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구마를 다 캤으니 서리가 와도 걱정이 없다.
새벽시간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지붕에서 이슬 떨어지는 소리가 났었는데
오늘은 조용했다.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이층에서 내려다 보니 지붕이 하얗게
온 서리가 나를 밖으로 불러 냈다.
새벽시간은 그래도 좀 푹 쉬고 한시간만 나가서 일하고 들어 와야지 했는데
고들빼기를 보니 또 발동이 걸려서 산을 두개나 넘어 가면서
한자루 뜯어 가지고는 서리 온 날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내려 왔다.
내가 그러고 왔는데도 남편은 그제서 일어 나서는
혼례식에 점심이 가까와 가면서
<오늘은 좀 쉬시오~>
하고 갔다.
그런데 항아리에 발효 시켰던 것들을 들여다 보니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일에 발동이 걸려서 봄부터 담아 놓았던 발효액들을 걸러 댔다.
점심 때가 되었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하고
기침과 기관지에 좋은 효소들을 언제부터 해 달라고 기다리는 지인들이 많은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다 해 치웠다.
이제 병에다 주입만 하면 된다.
산골의 가을해는 너무 짧아서 정말 쓸 것이 없다.
지지난주만 해도 세시 반까지는 같이 있어 주었던 노루꼬리만한 해가
3시도 안 되었는데 서산 뒤로 넘어 가 버렸다.
해가 지면 마음이 편하질 않다.
그렇지만 일 하는 손은 언제나 빨라진다.
봄에 담아 두었던 돼지감자와 우엉 거른것도 액을 걸러 내고
고추장에 버무려 장아찌를 담았다.
요럴 때는 누가 옆에서 행주 하나만 집어 주어도 큰 도움이 되는데
혼자 하려니 장갑을 벗었다 끼었다
사진 하나 찍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렇게 종일 허리가 아프게 일을 하고 저녁 무렵 항아리 가를 행주로 싹싹 닦고
뚜껑을 덮어 숙성을 기다리는 일을 하니 마음이 흐믓하다.
항아리에 들어 앉은 장아찌들이 마치 보석을 넣어 놓은 것 같다.
벼르던 여러가지 효소 거르는 일을 다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다 되어 간다.
닦아 야 할 항아리가 20개도 넘게 우물가에 나래비를 섰다.
옛날 같으면 밤을 세워서라도 그 일을 다 해야 잠을 자고 그 다음날은 몸이 아파서
쩔쩔 매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그 일은 내일 해도 되고 열흘 있다가 해도 누가 뭐라지 않는다는 것을 ......
아니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서 일하던 장화를 씻고 손을 털었다.
좀 늦게 온 남편이 내가 일 해 놓은 것을 보더니 눈이 뚱그레졌다.
일 많이 한 것을 알기에 저녁으로 간단하게 멸치볶음 넣은 김밥에
달걀 후라이만 해 주었는데도 맛있게 먹어 주고는 상을 들어 아래층까지
가져다 주었다.
남편과 내가 10년만 전에 서로를 이렇게 맞추어 줄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두번 사는 인생은 없기에
늘 새롭게 깨닫고 아쉬워 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그 아쉬움을 달랜다.
오늘은 주일~
어느새 가을이 깊어져 우리교회 십자가 창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노랗게 물이 들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점심을 해 먹는데
오늘은 마을 수도가 고장이 나서 어제 저녁부터 물이 안 나왔댄다.
어르신들은 주일에 모여서 밥 드시는 재미를 손에 꼽는 재미로 아시는데,
그냥 돌아 가시라고 하기가 민망해서 목사님과 상의하여 읍내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차 석대에 나누어 타고 온 교인이 다 생각지도 않은 나들이를 하는 셈이다.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은 별것 아닌 나들이도 무척이나
마음 설레고 좋아 하신다.
어느새 강물빛도 달라지고 단풍이 물든 얕은 산의 단풍들은 그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아름다운 반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치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멀리 단풍놀이를 가지 않아도 길 양옆으로 물든 단풍들이 너무 예뻐서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 교회 주일학생인 한샘이는 우리 트럭에 타는 것을 제일 좋아해서
오늘도 우리차에 탔다.
가다말고 남편 아무렴이 한샘이에게 질문을 한다.
<한샘아 너 이 새로 생긴 길 가 보았어?>
<그럼요 어제 엄마하고 읍에 가면서 가 보았지요>
<어제 갔단 말이지 난 벌써 그제 그제 가 보았는데
내가 훨씬 빨리 갔다 ㅎㅎㅎ>
한샘이가 지지 않고 말했다.
<나도 사실은 전번에 갔을지도 몰라요
우리 학교차가 이쪽까지 오니까 갔을 수도 있어요>
<나는 이 길의 문을 열자마자 밤부터 갔어~>
한샘이랑 둘이 서로 먼저 가 보았다고 야단인 것을 보니 둘이 다 수준이 똑같다.
