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토요복생반 모이는 날이라 기뻐했는데
반원들의 여러 가지 유고로 갑자기 취소됩니다.
성령님, 생명의 공동체 모임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요한복음을 마무리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니 그 은혜를 무어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육신의 생각으로 흐르는 자,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아들의 이름을 힙입어 아버지께로 가오니
아버지 품속을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본문 주해)
15~17절 : 조반을 마친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주님을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였다면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이러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실 때 베드로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아신다고 대답한다.
세 번이나 물으심은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목숨 바친다고 충성을 다짐하였지만, 결국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결과만 그에게 남았다.
이는 인간의 결정과 의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완전히 무너진 베드로, 완전히 깨어진 베드로, 그 상한 심령에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그 목표를 다시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이다.
헬라어에서 ‘사랑’이란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로 말한다. 그것은 ‘애정적인 사랑, 우정, 신적 사랑’의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아가파오’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을 하지만 본문에서는 두 동사가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된다. 다만 문체적 변화를 위해 번갈아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양은 창세전부터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제자는 목숨을 주심으로써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제자의 목숨은 주님의 양들을 위해 바쳐진다. 그것은 생명이 부재한 양들(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고 누리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라는 말씀을 결국 이렇게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또다시 찾아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18~19절 :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새번역)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명은 십자가 죽음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최후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순교이며, 이것은 아들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두 손을 벌리다’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였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전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과 의지적 결단으로 다녔으나, 이제는 남이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이다.
성도란 이제부터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매인 바 되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20~23절 : 그러자 베드로가 말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남과 비교를 한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왜 엉뚱한데 신경을 쓰느냐는 것이다.
모든 시대, 예수를 따르는 자는 오직 자신의 소명에 관심을 갖고 그를 따라야 한다.
24~25절 :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새번역)
이 구절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결론이 아니라, 제3자의 결론임을 보여준다.
‘우리’(24절)는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 중의 하나이다.
(나의 묵상)
같은 말로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 앞에 자신만만했던 베드로가 무너진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이미 맛본 자신에 대한 절망이지만, 주님의 질문 앞에 그 상황이 다시 상기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무너짐은 주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시고 세우시기 위함이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1:10)
베드로의 결심과 결단, 의지, 자신감....을 주님께서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그리고 다시 세우며 심으신다는 것이다.
복음을 몰랐을 때, 나는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의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그 활약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세상 속에서 잘 되게 해 주실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 틀렸다. 완전히 틀린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들은 ‘비전’이라고 키우고 북돋워야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육신의 생각이었다. 다 무너지고 뽑히고 사라져야 할 것들인 것이다.
부인하고 배신하고 실패한 베드로, 그를 쓰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의 자신감, 자랑, 자아확장, 결단 등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철저히 가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주님은 나의 자아와 자존심을 깨부수시고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하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낮아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베드로의 그 상한 심령 위에 주님께서 다시 목표를 세워주시고 다시 이루어내심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나에게도 그 일을 이루고 계신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나의 바램이나 의지를 내세우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생각, 바램, 의지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만들어 내는 공장과도 같은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젊은 베드로의 길이 아니라, 늙은 베드로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눈을 뜨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늙은 베드로의 길은 십자가 죽음의 길이다.
나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과연 진심이며, 사람으로서 가능한 기도일까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록 갈등 속에서 헤맬 때도 많지만, 드디어 나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불가능했던 기도가 성령의 인도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 말도 안 되는 이 일이 내 생에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1:17)
베드로가 한 것은 큰소리와 자랑과 부인과 배신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기어코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로 만들어 내셨다.
나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 존재이지만, 주님께서 기어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로 이끌어내실 것을 믿는다.
(묵상 기도)
주님,
늙은 베드로의 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서 나의 원함과 바램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자주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죽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음을 압니다.
성령님, 꼭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