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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의 집
January 2023
Jun 28. 2026
"미국 독립과 자유의 역사 - Philadelphia"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집
미국인들에게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 되는 도시 필라델피아.
그런데 사실 한국인들에게도 이곳은 '우리의' 독립과 관련된 장소이다.
시내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서쪽 외곽 지역(Media, PA)으로 가면,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서재필의 집이 있다.
이곳을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배우는 수준으로 서재필을 표현하자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중 한 명,
미국으로 망명한 최초의 한국인 미국의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사람,
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교과서에서만, 시험에서만 남아있던 이름이었는데,
내가 미국땅에 와서 살다 보니 '이민자 서재필'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조선의 젊고 유능한 관료 서재필이 미국 의사 Philip Jaisohn이 되기까지
1864년에 태어난 서재필은 겨우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그야말로 당대 최고 수재였다.
이른 나이에 관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그는,
고종시대 조선 정부의 파견으로 일본에 건너가 근대 문물을 접하고 나서
조선의 현재를 아득히 앞서가는 세계의 흐름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도 변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의 일원으로
1884년에 갑신정변(민 씨 정권과 청나라 세력을 상대로 한 개화파의 쿠데타)을 일으키게 되고,
모두가 알고 있듯 이 사건은 '3일 천하'라는 말과 함께 대실패로 끝나게 된다.
촉망받는 관료였던 그의 인생은 이 사건 이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정변이 실패하자 서재필은 하루아침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하여
2살 배기 아들을 포함한 가족 3대가 연좌제로 처벌당하는 참혹한 운명을 맞게 된다.
홀로 조선에서 도망쳐 일본으로 향하게 된 서재필은,
일본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일본엔 조선 정부가 보내는 자객의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도' 차별과 무시 속에 놓이게 된다.
그는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돈을 모으고, 틈틈이 영어를 배우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여러 기회를 잘 살려서 살아남는 것에 전념한다.
그러던 그는 밑바닥 생활 1년 만에 한 미국 자선가의 지원을 받아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되고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동부 펜실베니아(Wilkes-Barre, PA)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서재필은 교장선생님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했는데
이 시기 그는 미국 사회에 대한 많은 것을 습득하게 된다.
그는 단지 영어만 못 했을 뿐 당대 조선 최고 천재였기 때문에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학에 진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 생활 약 5년 만에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는데
이 시점부터 조선의 대역죄인 서재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의 조선 이름 서재필을 거꾸로 쓴 것에서 기원한 이름인,
미국인 의사 'Philip Jaisohn'만이 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그는 미국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대학 강사가 되어 미국 주류 사회를 흉내 내며 살아가게 된다. (살만해졌다는 뜻이지 그가 진짜 미국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 사람들이 아시아인 의사를 기피해서 병원 운영이 어려웠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었겠는가. MLK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그의 의지나 역량과 무관한 그 시대의 한계이다.)
(사진)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의 집. 대지 넓은 곳에 지어진 벽돌집으로,
고급스러움이 주변 다른 집들과 차이가 난다. 의사로 살았던 그의 생활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미국인이 되어 돌아온 조선의 역적.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원숭이의 해 갑신(甲申)년의 10년 후는 말의 해 갑오(甲午)년이다.
갑신정변 10년 뒤, 조선 사회는 갑오개혁을 통해 대변혁을 준비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국이 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뭐라도 붙잡고 싶었던 고종은,
미국 현지에서 주류로 흉내 내며 살고 있는 서재필을 복권하고 조정에 도움을 줄 것을 '명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조선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Philip Jaisohn'은 이 요청을 수차례 무시하다가 (약소국의 왕 주제에 감히 나에게 부탁도 아니고 명령?) 정부 고문 초빙 계약 형식을 갖추어 청하자 가족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조선의 방식인 '군신의 예의'를 따르기보다는 아메리칸 스타일에 따라 행동하였다. 조선 정부는 '반역자 서재필'을 복권하여 관직까지 하사하였으니
그가 엎드려 들어올 줄 알았겠지만 깐깐한 성격의 Philip Jaisohn은 고종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조선말조차 잊은(사실은 잊은 척하는), 그저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미국인이었을 뿐이다.