이 곳의 길 공사가 거의 2년이 걸렸는데 지난 수요일인가 일하고 오다 보니까
개통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역방향에서 오고 있었는데 그 새로 생긴 길이 궁금해서
남편은 다시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달려 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
종일 밭에서 일하고 피곤하고 힘들어서 얼른 집에가서
씻고 잤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거꾸로 달려 가고 싶을까 모르겠다.
그 때 내가 딱 한샘이 수준이라고 웃고 말았는데
역시나 한샘이 수준이다.
수준이야기가 나와서 한가지 더 할 이야기가 있다.
지난번에 점심을 먹고 나서 이야기 장단이 펼쳐졌다.
동그란 두 상에 나누어 점심을 먹었는데 앉다 보니까
남자, 여자 이렇게 패가 갈려서 앉았다.
남자분들 상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해 먹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자들 상에서도 역시 물고기 이야기가 나왔다.
한샘이는 아이들이 없으니 자연스레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 드는데,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것이 정말 많다.
그러면서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인다는 물고기
유리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물고기는 열대어 이면서 요즘은 관상용으로 키우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쁘겠다고 하면서 동화 이야기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 아무렴이 끼어 들었다.
<한샘아 그 유리메기 맛있어?>
<꺄악~ 정말 수준 안 맞아서 못살아요~
그 이쁜 걸 먹을 궁리를 하다니......
난 이제 말 안해요~~~~>
그렇게 수준 안맞아 이야기를 안한다고 하지만
늘 또 옥신각신 아이들마냥 한참씩 이야길 한다.
또 전번에는 여럿이 모여서 텔레비젼 다큐프로그램을
보기로 했다.
설 특집으로 환경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지리산 산골에서 오래 된 초가집에 홀로 사시는 70세 할머니와
닭, 개, 병아리, 다람쥐, 고라니, 사마귀등
동화마냥 그렇게 어울려 사시는 모습을 2년여에 걸쳐 촬영한
다큐가 있었다.
아름다운 사계절은 물론이고 할머니는 허기져서
쓰러져 있는 고라니 새끼를 집으로 업고 와서
우유를 먹여 회복시켜서 다시 업어다 산에다 데려다
주기도 하고 산짐승들이 먹으라고 소금도 싸 들고 가서
산에 놓아 주기도 하는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가을밤에 별들은 또 얼마나 이쁜지 나 혼자 본것이 아쉬워서
여럿이 모였을 때 다시보기를 해서 같이 보게 되었는데
그 때도 여자 남자 따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보았다.
여자들은 할머님의 감성과 촬영한 이의 수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남자들은 거기 맑은 계곡물에 있는
개구리와 산천어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으면 맛있겠다고
침 흘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도 한샘이가 벌떡 일어나서
<정말 수준 안 맞아서 못 놀겠네~>
하고 말했었다.
한샘이만 그런게 아니라 같이 있던 여자들이 모두들 그렇게 말했지~
그 다음에는 서로 밤고구마가 맛있네 호박고구마가 맛있네 한참 옥신각신 하더니
이번에는 한샘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 값은 누가 내는 거에요?>
한샘이는 좀 수준있고 어른스러운 심각한 질문은 나에게 하고
자기 수준의 것은 남편 아무렴에게 물어 본다.
<그건 왜 ?>
<그냥 궁금해서요>
<그냥 궁금한게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말해 줘야 나도 대답을 할래~>
갑자기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으니 계획에 없던 일이다.
산골교회라 늘 재정이 넉넉치 않으니
밥 한끼를 먹어도 선뜻 사 먹기가 그렇다.
오늘은 그래서 이왕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목사님도 어르신들도
맨날 드시는 것 보다는 평소에 잘 못 먹는 좀 귀한 음식인 회를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를 모았다.
점심에는 저녁 보다 거의 반값에 가깝게 하는 집이 읍내에 있었다.
물론 여유가 없었지만 마침 어떤분이 우리내외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보내주신 금일봉이 있어서 목사님에게 내 놓고
교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재정에서 조금만 보태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마치 한샘이가 목사님과 내가 한 이야기를 들은 것 마냥 물어 보니
조금 당황을 했다.
그러자 한샘이가 그 이유를 말한다.
<어쩐지 오늘 점심 값을 우리엄마가 낼까봐 걱정이에요~>
<왜? 너희 엄마가 내면 안되니?>
<우리집 요새 돈 쓸일이 많아서 돈도 별로 없는데
아침에 엄마가 그랬단 말이에요
"아이구 갑자기 물이 안나오니 점심은 천상 우리가 사야겠네"
하구요 그런데 이렇게 비싼 회를 먹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요>
금방 남편과 옥신각신 하던 한샘이는 어디로 가고
금새 스물몇살 먹은 우리 아들 보다 더 성숙한 걱정을 하고 앉아 있다.
우리는 너무 수준 높은 아이와 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 같다.
수준이야 어찌 되었든 어르신들도 좋아하고 입덧 때문에 오랜동안 친정에 가 계신
사모님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 하던 목사님도 잘 드시고
덕분에 우리까지 잘 먹었으니 물이 안 나온 것이 전화위복이 아닐지.....
첫댓글 그럴때도 있어야겠지요 ㅎ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