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라는 말은 <다이 하드> 시리즈에서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주인공 존 맥클레인 역의 브루스 윌리스는 12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화려하게 컴백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활약으로 <다이 하드4.0>은 개봉 3주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할리우드의 야심적인 <트랜스포머>와 <해리포터4:불사조 기사단>,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살려 준 <화려한 휴가>와 <디 워>의 틈바구니에서 고군분투한 결과라서 더 값지다. <다이 하드 4.0>의 이모저모를 통해,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생각해보자.
액션 영화와 신화, ‘우리는 닮은 꼴’
“모름지기 액션 영화라면 주인공이 악당들을 닥치는 대로 물리쳐야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특히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액션 영화를 이렇게 정의할는지도 모른다. 골치 아프지 않아서, 시원하고 통쾌해서 재미 삼아 보게 되는 액션 영화 속 영웅들은 힘깨나 쓰는 덩치 큰 바보들에 지나지 않는 걸까?
흔히 말하는 액션 영화란, 오락 활극, 활극 영화, 폭력 영화 등으로 불리는 장르의 명칭이다. 사실 필름 누아르film noir, 프랑스 비평가들이 암흑기를 무대로 한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붙인 명칭에도 액션은 들어 있고, 사무라이 영화나 스파이 영화, 갱스터 영화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 있게 마련이어서 액션 영화는 오랫동안 하나의 장르로 연구되지 않았다. 게다가 폭력 영화라니, 어감마저 좋지 않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다이 하드> 시리즈나 <킬 빌> 시리즈(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리쎌 웨폰> 시리즈(감독 리처드 도너), <라스트 액션 히어로>(1993, 감독 존 맥티어난) 등등, 수많은 영화를 액션 영화라 부른다. 이들 영화는 캐릭터의 심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매혹적인 인간형을 창조하거나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고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등장인물의 선 굵은 행동 그리고 물리적 폭력에 무게 중심을 둔다. 카메라 위치도 자주 바뀌고, 컷이 많아서 화면 전개도 빠르며, 인물의 동작이나 동선을 영상미의 주도니 핵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액션 영화 하면, 고민 없이 볼 수 있는 속 시원한 남성적 장르로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액션 영화는 물리적 폭력이 사건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대다수의 오락 활극, 곧 서부 영화, 무술 영화, 모험 영화, 재난 영화 등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또 특히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경우 선인(善人)과 악당의 대결이라는 플롯을 통해 법과 질서, 가정의 안녕에 최선의 가치를 두는 자본주의적ㆍ부르주아적 시각을 은근히 깔고 있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남자다움과 의리, 용감무쌍함은 액션 영화가, 아니 할리우드와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액션 영웅들 역시 근육질 몸매라고 숭배하거나, 힘자랑만 하는 멍청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신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숱한 액션 영화, <다이 하드> 시리즈를 비롯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반지의 제왕> 시리즈, <더블 타켓>(2007, 감독 안톤 후쿠아) 등의 줄거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바로 서양의 오래된 영웅 신화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ell, 1904~1987)에 따르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영웅 신화는 공통된 구조를 보인다. 먼저, 특이한 출생을 들 수 있는데, 주몽, 수로왕 등이 알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헤라클fp스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는데, 이는 슈퍼맨도 마찬가지이며, 반지 원정대의 리더인 프로도 역시 삼촌의 보호 아래 자라난다.
이처럼 특이하게 출생한 영웅은 현실 세계인 고향을 떠나 온갖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영토를 여행한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소임을 거부한다. 신의 명을 어긴 뒤 거대한 미궁을 지은 미노스 왕1이나, 부왕의 권유에도 한사코 결혼을 뿌리치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카마르 알차만 왕자, 절대 반지를 거부하는 프로도의 경우처럼 말이다. 임무를 방기放棄,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음할수록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명(召命)을 받아들이고 나면 영웅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곁에는 길을 안내하는 요정이나 까마귀, 하다못해 물을 대신 길어다 주는 두꺼비라도 있게 마련이다.
액션 영화가 버디 영화buddy film, 극적 갈등과 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힘을 주는 두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의 형태를 띠면서 주인공이 다른 인물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영웅 신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 또는 머큐리이고, 이집트의 경우는 토트이며, 기독교에서는 성령(聖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결국 영웅은 용과 싸워 이기고, 고래배 속에서 탈출하며, 세이렌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죽게 했다는 바다의 요정의 유혹을 이기고 임무를 완수한다. 이때 이들이 부상(副賞)으로 얻는 공주나 황금 양털, 성배聖杯,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에서 썼다는 술잔는 귀중한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상징한다. 이렇듯 남다른 면모를 지닌 영웅이 고향을 떠나 온갖 모험을 겪고 얻은 지혜를 세상에 나누어 주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액션 영화는 ‘변형된 영웅 신화’인 셈이다.
