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85]대학도서관들의 장서藏書 폐기 단상
엊그제 듣고 본 뉴스 중에 놀라운 것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안타깝고 씁쓸하기도 한 ‘사건’이었다. 한 지방 대학교에서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 이른바 장서藏書 92만권 중 몇 년 동안 대출실적이 1건도 없는 도서 45만권을 처분(어디에 기증하는 것도 아니고 곧장 용해로溶解爐 폐기)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 소식에 놀란 인문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폐기반대운동을 벌였다는 것. 미래형 도서관(디지털 열람실, 노트북 존 설치 등) 구축을 위한 전면적인 리모델링 차원으로 총장 결재만 남겨둔 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렸다. 어느 대학이든 해마다 도서관 소장도서의 7% 이내는 폐기할 수 있다는 게 도서관법 시행령이라 한다. 하지만, 이 대학의 경우 50%에 육박하지 않은가.
적극적인 교수들이 폐기선고 45만권에 대한 ‘구출작전’을 나서 최종 결재권자인 총장의 이해를 구하고, 폐기하면 안되는 이유들을 적어내는 ‘희비극喜悲劇’을 벌인 결과, 18만권은 ‘기사회생’됐으나, 27만권은 결국 ‘과자상자’에 담겨 용해로를 거쳐 폐기된다는 것. 대학 측에 재선별 이유를 설득하여 38%는 살린 게 성과라면 큰 성과.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니 무슨 상황인지 십분 이해가 가는데도 불구하고, 나같은 아날로그 입장에서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도서기증을 할 데가 마땅치 않은 게 문제이다. 그러나 한번 휴지가 돼버리면, 그 기록이나 자료 등이 영원히 사라져버리는데, 솔직히 진시황이나 연산군이 벌였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도 아니고, 이건 지나친 일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바로 기록의 나라가 아닌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모두 18건.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 중 으뜸이고(중국 15건, 일본 7건), 세계적으로는 독일 30건에 이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다음으로 폴란드와 함께 공동 5위이다.
맨처음 그 소식을 듣고 “미칠 것 같았다”며 대상목록을 다 뒤져 폐기하면 안되는 이유 등을 써 살려낸(일제강점기 한글연구 잡지 등도 있었다) 일부 교수들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터이나, 이번 일을 계기로 소장도서 폐기에 대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같다. 이 뉴스를 언론이 <책의 오디세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듯, 앞으로도 이같은 ‘책의 수난사’는 더 크게 이어질 터인데 사뭇 걱정된다. 아날로그 도서들을 디지털로 전환만 하면 그만일까. 하기야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오프라인시대도 종언終焉을 고한 지 오래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학자들의 지혜의 총화인 저서들이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그저 무심한 전자기기로만 접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까.
아직도 70대 이상의 신문애독자들은 새벽에 잉크맛으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책도 그렇다.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지식과 상식, 교양을 넓히지 않았던가. 소설, 시 등 문학적 향훈을 눈으로만 즐기고 맛보는 것은 어딘가 한 곳이 비어 있는 것같다. 낚시광들이 ‘짜릿한 손맛’을 느끼는 것과 같다면 적당한 비유가 될까. 나로선 컴퓨터 앞 아니면 핸드폰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쩐지 끔찍하다는 생각이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의미를 아시리라. 옛사람의 문집을 만지며 읽는(나는 한문맹漢文盲이므로 읽지도 못하지만) 그윽한 맛을 전자기기로 어떻게 맛보겠는가. 그래서 나는 전자책이 유난히 싫다.
책을 좋아하는 애독자 몇몇의 솔직한 얘기를 듣다 보면 ‘가관可觀’이다. 이사갈 때마다 책 때문에 골머리를 앓거나, 현재 갖고 있는 책들을 정리조차 못하고, 팔 데도, 버릴 데도 없다는 고백을 들으며 서로 공감을 한다. 1천권도 안되는 책을 여러 번 팔거나 고물상에 폐지로 넘겨본 나로서도 그들의 ‘애로사항’을 약간은 짐작한다. 어느 교수는 아예 소장도서만 보관하는 ‘책 아파트’가 있다. 장서가로 유명한 육당 최남선은 17만권을 소장했는데, 한국전쟁때 17만권이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국보에 해당하는 희귀도서도 많았을텐데 민족적 유산의 소실이다.
학자도 아닌 마당에 아무리 책이 좋다고 무한정 사거나 보관할 수는 없는 일.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는 1년에 최소 100권을 읽는데, 여러 번 읽고 밑줄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독서노트에 좋은 내용이나 구절을 적어놓은 후 그 책을 갖고 있지 않고 누구에게나 선물로 주거나 곧바로 버린다고 한다(7권의 독서노트를 뒤져 책 두 권도 펴냈다). 그것은 아주 좋은 방법. 예로부터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거나 ‘책부자가 진짜 부자’라는 말도 있지만, '버리는(천대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도 현명한 지혜를 찾아야겠다. <藏書萬卷可敎子장서만권가교자>가 맞는 말이라 해도, 우리 자식들에게 자신의 책을 버리게 하는 숙제를 남겨줘서는 안되겠다. 예전엔 그게 최고의 교육이었거늘, 할 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