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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한 학생이 있다.그는 가난하지만 야심이 많으며 풍요로운 삶을 꿈꾼다.어느 날 악마가 찾아온다.그에게 그림자를 팔고 돈을 얻는다.악마는 거울에 비친 학생의 모습을 판화 벗겨내듯이 둘둘 말고는 방을 나간다.이윽고 학생은 소망하던 사교계에 입문한다.그러나 팔아버린 그림자 분신이 학생을 줄곧 뒤쫓는다.학생은 고민을 하다가 분신이 원래 나왔던 거울 앞을 거닐 때 죽이기로 작정한다.자기 분신과 만난다.분신을 향해 총을 쏜다.거울이 산산조각 나고 분신은 이전과 같은 환영이 되어 사라진다.그와 동시에 학생이 쓰러진다.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만 것이다.분신이 살아 움직이는 실재가 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을 대신한 것이다.숨을 거두기 직전 학생은 깨진 거울 조각을 하나 집어 든다.그 거울에는 이전 자신의 모습이 다시 비춰지고 있었다.
1930년대 무성영화 ‘프라하의 학생’의 줄거리다. ‘소비의 사회’ 말미에 나오는 이 영화 이야기를 통해서 보드리야르의 이론적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의 거울에 비친 상은 우리들 삶의 궤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학생의 그림자는 우연히 잃어버린 것이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팔린 것’이다. 이를 극명하게 요약하는 진술이 곧 ‘행복한 때에도, 불행한 때에도 인간이 자신의 상과 마주 대하던 장소였던 거울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쇼윈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쇼윈도 앞의 인간,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구체적 소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보드리야르는 1929년 프랑스의 작은 도시 렝스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들어간 장본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의 가정환경은 불우했던 것 같다. 그의 지적 이력은 사회학에서 출발한다.1968년 그는 낭테르 대학에서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 하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으며 이후 1987년까지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사회학자라는 자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대학 제도에 대한 환멸을 공공연히 드러내곤 했다. 학계 안팎에서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몰아갔다는 말인데, 그가 끝내 종신 교수직을 얻지 못하고 대학을 물러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소비의 사회’(1970)는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책은 ‘사물의 체계’(1968)와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1972)과 함께 ‘소비사회의 기호학’이란 범주로 묶인다.60년대 프랑스의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이 책은 경험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그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쓰레기더미를 파헤친다. 광고, 매스미디어, 에로티시즘, 레저, 가제트(아이디어 상품) 등이 등장하는데, 이 물건들은 모두 풍요와 자유와 행복을 약속한다. 바로 이 약속이 소비사회의 신화라는 것이며, 그 신화 속에서 현대의 삶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며 소외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생산물의 사용가치는 소비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사물의 기능을 기호로 보는 기호학적 사유가 깔려 있는데, 이 관점은 결국 마르크스의 사용가치 개념과 정치경제학 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는 현대의 소비문화를 광고와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는 기호가치의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일반 소비자가 구매하는 것은 더 이상 물건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기능하는 사회적 이미지, 즉 기호를 소비한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한편 그는 1981년 ‘시뮬라시옹’에서 현시대를 ‘시뮬레이션(모사)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기존의 산업사회에서는 생산이 핵심적인 요소였지만, 오늘날에는 시뮬레이션의 과정이 사회지배적으로 된다고 보았다. 시뮬레이션이란 대상물이나 사건들의 재현 혹은 복사를 가리키는데, 이 개념은 근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널리 주목된 바 있다.오늘의 모든 삶은 정밀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분해되는 동시에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사물은 비현실의 모습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만들어진 대상물과 경험, 즉 ‘하이퍼리얼리티’의 외양을 띤다.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오리지날이라는 것은 없고 어느 의미에서는 오리지널과 모사물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론은 오늘의 우리와는 한 세대의 격차가 있지만 놀랍게도 지금의 우리 삶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곳곳에 들어 있다. 그의 논의가 우리에게 뒤늦게 소개된 이유는 90년대 이후 압구정동 문화 같은 소비사회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소비의 사회’ 영어판 서문에는 이 책이 에밀 뒤르켐의 ‘노동분업론’,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 톨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과 같은 계보에 속한다고 적혀 있지만,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로는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나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보드리야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서구 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승’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데, 특히 1980년대 이후 지적 허무주의에 빠졌으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에 기울었다고 한다. 또 1991년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식의 언뜻 보면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듯이 기껏해야 지식인 엔터테이너로서의 지위를 가질 따름이라는 혹평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달리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는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변동의 안팎에 대해 독창적인 인식을 보여주며, 또 그러한 인식은 변동이 가속화됨에 따라 역으로 무뎌지는 우리 시대의 삶에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최초의 저술 ‘사물의 체계’에서 근래의 ‘이타성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그는 30여 년에 걸쳐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의 이론적 작업을 줄곧 꿰고 있는 것은 초기의 문제의식이다. 그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되풀이되는 주제는 이미지의 망령인 것이다.