<다이 하드>, 액션 영화의 새 장을 열다
자, 그렇다면 의미심장한 사회학과 영웅 신화의 측면에서 <다이 하드 4.0>(2007, 감독 렌 와이즈먼)을 살펴보자. 20세기 폭스 사(社)의 로고가 꺼지면, 컴퓨터 그래픽이 삭제되듯 타이틀이 뜬다. ‘다이 하드 4.0’ 테러 시대의 영웅, 욕 잘하고 잘 웃는 인간적인 경찰, 죽이기 어려운 질긴 놈, 브루스 윌리스가 돌아온 것이다.
1988년의 <다이 하드>(감독 존 맥티어난)는 액션 영화의 역사를 가른 작품이다. 이 시기의 액션 영웅인 장 클로드 반담과 스티븐 시걸,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다들 지나치게 심각한 표정과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소유자로, 악당들을 번쩍들어 던져 버린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힘을 역기에 죄다 쏟아 부은 것 같은, 처자식 없는 총각이었다.
그러나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은 달랐다. 그는 그 옛날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2처럼, 고향 뉴욕을 떠나 생판 낯선 로스엔젤레스의 고층 빌딩에서 인질로 잡힌 아내를 위해 싸운다. 그에게는 이전의 액션 영웅들처럼 지구를 구한다는 대의명분도, 화기(火器)로 중무장도니 방탄조끼도 없다. 러닝셔츠 하나만 달랑 입고, 맨발에 피가 나서 쩔쩔매며 ‘죽도록 고생하는’ 액션 히어로의 새로운 전형인 것이다. 사실,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처럼 클로즈업이 번번한 액션 영웅도 없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총을 마구 갈겨 대는 그의 모습 뒤에는 무언가 인간적인 감정을 잡아 둔, 맨 얼굴의배우 브루스 윌리스의 매력이 도사리고 있다.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상황에서 고군부투하는 그는 서부극 카우보이의 맥을 잇는 캐릭터로 거듭났고, 이로써 <다이 하드>는 유들유들한 유머와 인간적인 면모를 가미한 새로운 액션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이전의 액션 영웅들이 근육질 몸매나 화려한 무술로 관객을 압도하는 ‘몸의 영웅’ 내지 ‘기술의 영웅’ 이라면, 존 맥클레인은 빠른 두뇌 회전과 유머 감각, 끈끈한 가족애로 무장한 훨씬 ‘인간적인 영웅’ 이다. 신화 속 영웅의 이미지를 현실의 인간상과 결합시킨 그의 매력은 1980년대의 관객들에게 참신하게 다가갔다. 이와 비슷한 전략으로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새로운 액션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가 바로 멜 깁슨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전설적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일대기인 <브레이브 하트>(1995, 감독 멜 깁슨), 미국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패트리어트 : 늪속의 여우>(2000,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에서 보듯, 그는 브루스 윌리스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원형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여, 영웅 아이콘에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디지털 테러에 맞서는 아날로그 영웅
새롭게 단장한 <다이 하드 4.0>의 경우에도 고민은 있었다. 1편이 나온 지 20년이나 지난 지금, 바야흐로 유비쿼터스ubiquitous, 사용자가 어디서나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 통신 환경시대를 맞아 디지털의 문이 활짝 열렸으렷다. 브루스 윌리스도 환갑에 가까운 나이, 그러니 <다이 하드 4.0>의 고민은 악당 가브리엘(티모시 올리펀트 분)이 내뱉는 대사, “맥클레인, 자네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야!” 라는 말로 압축된다. 하여, 영화는 <다이 하드>보다는 오히려 <매트릭스> 시리즈에 가깝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테러를 배경으로, 악당들에 맞서 싸우는 늙은 형사를 다시금 불러들인다. 한마디로 <다이 하드 4.0>은 9ㆍ11테러 이후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액션 영화’ 인 셈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 컴퓨터 해킹 용의자들이 하나씩 죽어 간다. 존 맥클레인은 그중 한 명인 매튜 패럴(저스틴 롱 분)의 집을 찾았다가 무장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정부의 네트워크 전산망을 파괴해 미국을 장악하려는 전(前) 정부 요원 토머스 가브리엘이 디지털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교통와 통신이 차례로 마비되자, 존 맥클레인은 테러를 막기 위해 패럴과 짝을 이루어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며 우기의 순간을 맞는다. 그 와중에 존 맥클레인의 딸 루시가 가브리엘에게 인질로 잡힌다.
