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에 한 송이 꽃이 피고 있었다. 오이를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놓고 팔팔 끓는 소금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에 오이가 익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언니가 일러 준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뚜껑을 덮었다. 6일이 지나도록 나는 수시로 오이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알뜰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가지런히 쟁여진 오이들 사이사이에서 가는 호흡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물 위에 피막이 얇은 레이스처럼 번져갔다. 하얀 곰팡이 꽃이 피었다. 오이가 누렇게 삭아가는 과정에서 피는 꽃, 골마지다. 건드리면 스러질 것 같은 하얀 꽃, 켜켜이 쌓은 오이들의 심장에서 피어난 꽃이다. 이름처럼 골골이 여린 언이의 삶이 지난한 내 삶에도 골마지로 피어났다.
언니는 오이지를 잘 담근다. 언니의 밥상에는 오이지가 무침이나 냉국이 되어 자주 오른다. 입맛이 없을 때 언니도 나도 ''오이지만 한 반찬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오이지에는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인지 오이지 하나를 상에 놓고 찬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술술 밥을 먹는 식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만 달라진 것은 가난의 반찬 오이지가 지금은 추억의 맛으로 밥상에 오른다는 것이다.
내가 중학생 때, 언니는 시집을 갔다. 맏딸이었던 언니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안일을 20여 년간 떠맡아 살다 보니 배움의 기회조차 놓쳤다. 마음씨 좋은 형부는 내세울 것 없는 언니를 심성이 곱다는 이유 하나로 보쌈하듯 데려갔다. 그렇게 언니는 친정에서 살림살이를 졸업하는가 싶었는데 결혼을 해서도 유학을 가듯 친정 걱정에 엄마 걱정에 사흘도록 언니의 마음은 허공 중에서 친정과 시댁을 왔다 갔다 했다..
시집가던 해에 언니는 막 따낸 신선한 오이같이 상큼했다. 작은 키에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언니에게서는 늘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언니에게서만 나서, 지금까지도 어느 곳에 어느 누구에게도 맡을 수 없는 그런 냄새다. 나는 언니가 늘 그렇게 있어주길 바랐다. 아니, 시간이 흘러도 언니는 언제나 그 모습 그 향기로 머물러 있을 거라는 철없는 믿음을 가졌다. 나에겐 언니라는 존재가 엄마보다 더 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단 하루도 온전하게 친정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언니에게 기어이 엄마는 시련 같은 짐을 더 얹어 버렸다. 남편 없이 자식들을 키워내는 동안 수없이 오가던 논과 밭에서 엄마의 무릎관절이 소리 없이 닳고 있었던 것이다. 질질 끌며 버텨 온 시간이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이번엔 엄마를 아예 땅에 주저앉혔다. 수술 시기도 훌쩍 놓쳐버린 엄마의 연골은 퍼석한 소리와 함께 엄마와 언니를 나란히 묶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맡아야 할 시련은 저마다의 이유로 고스란히 언니 차지가 되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이론처럼 알고 살았지만, 그 현실이 엄마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인생의 끝자락에서는 심장도 그 기능을 상실해 간다. 힘없이 박동하던 엄마의 심장은 결국엔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곧 스스로 작동을 멈출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헐거워진 심장의 펌프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겨우 숨을 뱉어 냈다. 홀아비가 된 아들의 넋두리까지 보태지는 날엔,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았다. 술 취한 엄마는 소변조차 가리지 못해 지린내를 풍기며 또 그것이 서러워 한 맺힌 세월을 폭탄처럼 언니에게 퍼부어 댔다. 축 처진 엄마를 일으키다 힘에 부쳐 쓰러지길 몇 번, 주저앉아 펑펑 울던 언니의 삶은 엄마의 삶에 함께 그렇게 쟁여져 갔다.
차곡차곡 쟁여두었던 오이지에 소금물을 붓고 3일이 지나면 오이는 색이 바래진다. 그리고 몸도 조금씩 쪼그라든다. 이쯤. 되면 항아리의 소금물을 따라내서 다시 팔팔 끓인다. 그리고 식힌 다음, 다시 쪼그라든 오이에 붓는다. 오이는 또다시 3일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고, 꽃을 피워야 한다. 그 과정이 끝나면 빛깔 좋은 오이지가 된다. 나는 오이지를 담그면서 이것을 '삼삼한 인내 요법'이라 이름 붙였다.