그 역시 이미지의 망령에 시달리며 그 망령을 깨뜨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 한다는 뜻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자기를 찾는 사상가’라고 재평가될 수 있으리라.그런 각도에서 그의 이론적 작업 내용을 조망해야 할 것이다.
/김성기(계간 ‘현대사상’ 주간)
◆보드리야르 연보
△1929년 프랑스 렝스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남.
△1963∼66년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1968년 논문 ‘사물의 체계’로 박사학위 취득
△1968년 낭테르 대학에서 점화된 68혁명에 조교로 시위에 참여함
△1975년 ‘생산의 거울’ 영어본 출간
△1987년 낭테르 대학 사회학과 교수직 은퇴
△1988년 마크 포스터에 의해 ‘보드리야르 선집’ 발간
△1993년 마이크 게인에 의해 ‘보드리야르 인터뷰 선집’ 발간
△1991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논쟁적인 에세이 발표
△1995년 기술문명의 폐해를 비판하는 ‘완전범죄’ 출간
△1996년 일본을 방문해 사상가 요시모토 다카하시(吉本隆明)와 공개 토론
◆주요 저서
△1968년 ‘사물의 체계’(배영달 옮김, 백의, 1999)
△1970년 ‘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2)
△1972년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규헌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3)
△1973년 ‘생산의 거울’(배영달 옮김, 백의, 1994)
△1976년 ‘상징적 교환과 죽음’(불어본)
△1979년 ‘유혹에 대하여’(배영달 옮김, 백의, 1996)
△1986년 ‘아메리카’(주은우 옮김, 문예마당, 1995)
△1992년 ‘종말의 환영’(1992 불어본)
△1994년 ‘완전 범죄’(1994 불어본)
△1997년 ‘이타성의 형태들’(1997 불어본)
- <국민일보 2000. 11. 13>에서 -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문예출판사. 2000
오늘날 우리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다. 사물에 둘러싸인다는 건 달리 말하면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 특히 민주주의 핵심인 평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물'이 풍요롭지 않을 때에 평등은 모두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다. 따라서 사물이 풍요롭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평등' 즉 소유의 평등을 이루는 지름길로 인식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산업 사회의 폭발적인 생산은 찬양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대가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고 사람들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지만 사람들은 물건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보다 그걸 어떻게 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관심은 '소비'의 문제로 옮겨오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생산의 시대에는 풍요가 분명 평등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비의 시대가 되면서 그러한 평등은 여전히 요원한 문제가 되었다. 사라져야할 평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 ― 생산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소비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개성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성 그 자체가 집단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풍요' 속에서 왜 평등은 오지 않는가? 보드리야르는 그 해답을 소비의 성격에서 찾는다. 소비, 즉 소유의 목적은 필요를 채우는 것인가? 답은 아니다. 만일 단지 소비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면 우리는 불평등을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과소비'니 '충동소비'니 하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소비의 시대에 불평등, 과소비, 낭비, 그로 인한 공해 등은 너무나 흔한 말이 되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지나쳐 버렸지만 우린 낭비나 공해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산의 시대와 소비의 시대의 시각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생산적 '번영'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번영의 지표로 GNP를 많이 거론한다. 그런데 GNP는 진정한 번영의 지표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사회를 따뜻하게 물들이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은 반영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지는 폭발적 생산력은 단순히 통계화 될 수 없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공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비용은 모두가 국가의 GNP 수치를 높여 우리의 '풍요'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시각이 소비의 시대에 맞게 바뀌었는가?
