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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지도자 그달리야
왕하 25:22-30
22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 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5:22-30 / [그달리야 총독] 느부갓네살은 유다 땅에 남겨 놓은 사람들을 위하여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웠다. 그는 유능한 유다인을 총독으로 세움으로써 순조로운 지배를 기대한 것이다. 23) 그러나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히지 않은 유다의 군지휘관들이 그 소식을 듣고 그달리야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총독부가 있는 예루살렘과 벧엘 사이에 있는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를 만났다. 그들은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 야아사니야였다. 24) 그런데 그달리야가 이들과 그들의 부하들에게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조용히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 왕에게 굴복하기만 하면 여러분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나 그해 7월에 엘리사마의 손자이며 느다니야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부하 10명을 거느리고 미스바로 와서 그달리야를 죽이고 총독부에 있는 유다인과 바벨론 사람들도 함께 죽였다. 이스마엘은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 그달리야를 왕위 찬탈자로 생각하고 죽였던 것이다. 26) 그러자 군지휘관들은 물론 모든 고위층에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였다. 27) [새 희망의 터전]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왕이 되면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다. 이는 여호야긴이 옥중에 갇힌 지 37년째 되는 해 12월 27일의 일이였다. 28) 그리고 새 왕은 여호야긴에게 후한 대접을 하여 그와 함께 잡혀 온 다른 왕들보다도 더 우대해 주었다. 29) 그는 이제 죄수복을 벗게 되었고 평생토록 왕의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었다. 30)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왕명으로 지급받을 수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왕을 비롯하여 많은 유다인들을 바벨론으로 데려가고 비천한 자만 남겨두고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임명하여 잔류한 자들을 관할하게 했습니다.
그달리야가 유다 지도자가 되다(22-24) 느부갓네살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그달리야는 아히감의 아들이며, 사반의 손자로서 예레미야의 친구였습니다(렘 39:14). 유다의 멸망으로 흩어져 있던 모든 군대의 지휘관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달리야가 지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스바에 있는 그달리야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달리야는 그들을 향하여 유다의 살 길은 예레미야의 충고를 좇아 바벨론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섬기면 평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무모하게 바벨론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를 막아보려는 그달리야의 충심에서 비롯된 충고였습니다.
그달리야가 피살되다(25-26) 예루살렘 함락 직후인 오월이었습니다(8, 22). 왕족이었던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살해하고 그와 함께 있었던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이때 요하난과 다른 지휘관들이 이미 그달리야에게 경고했습니다(렘 40:13-15). 그러나 그달리야는 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과 식사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렘 41:1-7). 그달리야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을 죽인 자들은 애굽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임명한 그달리야를 죽이고, 갈대아인들까지 죽였으므로 그에 대해 추궁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이 석방되다(27-30) 유다 19대 왕이었던 여호야긴(여고냐)은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37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은 석방되어 바벨론에 잡혀온 다른 왕들보다 더 친절한 대우를 받았고, 왕의 앞에서 식사를 하였으며,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습니다. 여호야긴의 석방은 ‘다윗의 후손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다’(삼하 7:14-15)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회개하면 자유를 얻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신 30:1-10)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합 3:2).
적용: 여호야긴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와 구속을 당했으나 에윌므로막의 은혜로 석방되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까?
옛날 어느 마을 서당에 글공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청년이 공부하기를 청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배움의 속도가 너무 느렸고 심지어 집안일과 농사일 때문인지 서당을 자주 빠지고 안 나오는 일도 매우 잦았기에 보다 못한 훈장이 청년을 쫒아 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서 물지게를 지고 노인들이 사는 집마다 물을 퍼 날라주는 제자였던 청년을 보았습니다. 청년은 자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일들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서당에 자주 나오지 못하고 배움 또한 늦었던 것이었습니다. 훈장은 청년의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군자의 뜻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자네는 벌써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었네. 자네가 나의 스승일세.”
