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간 장벽 허물고 정보 공유…
생산성 10% 높이고 비용도 8% 절감
아무리 조직 관리가 철저한 기업이라도 상사가 직원 모두의 업무 추진 상황을 다 파악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바로 옆에 앉은 동료끼리도 오늘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팀원들이 따로 놀아 업무 공백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비슷한 일을 중복으로 하거나, 일 처리 방향에 혼선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할 일을 팀장은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이 알 수 있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포스코는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모든 임직원이 매일 자신의 주요 업무 계획과 추진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비주얼 플래닝(Visual Planning)' 활동이 그것이다. 포스코에선 'VP'라고 줄여서 부른다. 이를 통해 직원 간, 부서 간 장벽을 허물고, 업무 효율화를 성공적으로 일궈내고 있다. 포스코는 VP를 실시한 지난 1년 반 동안 공장 현장의 생산성을 10%가량 높이고 비용도 전년 대비 8% 가까이 절감했다고 밝혔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
지난 8월 말 포스코의 포항 스테인리스 제2제강 공장. 스테인리스 제조 공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이 건물의 한쪽 벽에는 길이 3~10m, 높이 2~3m의 화이트 보드가 3개 걸려 있다. 이 보드에는 작업팀별 업무 진행 현황이 하나도 빠짐없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공장장과 팀장 이하 중간 간부에서부터 각 작업팀 소속 직원들까지 120명이 출근하자마자 각자 오늘 시급하게 해야 할 중요 업무와 오늘 마쳐야 할 작업량 등을 직접 써넣었다. 직원 개인은 물론이고 각 팀의 분기별, 월별, 주간별 주요 업무 및 목표도 별도의 화이트 보드에 기재돼 있다. 직원 스스로 자신의 작업 목표와 업무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팀장 및 다른 동료와 공유하는 현장이다.
매일 아침 이 보드 앞에서는 주요 팀장급 미팅과 팀별 팀원 미팅이 순차적으로 열린다. 보드 앞에 둘러선 10~20명의 팀원이 직급에 관계없이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주요 업무에 대해 30초가량 짧게 얘기하면 다른 팀원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난상토론 방식이다. 회의 주재는 팀장만이 아니라 팀원들이 교대로 맡는다. 이 공장에선 '와글와글 미팅'이라고 부르는 회의다.
이날 회의에선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팀원 한 명이 "어제 다른 공장에서 안전사고가 났는데, 우리 라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팀원이 "크레인에 줄을 걸고 하는 작업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했고, "크레인의 무게 중심을 잘못 잡았다", "작업 통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이 같은 의견들은 곧바로 '크레인 작업 3개 안전 수칙'으로 정리됐다. 이날 회의 시간은 15분. 통상 10분 안팎이며, 길더라도 20분을 넘지 않는다.
같은 시간 포스코 본사의 마케팅 담당 부서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회의가 진행됐다. 한 팀원이 자신의 업무 추진 목표가 적힌 화이트 보드 앞에서 이날 추진할 해외 계약 건에 대해 설명하자, 다른 팀원은 "그 계약과 관련해 오늘 바이어를 만나는 약속이 있다"고 정보를 공유했다.
공식적으로 '비주얼 플래닝 미팅'이라 부르는 이 회의는 포스코의 전 부서에서 매일 또는 격일제로 시행되고 있다. 부서별로 설치한 화이트 보드에 모든 부서원이 업무 우선순위에 따라 긴급한 업무는 빨간색, 2순위 업무는 노란색 등 서로 다른 색깔의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새 판로를 개척한 직원에 대해선 보드에 빨간색 스티커나 별표를 붙여 격려한다.
정해진 회의 원칙은 세 가지. 첫째, 책상이나 의자 없이 화이트 보드 앞에서 무조건 스탠딩(standing)으로 한다. 둘째,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예외가 없이 화이트 보드에 자기 업무와 목표를 공개해야 한다. 셋째, 한 사람당 발언 시간은 절대 2분을 넘지 않아야 한다.
이 제도는 2006년 일부 부서에 시범적으로 도입됐다. 엔지니어들이 기술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행정 업무 부담이 너무 크고 시간 낭비도 많다는 점이 발견됐다. 더구나 포스코는 공기업이었던 회사에서 나타나는 업무 중복과 낭비, 소통 부재의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운영 담당 사장이던 정준양 회장이 '업무 드러내기'란 이름으로 도입했다. 그리고 2009년부터 회사 전체로 확대됐다.