낭비, 공해가 우리의 풍요를 부풀리듯이 낭비 역시 우리의 풍요를 부풀린다. 필요 이상의 소비, 낭비는 필요 이상의 생산을 낳는다. 그러기에 그런 생산을 통해 '사물'은 넘쳐나고 우린 풍요의 바다에 허우적거릴 수 있다. 낭비와 공해는 우리가 그렇게 찬양했던 생산과 이를 통해 지향했던 '풍요'의 다른 얼굴이다.
이제 다시 소비의 문제로 돌아오자. 소비의 어떤 성격 때문에 풍요가 평등으로 연결되지 않고 과소비와 같은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가? 소비는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의 중심부 중산층에 의해 창조된 소비는 없다. 또한 밑바닥 층에서 생산된 소비가 상류계층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없다. 거의 모든 소비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소비인 것이다. 맨 처음 상류층에 의해 생성된 소비형태는 희소성을 띄며 향유되다 일반화의 길을 통해 대중에게로 전파된다. 소비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대중은 언제나 상향적이고 수동적이다.
그럼 왜 소비는 이런가? 사람들은 그저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가 가지는 가치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 다니는 10년 가까이된 프라이드나 오늘 뽑은 뉴그랜저는 사물의 기능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조금 더 안정적이고 편한 것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만을 위해 상상하기 힘든 가격 부담을 담당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고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려 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사려는 것일까? 프라이드와 뉴그랜저의 사물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가치의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 뉴그랜저를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그것이 가지는 상징 ― 부유함, 상류사회, 특별함 등 ― 을 가진다. 또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소비를 하는 계급에 속하게 된다. 이런 소비는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사회 속에 특정 지점에 위치시킨다. 아니 그럼 사람들은 왜 이런 상징과 가치, 위치지음을 소비하려 하는가? 다른 이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해서다. '차이화' 이것이 바로 소비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상류층과 같은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상징과 가치를 향유하고 같은 계급에 속하는 '평등'을 누리려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같은 소비를 할 수 없는 자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고자 한다.
이 차이화에의 욕망이 바로 소비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대해서는 만족을 누릴 수 있어도 이 차이화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차이를 '개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그 허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랜저를 소비함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개성을 가지려 하지만 그는 그랜저를 샀던 사람들을 따라감으로써 개성을 상실한다.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고 싶다는 욕망이 많은 이들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린 우리 시대 소비의 성격을 규정하고 또 가장 잘 보여주는 대중매체, 섹스, 여가생활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 독서 기간의 공백이 있은 다음)
소비의 사회를 지탱시켜 주는 신화적 구조는 다양하지만 보드리야르의 난해하고 어려운 저술 속에 담겨 있는 내용 모두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고 떠오르는 여러 가지 관념적 파편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르시클라주, 영어로 하면 리사이클링 정도가 되나? '재교육', 오늘날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춰서 있지 못하도록 한다. 세상의 변화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요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재교육'의 장으로 내몬다. 그런데 '재교육'은 교육적 개념이 아니다. 시대에 부응한다는 것, 이건 다름 아닌 유행에 부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 입는 법에 있어서도 재교육이 필요하고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을 사용하는 법도 재교육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변하고 따라서 사물도 변하고 그 사용법도 변하기에.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해, 그리고 유행에 따라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재교육'받아야 한다. 소비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키취. 소비의 사회는 모든 신성한 것을 대중화, 상업화 시켜 세속화시킨다. 박물관의 진열품은 길거리 노점상의 싸구려 민속품이나 기념품으로 둔갑해 소수가 누리던 고급스런 향유 문화를 대중이 누리는 '유희'로 바꿔 놓는다. 팝 아티스트들은 소수에 의해 고급스럽게 향유되던 '예술'에서 신성성을 제거하고 대중적인 유희, 복제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시킨다.