그는 미국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으며 자신과 가족들을 천대했던 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서재필의 모습은 몇 년 전 유행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주요 설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재필의 마음에 미움과 원망만 남아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가 조선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
그런 Philip Jaisohn이 진심으로 조선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던 일 중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아래와 같다.
참고로 이 시대의 '독립'이라는 용어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조선은 건국 당시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명/청나라의 속국 아닌 속국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자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이 제일 우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 독립신문 창간 : 현세대에 까지 내려오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조선 최초의 대중 신문 '독립신문'의 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민중 계몽을 위해 창간된 것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과 영어로 쓰였다.
당시 정관계 및 학계에서는 한문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글은 천한 것들이나 쓰는 글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조선에서 이 신문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평등한 정보 전달이므로 한글의 사용이 당연했다.
집필진에는 한글 학자인 주시경이 참여했다.
그 덕에 한글의 띄어쓰기가 독립신문을 계기로 체계화될 수 있었다.
한글 사용법은 독립신문을 통해 현대적으로 정립되었으니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었음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조선최초의한글신문인독립신문은미국에서돌아온서재필이중심이되어창간되었다."
<--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이해가 되는가?
2. 독립문 건설 :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Philip Jaisohn의 또 하나의 업적은
바로 서울에 있는 독립문이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황제의 나라'인 명나라에 대한 예우가 극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한양에는 오로지 명나라 사신만을 맞이하는 전용 관문과 숙소가 설치될 정도였다.
서울 성곽 서편에 설치된 '영은문(迎恩門, 중국 황제의 은혜를 환영하는 문이라는 뜻)'은
명/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서울 성곽의 공식 서문인 돈의문(=서대문)이 있음에도 굳이 명/청 사신만을 위해 존재하던 이 문은 Philip Jaisohn의 요청으로 1895년에 철거되었다.
영은문이 철거된 곳에는 자주국인 조선의 번영을 기원하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청나라 사신이 쓰던 숙소는 '독립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어 독립협회가 사용하게 된다. (독립문 건설당시, 영은문을 모두 철거하지 않고 기둥돌을 남겨두었는데 후대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독립문은, 60여 년 전 앞서 완공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선문보다는 크기가 많이 작다.
현재 이 일대는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청나라에서의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 그 뒤로는 서재필의 동상과 독립관, 그리고 유관순 동상이 배치되어 있다. 공원 제일 안쪽에는 서대문 형무소가 있어서 우리나라 독립의 과정을 시간 흐름에 맞도록 잘 설계한 것 같다.
그 외에도 그는 만민공동회와 같은 집단 토론을 통해 계몽 활동에도 힘썼으며
의회 설립과 지방자치 같은 민주주의 개념을 제도상으로 도입하려 하였다.
이 같은 Philip Jaisohn의 급진적 정책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외교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경멸에서 미련으로, 두 나라 사이에 남겨진 이민자 서재필의 삶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이 들어있던 Philip Jaisohn은 조선 관료들과 생각이 부딪힐 때마다
경멸의 눈초리로 고종을 비롯한 조선 관료들을 가르치려 들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조선 나름대로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고자
'미국 손님'을 모셨지만 왕정의 권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과거의 반역자이며 현재는 군신의 예법도 모르는
'급진주의자 미국인'은 급기야 해고되기에 이른다.
계약기간 10년 중 고작 3년도 넘기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당한
Philip Jaisohn은 미련 없이 미국으로 돌아간다.
물론 그의 뼛속까지 밴 아메리카 스타일 대로,
계약 파기의 유책자인 조선 정부에 잔여 급여와 이주비를 꼼꼼히 청구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의 행적을 보면,
한동안 조선의 일은 잊고 미국인으로 살기에 전념했던 것 같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에서 징병 군의관으로 봉사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UPenn에서
의학 강의 연구 활동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Philip Jaisohn은 이때부터 필라델피아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병원도 개원하고 독립신문 시절의 경험을 살려 출판 사업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고 Philip Jaisohn이 미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는 마침내, 1910년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한들,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한들,
그의 마음속에 자신의 뿌리인 조선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의 처지는 그가 살던 과거에도 내가 사는 지금도,
본질적으로 현지인이 될 수 없고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다.