마지막 언니의 인내까지 보고 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엄마는 응급실에 실려가 병운에 입원한 지, 3일에 3일을 더 지나고 나서 호스를 빼고 당신의 의지로 숨을 쉬게 되었다. 그 시간조차 꼬박 언니를 옆에 묶어 두고 있었다. 평소 아무리 아파도 엄마는 아들 집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딸들에게는 죽어도 얹혀살지 않겠다던 엄마다. 시집간 딸들이 하나같이 아들을 못 낳아 사돈 뵐 면목이 없다며 왕래조차도 거리를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이라는 기둥을 놓지 않으려던 엄마가 며느리 공양이라도 제대로 받았다면 엄마의 삶이 그렇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니 또한 엄마의 삶의 언저리에서 뱅뱅 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십 년이 넘게 언니의 공양을 받고 나서야 딸들 보기 민망하다며 엄마는 말끝마다 '빨리 죽어야지'를 입버릇처럼 뱉으셨다. 그러나 어쩌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결국 그 모든 것을 엄마의 살점을 떼 주고 피를 나누어준 딸이 당신의 인생을 나누어질 수밖에.
그 나눔마저도 저마다의 핑계가 있었다. 나는 멀리 산다는 이유로 어쩌다 한번 찾아가 얄팍한 봉투 하나를 건네며 그것으로 엄마의 인생을 조금 나누었다고 자위하며 살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또 그들의 이유를 달고 언니에게 엄마를 밀어 넣었다. 엄마의 백발을 걷어 올려주는 언니의 손, 나는 문득 평생 씻기지 않을 죄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누지 못하는 핑계를 묵묵히 덮어두며 그 손으로 언니는 엄마의 동강 난 삶을 하나씩 이어 붙여 주고 있었다.
"나, 고만 먹을래. 고만!"
엄마의 말은 들은 척도 않는 언니가 엄마 입에 죽을 계속 떠 넣으며 가슴을 쓸어준다. 엄마도 '됐다'고 고개를 돌리다가 수저가 올라오는 순간에 입을 벌려 받아 넣는다. 둘만의 호흡이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엄마는 언니가 힘들까 봐 그만 먹는다는 소리를 쉼표처럼 했고 언니는 먹어야 살지 않겠느냐며 마침표처럼 엄마를 단호히 달랬다.
식사가 끝난 한참 뒤 엄마의 신호를 받은 언니가 침대에 달린 커튼을 친다. 언니 체구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엄마를 모로 뉘이고 작고 주름진 손으로 기저귀를 간다. 언니의 손이 엄마 엉덩이 골에 핀 꽃을 닦아내고 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손끝으로 코를 막았다. 백 년의 반도 못 살아온 딸의 손이, 백 년을 눈앞에 둔 노모의 삶을 그렇게 구석구석 닦아내고 있었다. 하얀 기저귀 위에 핀 그 꽃을.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엄마의 얼굴이 아이처럼 밝다. 퉁퉁 부은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만 , 예전에 노래도 잘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닳고 닳은 손으로 침대 끝을 톡톡 치며 노래를 한다.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 눈물이 핑 도네요,, 정말로' 엄마는 그렇게 병실 가득 가슴이 찡한 노래를 부르다가 언니 손을 잡았다.
"야야, 내가 저승 가서도 니 고마움을 어찌 갚을까 싶다."
유언처럼 한마디 말을 남긴 엄마는 이른 봄에 삶의 꼬투리를 끊으셨다. 저승길의 열두 문을 건너갈 매듭을 엄마 몸에 꽁꽁 묶던 날, 언니는 엄마를 끌어안고 왜 벌써 가시느냐며 울부짖었다. 마디마디 매듭으로 봉해진 엄마를 어루만지며 오열하던 언니의 모습, 그것은 내가 엄마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보는 꽃이었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하얗게 피는 꽃, 눈물의 골마지였다.
내가 언니에게 얻어만 먹다가 처음으로 오이지를 담그며 본 하얀 꽃이 바로 골마지다. 송이 지어 피는 꽃만 꽃이 아니듯 발효되어 곰삭을 때 피어나는 이 꽃을 보면서 언니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이루지 못할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도 두 송이 꽃을 피워 줄지도 모를 딸이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꽃도 씨앗이 있어야 필 것인데,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씨앗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득 부질없는 내 생각에 큰 몽둥이를 들고 내려친다. 죽기 전에 누군가의 골마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김옥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