연치료 전체는 바로 녹색 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다.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산 자가 가야 할 그 길만 보면서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5&id=2098681&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30 ㅣNo.173808
주님 안에서 허락된 자유인은 세속적, 물질적인 온갖 것에 결코 매이지 않고 썩어갈 것들에 목숨 걸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기적 생각으로 자신마저 질식하는 이는 참된 자유인이 아닐 게다. 신앙인은 질식할지라도 그분이 첫째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너는 그냥 버려두어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자발적인 결단을 요구하신다.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면, 제대로 밭을 갈지도 못하고 엉뚱한 길로만 빠진다나. 사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한 체 세속에만 빠져, 가끔은 무분별하게 거기에만 안주하려든다. 따지고 보자면 그런 것들은 결국 사라질 물거품들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 그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말아야 할 게다. 서슴없이 몸 바쳐, 오직 한 길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차피 장사를 지내야 하는 죽은 이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올바르게 찾지 못한 이들일 게다. 믿는 이들은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의 것이라고 치부한다. 우리 생각으로는 너무 모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를 수 있으랴. 그것은 따를 수 없는 것이리라.
자연에 생기 넘치는 계절이지만 낮 시간을 정신없이 지내면서 위안을 찾는 밤이 돌아오면, ‘산다는 것이 무겁고 허전한 마음을 끌고 가는 것이구나!’ 라는 씁쓸함이 가끔은 뇌리를 스친다. 정성을 기울였던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의지할 만한 이들과의 관계가 어느새 짐이 되고 진부해지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서서히 지쳐진다. 아무리 그분만을 바라보는 이라도, 차라리 세상사 다 잊고서, 정녕 자유로우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가끔은 든다.
이처럼 비록 신앙인의 삶일지라도 때로는 허무하고 쓸쓸할 때는, 누군가가 인생이 우주의 위대함과 자연의 순리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고전 몇 줄이라도 읽으란다. 그러나 본디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지내기 쉬울 것 같기도 하단다. 아닌 게 아니라 버림은 부산하게 닥칠 일, 바쁜 마음에서 지친 마음을 쉬는 위로가 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나마 ‘세상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심장이 뛰듯 들린다.
예수님께서는 대충 쉽게 가르치심으로써, 되도록 많은 이들을 제자로 만들려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들만 참 제자로 받아들이신다. 사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분을 따르려 덤벼든다. 부모님의 장사도 자식에게는 어쩌면 아주 중요하지만, 그나마 예수님 따르는 건 죽기 살기의 결단이 요구된다. 장애가 되는 건, 과감히 물리쳐야 하리라.
좌우간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자유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끌어 갈 바른 기준을 스스로 가진다. 그런 신념이 없으면 늘 핑계나 구실로 자신 합리화에만 급급할 테니까. 그러니 믿음의 삶을 살려면 자신만의 마음을 정말 독하게 가져야한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저 세상 길도 물론 공짜는 없다.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따라 그분만을 보면서, ‘산 자가 가야 할 그 길’만을 보면서 가야 하리라.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8,19)
세례성사를 받고 6개월쯤 되던 때, 저에게 교리를 가르친 포항 예수성심회 프랑소와 수녀님께서 저에게 “아오스딩 로만칼라 차면 참 멋있겠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축성식(1969. 4월)에 참석하고 다녀오신 ‘광주 화정동’ 소재의 예수고난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수도자가 어떤 존재이며 수도 생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습니다. 단지 로만칼라를 차면 멋있겠다는 수녀님의 권고와 추천의 소리를 듣고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네, 수녀님 할 수 있다면 로만칼라를 차지요’라고 서슴없이 응답하였습니다. 다음 달 5월, 제 동기들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떠났지만, 저는 광주 화정동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이 첫 방문에서 박도세 신부님과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금껏 이 수도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8,19)라는 고백은 어쩜 이미 제가 제 누이의 무덤가에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누이에게 위안이 될까?’라고 생각하던 때부터 성소의 씨앗은 이미 제 영혼 속에 뿌려졌다고 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따르다. 곧 추종’에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들이며 그 본보기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수도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머물면서 직접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면서 자신을 버리고 과거의 시간과 장소로부터 떠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건너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그 따름의 길은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이며, 곧 생애를 통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아주 멀고 먼 영적 순례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금도 줄곧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초기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일어나는 어려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없이 무작정 좋아서 따랐다고 봅니다. 