자기실현적 예언, 대중 사회의 총아 광과, 사람들은 소비 사회의 광고를 보며 그것이 소비를 부추기고 거짓된 정보를 전달한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광고의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고는 진위의 여부와 관계되지 않는다. 광고를 비롯해 미디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라 할 수 있다. 삼성카드의 광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를 보며 삼성카드가 과연 회원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삼성카드는 광고를 통해 능력을 보여주는 카드가 되어 가는 것이다. 삼성카드의 특성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통해 삼성카드는 회원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카드가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의사(擬似)체험. 도시를 비롯한 인간의 사회에서 자연은 상실되었다. 도시 사회에서 이웃간의 친밀성도 상실되었다. 그래서도 사람들은 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세워 놓고 마치 자동차를 타고 '자연'속에 있는 듯한 거짓된(擬似) 체험을 '소비'한다. 인간관계 역시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 점원의 미소, 안내원의 이상한 말투와 같이 친밀함을 만들어서 마치 우리가 친밀한 인간관계를 거짓 체험함으로써 누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어질 수 있는 '상품', 곧 '사물'이 되었다. 더 이상 자연을, 동물을 체험할 수 없게 된 인간은 동물원을 만들어 자연 속의 동물들을 의사 체험하며 그것을 소비한다. 식물원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보면 분재니, 화분이니 하는 것도 아파트라는 사회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의사(擬似)체험일 뿐이다.
몸의 해방, 육체의 소비. 섹스와 인간의 몸은 언뜻 인간 해방의 사상이 낳은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린 해방되지 않았다. 육체는 이제 투자의 대상이자 자본이 되었다. 내 몸은 내가 가지고자 하는 모습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되고 소비되는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육체에의 소비, 예를 들어 요즘 열풍이 일고 있는 성형수술, 고급스럽고 불필요하기까지 한 의료서비스는 또 하나의 계급적 차이화를 가져오는 '상품'이 되었다. 육체가 투자와 소비의 대상이라는 것을 성형수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현대의 사회는 물신(物神)의 사회이다. 육체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곧 그것이 사물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또 다시 하나의 신(神), 곧 우상이 되는 것이다.
여가, 시간의 문제. 시간 역시 그 절대성을 상실했다. 노동 시간만이 생산의 체계와 관련되는 시기는 끝났다. 여가 역시 생산의 체계와 관련된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 것인가가 역시 다른 이와 계급적 차이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여가를 많이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여가를 통해 풍요를 누리며 포틀라치(북미 인디언, 원시 사회에서 힘의 과시로 행해지던 선물 공세)를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처럼 말이다. 이제 여가는 그냥 주어졌기에 편안히 누리는 여유의 시간이 아니다. '남들처럼' 보내야 하는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여가는 휴가철이 되면 남들처럼 해변에서 캠핑을 해야 하고, 겨울이면 빚을 내서라도 스키장을 다녀와야 되는 그런, 어떻게든 소비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폭력. 이제 이유 있는 폭력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이유 없는 잠재되어 있다 겉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폭력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맨 처음 살핀 내용을 되짚어야 한다. 풍요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가? 풍요가 욕구를 충족시킨다면 폭력을 사라져야 한다. 폭력은 사회적 불안과 부조화의 증거이기에. 그러나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욕구도 충족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욕구, 욕망은 양면적이다.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충족되기를 강요당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이에 저항하는 부정적 충동과 욕구가 있다. 풍요한 사회는 잠재되어 있던 이 결핍된 욕구를 건드리고 마침내 폭력은 폭발하고 풍요의 사회에 대한 저항성을 드러낸다. 이유 없는 무기력함, 만성적 피로 역시 폭력과 마찬가지로 풍요의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책이다. 표지에는 '글읽기의 즐거움'을 준다고 했지만, 실제 이 책을 읽으며 고통보다 즐거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말 탁월한 저작이라는 생각이 쉽게 든다. 현대의 신(神), 물신(物神)이 어떻게 우리의 사회에 '소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세상의 세속화와 물신화를 이루어 가는 지를 이처럼 철저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지 않을까? '수박 겉핥기'를 했지만 그 표면만 핥더라도 많은 것을 얻게 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세계의 석학과 명저] ⑧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