- ▲ 포스코 본사의 한 사무실에 설치된 비주얼 플래닝 보드(왼쪽). 각 직원들의 장단기 목표와 우선순위에 따른 업무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다. 본사 직원들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그날 처리할 주요 업무에 대해 논의하는‘VP 미팅’을 갖고 있다(오른쪽).포스코 제공
포항 스테인리스 제2제선 공장의 경우 VP를 실시한 지 1년 만에 품질 불량률이 2008년 6%에서 작년 2.5%로 뚝 떨어졌다. 재료비도 연간 137억원 절감했다. 쇳물 100t으로 생산하는 스테인리스 제품의 양(무게)을 의미하는 실수율(實收率)은 88%(88t)에서 89%(89t)로 1%포인트 향상됐다. 실수율은 연간 0.1%포인트 높이기도 힘든데, 단번에 10배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이라고 포스코 관계자는 말했다. 이 공장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무재해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지현종 공장장은 "전 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목표와 주요 업무를 공개하고, 업무 정보와 문제해결 방안을 공유하다 보니 자율적으로 목표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은 물론 조직이 단합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포항공장 제선팀 기술개발실도 VP 실시 이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VP 시행 전에는 엔지니어들이 서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기술 개발 일정에 대해서도 "해봐야 아는 것 아느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매일 업무 추진 계획을 공개하자 스스로 기술 개발 청사진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기술 개발 과정에서 부딪히는 난관에 대해 엔지니어들이 노하우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다.
이희근 기술개발팀 부장은 "각종 기술 개발에 걸리던 시간이 평균 30% 정도 줄어들었다"고 했다. 또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 쇳물 생산량이 10% 늘어나고, 연간 1300억원의 각종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스스로 자기 업무와 목표를 정해서 발표하기 때문에 몇 시간씩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의 시간을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 하루 평균 10~15분이면 충분해진 것이다. 동료나 부하 직원이 뭘 하는지 알 수 있어 개인·부서 간 정보 교환과 업무 협력이 보다 원활해졌다. 담당자가 없더라도 주변 동료가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수 있었다.
회사와 부서의 목표와 비전이 연·분기·월·주간별로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직원들이 방향을 명확히 알고 따라갈 수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 효과 중 하나다. 회사 입장에서도 핵심 사업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고, 직원 개인은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다 시간만 허비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김군역 혁신지원 그룹장은 "매사 일 처리가 똑 부러지는 사람도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중요한 일을 빼먹곤 하는데, VP를 하면 자신뿐 아니라 동료까지 크로스 체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화이트 보드는 객관적인 실적 평가 자료로도 활용된다. 보드에 나타난 목표와 실제 실행 여부만 보면 개인의 성과를 팀장과 팀원들이 한눈에 비교·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인사에 대한 불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포스코가 최근 직원들을 상대로 VP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65%가 만족스럽다고 답했다. 불만족스럽다는 응답은 13%에 머물렀다. 포스코가 VP를 통한 업무 혁신에 성공을 거두면서 LG전자와 웅진그룹 등 다른 기업들도 벤치마킹해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VP, 직원 관리용으로 변질 땐 오히려 毒!
팀장이 목표설정 강제하면 내부 반발 불러 역효과만…
기업이 포스코의 비주얼플래닝(VP)과 비슷한 제도를 도입할 때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VP를 업무 감독 및 조직관리 도구로 활용해선 안 된다. 이렇게 인식될 경우 직원들의 반발을 초래, 역효과가 훨씬 커질 수 있다.
포스코의 경우에도 VP 시행 초창기에 "회사가 직원들을 통제하고 쥐어짜려는 것 아니냐"는 내부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일부 부서에선 직원들이 구체적인 업무 목표와 내용 공개를 피하면서 '무늬만 VP'로 흐르기도 했다.
포스코는 팀장이 억지로 부하 직원의 목표 설정을 강제하거나, 업무 시행 여부를 일일이 감독하지 않도록 했다. 가급적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김군역 혁신지원 그룹장은 "직원들의 자발적 역량을 믿고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지도,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 직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달 가량 기다리자 '나는 무슨 목표를 정해야 합니까', '내게도 일을 시켜 주세요'라며 나서는 것 아니겠어요."
이희근 제선부 기술개발팀 부장은 "업무를 잘 모르는 신입사원들이 처음엔 VP에 적응을 못 했는데, 몇 주일 지나자 스스로 자기 목표와 할 일을 만들어 오더라"고 말했다. 리더는 상담역을 해야지 지휘관이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자칫 직원들에게 '관리당한다'는 느낌을 주면 그때부터 VP의 생명력인 '자발성'은 사라져 버린다.
단기간에 VP의 효과를 보려 해서도 곤란하다. 포스코는 VP 시행 초기에 업무 낭비 요인과 효율화 요인을 매일 평가했었다. 그러나 평가에 시간과 인력이 더 들고, 직원들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본사 차원의 평가를 중단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