< 설 교 >
유다 왕 여호야긴이 석방되다
손재호 목사
우리는 열왕기하 24장과 25장 말씀을 통해서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왜 멸망하였습니까? 율법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피 뿌림으로 세운 언약이기에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미 시내산 앞에서도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이들은 광야 40년 동안에도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사사시대를 지나고 왕들의 시대에도 계속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음으로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멸망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곧 땅이 토하여 내어버림은 안식년을 지킨 것처럼 약속의 땅이 안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24장에서 부터 계속되는 유다의 멸망에 관한 말씀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관할할 자로 세운 그달리야를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쳐 죽이고 많은 백성과 군대장관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과 유다 왕 여호야긴이 석방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24절을 보면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로 관할하게 하였더라. 모든 군대장관과 그 좇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로 방백을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 좇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그달리야가 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신복을 인하여 두려워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멸망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을 다스릴 자로 그달리야를 세웁니다. 그달리야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반은 서기관이었습니다(참조. 왕하 22:3, 8, 9, 10). 열왕기하 22:8절에 보면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였고 그 율법 책을 왕 앞에서 읽은 사람이 바로 사반입니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보호합니다. 여호야김 왕이 선지자 우리야를 예레미야와 같은 말을 했다고 죽이려고 하자 애굽으로 피난 갑니다. 결국 피난 간 우리야를 잡아와서 죽입니다. 이럴 때에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6:24절을 보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아히감의 아들이 그달리야입니다. 이들은 선지자 편에 서서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39:11-14절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중에 거하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예레미야가 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느부사라단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취하여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어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처럼 예레미야 선지자가 풀려나는 일에 그다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다랴가 바로 그달리야입니다. 예레미야 40:7-9절에 보면 바벨론 왕이 이런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우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그다랴는 자신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바벨론 왕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평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40:9절을 보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친 애굽 성향을 가진 왕족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26절을 보면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십인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저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대소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왕족인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끌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 죽입니다.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도 죽입니다. 이에 이스마엘은 바벨론 군대가 무서워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예레미야 41:10-18절을 보면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 하여 떠나니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대장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의 행한 모든 악을 듣고 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나매.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한 모든 군대장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에게 포로되었던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하는 모든 군대장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인과 유아와 환관을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애굽으로 가려 하여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무렀으니 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인을 두려워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니 온통 혼란만 가중됩니다. 이스마엘이 그댜랴를 죽이고 사람들을 끌고 암몬으로 가는 중에 그다랴에게로 모이는 자들을 또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암몬으로 가는 중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한 군 지휘관들이 이스마엘을 잡기 위하여 추격합니다. 이스마엘을 따라가던 자들이 요하난을 보고 백성들이 요하난에게로 돌이키니 이스마엘과 그를 따르는 여덟 명이 암몬자손에게로 피하여 갔습니다. 요하난이 이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려고 게롯김함에 머뭅니다. 요하난이 애굽으로 가려한 이유는 바벨론 왕이 세운 그다랴를 이스마엘이 죽였기 때문에 갈대아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예레미야 42:1-6절을 보면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고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기에 모든 지휘관들과 모든 낮고 높은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렇게 배척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 성취가 되었으니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여호와의 뜻이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증인으로 부르기조차 합니다. 십일 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도하여 응답을 알려줍니다. 애굽으로 가지 말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참조. 렘42:7-22).
예레미야 43:1-2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이며, 오늘날 우리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도 자기에게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합니다. 유다가 왜 멸망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명백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 전혀 여호와의 말씀을 안 듣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이제 여호와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여호와의 뜻을 구하였지만 정작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레미야와 바룩과 모든 백성들을 사로잡아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그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굽이 결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하다고 하면서 바벨론 왕이 애굽까지 쳐 들어와서 멸할 것이라고 하여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유다 멸망의 이유는 명백하여 졌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망하여도 고쳐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이루십니까? 예레미야 1:1-10절을 보면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의 소명장면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은 아이며 말할 줄을 알지 못하고 두렵다고 합니다. 모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세워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친히 이루십니다.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의 내용이 10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1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개인에게 적용해도 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나는 나의 존재 자체가 피조물이며 죄인이기에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인식하십니까? 아니면 나의 존재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하십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존재자체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우리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관은 나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나의 존재를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진리관은 없습니다. 이런 개인의 진리관이 확대되는 것이 가정이며, 회사이며, 국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런 가치관을 전복시키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 27-30절을 다시 보면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 이월 이십 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지 37년입니다.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갈 때에는 유다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긴 다음에 시드기야가 약 11년을 왕으로 있었기에 유다의 멸망으로 보면 26년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26년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왕도 바뀌었습니다.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자 그 머리를 들게 합니다. 에윌므로닥이 왕이 된 첫해에 이 일을 한 것은 이 왕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그렇게 이끄신 것입니다. 유다 왕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였다고 합니다. 죄수에서 왕의 지위 그것도 다른 나라의 왕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리고 일평생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고 그가 쓸 것을 왕에게서 종신토록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유다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하에서 나라가 망한 후 26년에 사로잡혀간 유다의 왕이 머리를 들게 된 것은 예레미야 1:10절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0절을 다시 보면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무너뜨린 후에 세우며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왕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왕의 신분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옥에 갇혔습니다. 언제든지 바벨론 왕이 죽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처럼 두 아들을 그 앞에서 죽이고 그의 눈을 뽑아버리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왕이 자신을 높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알고 그 약속 하나 하나를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야곱의 개인의 생애로 보아도 됩니다. 그의 야망과 꿈들을 무너뜨리고 무너뜨리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들고 죽게 된 야곱입니다. 이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 뼈가 위골되면서부터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때부터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침을 당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야 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생애와 유다의 멸망과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도 덮쳐져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된 기간인 70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여호야긴이 머리를 들게 됨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십니다.