주변 미국인들과 차이나는 생김새, 말투, 경험과 지식 등등에 기인한 경계심 가득한 눈빛과 차별. 그 속에서 매 순간 갑옷을 입고 있는 느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이민자다.
그때마다 자신의 진짜 고향이 생각나게 되는 건 그때나 지금의 이민자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가 살았던 시기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럴 때마다 나고 자란 고향이 주는 안도감은 절실하다.
이민자에겐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바로 나고 자란 고향이다.
독한 마음으로 성공한 Philip Jaisohn이라 한들 고향에 대한 마음이 달랐을까?
그런 이유에서인지 Philip Jaisohn은 조선 멸망 후에도 자주는 아니어도
지속적으로 미국 내 조선인들과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며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에 매우 감명받은 Philip Jaisohn은,
과거 고문으로 조선에 갔을 때의 뻣뻣한 모습과는 달리,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돕기 위해 물심앙면으로 지원하게 된다.
한인자유대회를 주도하고, 하와이의 이승만, 캘리포니아의 안창호 등을 만나고,
독립을 위한 미국 정부 상태의 외교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유일한이 창업한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회사 이름도 서재필이 지음). 독립운동 지원을 하며 가세가 기울며 운영하던 출판/문구 사업을 접어야 하기도 했지만
1945년 조국의 독립으로 그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된다.
서재필은 남한의 초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지만
나이나 국적 등 여러 이유로 고사하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어를 다 잊어서'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어쩌면 그 당시 여든이 넘었던 그는 진실로 한국말을 잊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한때 역적이 되어 가족을 모두 잃어야 했던
서재필에겐 그런 순간이 큰 보람이지 않았을까?
그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해방은 이루었지만 정부 수립과 동시에 민족 분열을 맞고 머지않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평화를 바랐을 서재필은,
안타깝게도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86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 집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주변의 집들이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것과 달리, 서재필의 집은 대지 넓은 2층짜리 벽돌집이다. 미국 동부에서 흔히 보이는 잔디 마당 대신, 작은 나무와 화분으로 꾸며진 정원은 어딘가 모르게 한국 느낌을 준다. 뒷마당에는, 아마도 후대에 설치한 것 같은 태극기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몇 해 전 한국에서 다녀간 국무총리가 심은 가녀린 나무가 눈에 띈다. 이 정도면 미국사람 누가 봐도 이 집은 한국에서 온 위인이 살던 집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1층에는 서재필이 살아온 역사가 정리되어 있다. 그가 당시 사용하던 의료 도구와 개인 소지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에서 어떤 일상을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어느 미국 이민자의 집.
주변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의 이 집에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서재필의 삶이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현재의 많은 이민자들이 그러하듯, 서재필 역시 끝내 어느 한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조선에서는 배신자로, 미국에서는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시간들. 그래서 이 집은 역사적 장소라기보다 긴 시간 끝에 한 이민자가 겨우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머물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내 미국집이 나에게 그러하듯.
서재필의 삶을 돌아보며 현시대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도 참 애잔하다. 정착을 위해 애쓰고는 있지만 온전한 현지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한국을 떠나오긴 했지만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그 애매한 마음. 서재필은 완전히 미국인으로만 살았다면 성공한 이민자 의사로만 남았을 것이지만, 자신을 버린 조선을 차마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애매한 어디쯤에서 그는 평생을 머물렀던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
한국을 놓지 않으면 내가 미국에서 살 수 없고, 한국을 놓아버리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역사 공부를 싫어하는 세은이에게 '나중에 한국 가면 시험에 나온다'라고 말하면서 데리고 다니긴 했지만, 사실 내 바람은, 언젠가 이곳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가족을 짊어진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해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필라델피아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우리 집이 있는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