사랑의 눈멂처럼 아무 어려움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 여정의 거리와 시간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더군요.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따름의 속도도 느려지고 그에 따라 마음의 갈등도 일어났으며 내적 고통과 힘듦이 살며시 제 따름의 삶에 밀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식하지만 용감하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따르다가 차츰 저 자신을 알아가면서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더디어지기도 하면서 점차 추종의 동기도 정화되고 세련되면서, 지금껏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의향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단지 그 율법 학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인간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는 아마도 그 사람의 추종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추종의 동기는 물론 그 동기를 지속할 수 있는 성숙함과 굳건함이 있어야 따름에 수반되는 내-외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되돌아보면 따름은 단지 열정만으로 부족하고 내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도 좋지만, 굳은 의지가 수반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열정은 식기 마련입니다. 추종의 길은 결코 낭만적인 측면만이 있는 게 아니라 추종에 요구되는 내적 자신과의 싸움, 비우고 버리고 낮아지고 죽어야 하는 처절한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성소 식별에 있어서 차이점은 영어권의 형제들은 일단 성소자들의 영어 이해와 구사 능력여부에 기준점을 두었지만, 저는 그들의 내적 성소 동기에 강조점을 두었기에 참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8,20)하고 대답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2고린 8,9) 그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어쩜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지 않을까 싶네요.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삶도 마찬가지로 여우의 굴이나 새의 보금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추종의 여정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그 안에 삶의 행복이 있다고 믿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지금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이 살고 있지 않음을 여러분 알고 계시죠. 때론 부끄러울 때가 있을 만큼 크고 넓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처럼 단지 외적 크기만을 보시지 말고 추종에 따른 내적 싸움이 더 어렵고 힘든 여정임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미 추종을 시작한 이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의 추종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시50,22)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
240701.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다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인데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4&id=2098684&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30 ㅣNo.173809
이 글이 이곳에 적합한 글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글이니까 내가 책임지고 게시하니, 좋든 나쁘든 내 소관이니 그대로 둘 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글 쓰신 분들의 글이 좀 거칠어졌다.
글 제목에다가 남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러댄다.
꼭 좋은 뜻이야 그래도 이해가 된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막 써댄다.
상대방 배려차원서 본다면 좀 지나치다.
그리고 자기 귀한 글을 썼다가는 돌아서서는 지워버린다.
그 글에 나름 정리한 후, 다시 그 글 찾다보면 없어지는 게 있다.
자기 글 자기가 지우는 데 무슨 대수냐 하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지울 글이면 아예 게시를 말아야지.
그리고 어쩌다 지울 수밖에 없다면, 게시 전 보고 또 보고 해서 게시하면 어떨까?
그러면 지울 경우의 수가 차츰 엄청 줄어들 수도.
이곳에 게시되는 글은 많을 경우 통상 100여명이 읽는다.
이 인원끼리 뭐가 그리 중요한지, 따지는 이가 가끔 있다.
그리고 글이 좋니 나쁘니 하면서 가타부타 칭얼거린다.
이곳에 좋고 나쁜 게 그리 있을까, 대부분은 정말 따질 성질이 아닐 것 같다.
나와 다른 글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 남의 생각과 글에 비아냥거리지 말자.
이곳에 이곳 나름의 참 멋진 운영원칙이란 게 있다.
같은 글 3개소 게시는 금한다.
5인의 신고로 게시 글이 삭제될 수도 있다 등이다.
운영원칙에 따르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신고하면 된다.
굳이 댓글이나, 답 글로 이름까지 들먹이면서까지 상대를 비난하지 말자.
정 필요하면 쪽지 등으로 본인에게 의견을 주던지,
아니면 메일로 이곳 운영자님께 건의하면 될 것 아닌가?
이곳 이용자는 대부분 한 형제자매다.
최대한 배려와 겸손으로 이곳 공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만나자.
인터넷 공간은 보이지 않는 이를 보려고 불려온 우리이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공간에서 실제로 만날 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이 글도 여기 게시에는 참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 버젓이 게시하는 것은 요즈음 이곳에 전운이 감도는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제 글이라지만, 조목조목 따져보니 좀 지나칠 수 있을 것 같기에,
차제에 오해 없이 이해를 꼭 구하고자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