에스겔 36장은 새 영을 부어주신다는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은 마른 뼈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으로 큰 군대로 살아나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계시입니다. 죄를 범하여 나라가 망하고 완전히 마른 뼈다귀 같은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새롭게 살려내시는 것이 70년 포로생활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실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4:17절을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자를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살았다고 하면 죽이실 것이며, 있다고 하면 없는 존재로 만드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믿게 되는 과정은 자신이 죽게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출처] 왕하25장 22-30 유다 왕 여호야긴이 석방되다-손재호 |작성자 상생
절망 뒤에 다시 소망을
열왕기하 25 27-30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3차 침공에 의해 남 유다는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란 약속을 주셨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사무엘하 7장 16절)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던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도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더 이상 지도 그 어디에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없었고, 이스라엘을 이끌어 줄 다윗의 왕조가 끊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과 발이 꽁꽁 묶힌 채로 저 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던 남 유다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갔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던 날들이 꿈만 같았고, 다윗과 골리앗, 하늘에서 불을 내린 엘리야 선지자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모두 지난 날 조상들이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릴 정도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 유다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암울한 그 역사 속에서도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다윗의 자손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다윗 왕가가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저 바벨론 땅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다윗의 자손이자 남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27절 입니다. (왕하 25:27)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지난 세월 무려 37년 동안 지하감옥 갇혀 살아가던 여호야긴이 드디어 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호야긴은 남 유다에서 왕으로 나라를 다스린지 3개월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비운의 왕입니다. 그의 이름은 점차 잊혀졌고, 사람들은 그의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18살에 바벨론에 끌려가 감옥에 갇혔고, 37년 뒤에 쉰 다섯 살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면 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사건도 아닌 여호야긴이 옥에서 나온 사건을 열왕기하 마지막에 기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다윗 왕조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은 다윗의 왕가가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더욱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난 37년간 감옥에서 살던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꺼내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여호야긴’이란 이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그렇게 비중이 큰 인물도 아닙니다. 이 여호야긴의 다른 이름이 여고냐 입니다. 이 사람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여고냐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 살아갔지만 하나님은 여호야긴을 남겨두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고냐를 통해 계속해서 이어진 다윗의 왕가는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져 오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사무엘하 7장 16절)가 문자 그대로 성취 됩니다. 우리는 당장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의 약속이 깨진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다 끝났나 보다’ 우리들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망에 빠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해도, 듣지 못해도, 느끼지 못해도 여젼히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한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남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 인생에도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다가온 절망 뒤에 또 다시 소망을 주십니다. 오뚜기는 아무리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직금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응답해 가고 계십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절망 뒤에 다시 나타날 저 찬란한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역시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윤창용 목사 / 열왕기하 25:27-30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감독이자 남자 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라는 분이 만들고 출연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무솔리니라는 독재자가 파시즘과 극우적 민족주의로 나라를 다스리던 1938년 이탈리아입니다. 조그만 도시에 약간 덜떨어진 인생을 살던 귀도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초등학교 여교사인 도라를 만나고, 약혼자가 있는 도라와 함께 마을을 도망해 결혼을 해서 아들 죠수아를 얻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이 시작되면서 귀도의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유태인인 귀도와 아들 조슈아가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이죠. 남편을 따라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포로 수용소로 가기를 자청하는 도라, 또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자기 아들 조슈아에게 모든 상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게임이라고 속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들이 포로 수용소 생활을 게임처럼 지내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은 주인공 귀도가 독일군에 총에 맞아 죽게 되는 비극적인 영화이지만 비영어권에서 최초로 아카데미 남자 배우 주연상을 받은 아주 감명 깊은 영화입니다. 꼭 한 번씩 보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인생이란 참으로 수많은 얼굴을 가진 존재입니다. 고통스러운 얼굴, 찡그리는 얼굴, 분노하는 얼굴, 펑펑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 아름다운 얼굴, 신비스런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마음 자세입니다. 고통스런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볼 수 있는가? 대답은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분들이 대체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현실의 씨앗이 됩니다. 곧 인생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이면 아름다운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부정적이면 고통스런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보통 우리 자신에 대해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의외로 자신에게조차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선 먼저 남을 긍정적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이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이 직장상사일 수도 있고, 그밖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단계로 그 사람의 상황이나 말, 행동, 이런 것들을 내 온 마음으로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데에는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너무 깊어서" "혹은 성장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으려는 것" 등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해들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점들을 노트에 적어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선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작업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내게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은, 나의 마음 공부의 좋은 도구가 됩니다.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되면 내 자신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로 남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내 인생도 아름다운 일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야 인생 속에 희망도 생기게 됩니다.