사회학적 시각으로 볼 때, 1988년의 <다이 하드>가 그 당시 세계 시장에 파상 공세를 퍼부었던 일본의 자금력에 대한 두려움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면, 컴퓨터로 모든 것을 조작할 수 있는 오늘날의 <다이 하드 4.0>은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의 근심을 다시 한번 건드린다.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감옥의 설계자가 감옥을 탈주하듯이, 시스템 설계자가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악몽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문을 몽타주해 만든 악당의 메시지에서 재치있게 표현된다. 부시가, 케네디가, 레이건이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이 장면은 편집의 힘을 빌려 미국이라는 기호를 우스꽝스럽게 전복시킨다. 악당의 타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데이터이고, 미국 영토가 아니라 시스템 마비가 불러올 공황 상태인 것이다.
물론 액션 영화답게 화끈한 화력을 자랑하는 폭발 장면, 고난도 스턴트와 첨단 컴퓨터 그래픽도 빼놓을 수 없다. 관객들의 아드레날린이 더욱 솟구치도록, 소화전의 물이 솟구쳐 공중의 헬기를 떨어뜨리고, 하늘로 휙 날아간 자동차가 헬기와 공중에서 충돌한다.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다이 하드 4.0> 역시 이제 게임에 가까운 폭발 장면들이 즐비하고, 메가 트럭과 전투기까지 등장하여, 잠시도 액션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한편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패럴은 영웅 신화 속 조력자에 가깝다. 그가 처음 만난 존 맥클레인에게 “부술 것 더 줄까요?” 라고 물은 뒤 아파트가 난장판이 되는 은근한 유머도 재미있지만, 이윽고 둘은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신화에서처럼 미국 전역을 헤맨다.
존 맥클레인, 그의 ‘다이 하드’ 한 매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다이 하드 4.0>은 과거의 <다이 하드> 시리즈, 특히, 1편의 스릴감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이는 결코 부쩍 늘어난 브루스 윌리스의 주름살에 대한 회한 때문만은 아니다. <다이 하드 4.0>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악당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과거 이 시리즈에서 앨런 릭맨이나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았던 악역은 얼음처럼 차가운 마성(魔性)이 깃든, 한 마디로 ‘필이 꽂히는’ 캐릭터였다. 사실, 이 영화 특유의 날이 선 긴장감 또는 주인공의 따스한 유머 감각은 악당들의 냉정함이 있었기에 더욱 빛이 났던 것이다. 아! 헥토르 없는 아킬레우스3를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다이 하드 4.0>의 새로운 악당 티모시 올리펀트는 너무나 개성이 없다. 차차리 그의 애인인 ‘악당녀’ 메이 린을 연기한 매기 큐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더 시선을 끈다.
그래서 의외의 반전 없이 줄곧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물량 공세로 승부하는 <다이 하드 4.0>은 여전히 브루스 윌리스 한 사람에게 기대어 외가닥 작전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다. 어린 해커에게 “네가 말하는 시스템이 조국이야.” 를 외치는 늙은 노장의 기백. 그리고 액션 영웅이 다시 일깨워 주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족애라는 전통적 가치. 거기에다 “당신은 터프한 게 아니라 바보 같아요.” 라는 파트너의 말에 “바보? 아니 섹시한 거지.” 라며 곧 죽어도 ‘자뻑’의 미학을 버리지 못하는 질긴 자존심까지.
<다이 하드 4.0>은 이 시리즈의 ‘다이 하드’한(좀처럼 죽기 어려운) 매력이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정립한 존 맥클레인이라는 캐릭터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 이야기가 아니라, 디지털 효과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날로그 스타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자, 그러니 액션 영화으 왕팬이라 자처하는 독자 여러분, 액션 영화를 볼 때 거기에 담긴 장르적ㆍ사회적ㆍ신화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요리조리 퍼즐 맞추듯 감상하는 것이 어떨까? 속시원하고 재미 만빵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릴까지 맛보게 해 주는 액션 영화. 그러나 다른 모든 영화와 마찬가지로 액션 영화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된다.
주 1.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 제물용으로 아름다운 황소를 주었지만, 황소가 마음에 든 미노스는 신들에게 바치지 않았다. 놓나 포세이돈은 왕비 파시파에가 황소와 정을 통하게 했고, 그 결과 머리는 소이며 몸은 사람인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이에 미노스는 유명한 장인(匠人)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짓게 하여 미노타우로스르 거기에 가두었다.
2. 오디세우스는 이타케 섬의 왕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을 도왔다. 그가 전쟁이 끝난 뒤 군사를 이끌고,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대서사시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다.
3.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는 트로이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리고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헥토르가 자신의 친구를 죽인 데 분노하여 출전했다. 트로이군이 패하여 성안으로 도망쳤을 때, 헥토르는 혼자 성 밖에서 싸우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그의 장례식을 끝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