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로카시아
김규련
거실 한 켠에 관엽식물 한 그루가 서 있다. 풍성한 잎새와 치열한 기세와 진한 녹색은 살아 있는 하나의 풍경이다. 부챗살이 깔려 있는 선명한 잎맥은 화사한 꽃 못지않게 관상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하트형의 특이한 모양에다 토란잎 같은 큰 잎새 그리고 아름다운 기상은 탈속의 기품을 지녔다고 하리라.
강렬한 생명력으로 집 안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는 알로카시아. 너는 언제나 천지의 마음을 고스란히 잉태하고 있다. 너를 보면 마음속에 숨어 있던 봄이 찾아와 아련한 세월의 향수를 즐기게 된다.
가랑잎이 물에 떠 흐르듯 나는 이제 팔순 후반의 강기슭을 스치고 있다. 그간 수많은 희비의 여울목을 헤쳐 나기도 하고 부침浮沈의 강변을 겪기도 했다. 한데도 청춘의 감성은 아직도 살아 있어 어쩌다 갈망과 사랑과 그리움으로 심란할 때도 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정감情感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 그렁거리기도 한다. 이럴 때 의연한 너의 자태를 바라보면 허전하고 황량하고 외로운 마음이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너의 청순한 모습, 밝고 맑은 숨결, 그윽한 숨소리는 집 안 공기를 말끔히 정화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망념妄念까지도 깨끗이 씻어 주기도 한다.
식물에는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는 보고 듣고 느끼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소중한 영혼靈魂이 있다고 했던가. 땅에는 생혼의 식물이 있어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이어간다. 생혼이 무성하지 않으면 지상은 죽음의 황무지가 되고 만다. 동물의 각혼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슬기로울 때도 있다. 천재지변을 미리 알고 안전지대로 옮겨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실존의 차원을 넘어 있는 정신세계이다. 알로카시아가 오늘따라 문득 이런 진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나의 알로카시아여!
오늘은 진종일 거실에서 너와 더불어 놀다가 드디어 나도 한 그루 알로카시아가 되었다. 너를 속 깊이 만나 말을 걸어 보려고 한다.
너와의 만남도 인연 때문이라고 할까. 몇 해 전 내가 무슨 문학상을 탔을 때 행운목 화분 하나가 축하 선물로 들어왔다. 이듬해 겨울 하룻밤 실수로 얼어죽게 했다. 너무 아깝고 죄스러웠다. 줄기만 남은 화분을 거실로 옮겨 놓고 살려 보려고 정성을 다했다. 하나 부질없는 일. 행운목은 소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아기 손톱 같은 떡잎 하나가 싹 트기 시작했다. 신비롭게도 그것이 초등학교 하급생의 키만큼 자라나서 오늘의 알로카시아가 되었다.
너에게는 생기生氣, 활기活氣, 윤기潤氣, 화기和氣, 정기精氣의 기운이 늘 넘치고 있다. 너를 볼 때마다 이 기운이 파동을 일으켜 내 몸속으로 파고 든다. 노쇠한 심신에 원기를 불어넣어 줘서 늘 고맙다고 하리라. 네가 보듬고 있는 침묵의 언어를 해독하고 싶구나. 너의 언어를 인간의 문자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는 것이 늘 한스럽다. 오독誤讀의 만용蠻勇을 무릅쓰고 시도해 본다.
너는 어떤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상無相의 지혜가 있는 것 같다. 너는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무념無念의 슬기가 배어 있는 것 같다. 너는 세상의 선악, 귀천, 미추를 공空으로 돌리고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않는 무주無住의 사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크게 깨친 한 선지식善知識이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하산한다. 근엄한 얼굴이 알로카시아 잎새 사이에 어른거린다. 이번에는 노장老壯같은 도인道人이 등장한다. 알로카시아 잎새 숲 속에 좌정해서 조용조용 말씀하신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펼치지 않는다.
기지機智로 천하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총명聰明으로 실없는 것 구하려다 덕德에 누累를 끼치지 않는다.
재미가 쏠쏠하고 흥미가 진진하다. 어디서 선객仙客이 나타나서 선지식과 도인과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권력과 명예, 사치와 부를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은 청렴하다.
그것을 가까이 두고도 이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청렴하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고상하지만 알고도 쓰지 않는 사람은 더욱 고상하다.
터무니없는 환각이다.
알로카시아에 매료되어 잠시 넋을 잃었던 것 같다. 환각도 지나치면 노망老妄이 된다. 노망은 치매의 초기 증상이 아니던가. 겁이 덜컥 난다.
흩어진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알로카시아를 다시 차분히 응시한다. 알로카시아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한 그루 식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