얼마 전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소개해 드린 책이 하나 있습니다. '빛, 색깔, 공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똑같이 목사이며 신학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목사와 신학자인 두 사람이 고통을 맛보며 진솔하게 그려낸 글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고 김치영 목사님은 간암 선고를 받고 약 4개월 투병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김 목사님은 투병을 하면서 고통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아들에게 고통을 설명합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고통을 겪는 것은 다 똑같다.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될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 신음할 수 있다. 고통을 호소할 수도 있고,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감으로 연결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다."
우리는 늘 똑같은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육체의 한계를 지니며 삽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항상 복을 받고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통을 희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꿀 수 있는 사람, 우리는 바꾸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죽음조차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 전서 15장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이어서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두 곳을 보았습니다. 먼저 열왕기하 25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는데 아벨 마르둑이란 바벨론 왕으로부터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열왕기하 25장 오늘 본문 말씀을 아주 중요한 구절로 봅니다. 구약학자들은 대개가 신명기에서부터 열왕기상 하를 예레미야가 포로기 후반에 썼다고 보는 경향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는 요시아 왕때 전반부를, 그리고 예레미야가 후반부를 썼다고 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열왕기하를 썼다고 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즉 이 구절들은 원래 없었던 구절인데 예레미야가 의도적으로 편집과정에서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지위가 회복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왕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지위를 되찾았다, 그러니 곧 우리들 이스라엘도 우리의 약속된 지위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야긴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 왕가가 다시 왕의 지위를 찾았다는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주권회복과 가나안으로 돌아갈 희망을 보여주는 구절인데 이 희망이 필요했던 시대가 바벨론 포로시대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시절 예언자였던 예레미야가 썼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누가 썼느냐 보다 이 말씀은 열왕기하 말씀을 희망으로 끝내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찢기고 넘어져도 다시 회복시켜 줄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희망,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입니다. 우리 인생이 왜 아름답습니까?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대한 희망, 이 희망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그 날 그 날을 그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 날을 넘어서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분의 약속을 따라서 앞으로 올 것의 기대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다음으로 우리가 살핀 말씀은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37절 말씀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시고 38절에서 이것이 제일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39절에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두 번째 중요한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크고 두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39절 말씀 시작이 "그와 같으니"라는 말은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second is like it" 즉 두 번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처럼 크고 중요한 계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모두가 다 으뜸가는 계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마음과 목숨, 그리고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분에게도 늘 호감을 가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도대체 왜 희망이라는 주제와 연결이 됩니까?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문에 이런 말이 걸려 있답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이 바로 마태복음 22장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해야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희망은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희망을 갖는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희망을 갖는다? 바늘을 귀에 묶어서 옷을 꿰매겠다는 발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희망은 없습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그 희망이 어떤 상황도 바꿀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가정형편, 믿지 않는 식구들로 인해 당하는 핍박,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당하는 불이익, 얼마든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절망적으로 만들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신앙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 절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극복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가정에 시집을 와서, 혼자만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시댁식구들은 하나같이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아가야, 이 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바쁜 일이 있다. 고추밭에 가서 고추대를 다 뽑아야 한다.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니까, 이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며느리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며느리는 토요일 밤에 가족들은 다 잠을 자는데, 혼자 조용히 일어나서 고추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넓은 고추밭의 고추를 밤새도록 다 뽑아서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일이 되어, "아버님, 저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시아버지가 조금 역정을 내며 말합니다. "아가야, 오늘 고추밭에 고추대 뽑아야 하니까, 교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님, 고추대 다 뽑아놨습니다. "언제 다 뽑았다는 거냐?" "어제 밤새도록 다 뽑아놓았습니다." 시아버지가 깜짝 놀라 가보니, 고추대가 다 뽑혀 묶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감동을 받은 가족들이, 그 후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댁의 가족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며느리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며느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을까요?
이 며느리는 바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사랑이 있었기에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희망을 저버지리 않았고 사랑의 신앙행동으로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사랑은 희망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해 줍니다. 사랑은 희망이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사랑이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고통스러운 현재도 받아들일 수 있고, 희망이 있어야 절망 가운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고달팠던 일, 슬펐던 일, 힘들었던 일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돌아보며, "지나온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는 고백을 갖고 지난해를 마치셨습니까? 그런 분에겐 이어서 이런 고백도 가능할 것입니다. "앞으로 밟을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닐 것이 없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 이런 믿음으로 올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짜증나는 마음, 미운 마음이 올라오면, 즉시 앞에서 소개해 드린 훈련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겐 언제나 아름다운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시길 바랍니다.
고통스러웠던 일도 모두 하나님이 내 영혼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밟을 발자국마다 은혜 아닐 것이 없다. 라는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새해를 시작하십시오. 역시 희망이 우리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