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 또는 좌도 우도 아니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무조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못난 자들은 1970
년대의 대마초 사건을 주저 없이 ‘박정희의 대중예술 탄압’이라고 매도한다. 과연 그럴까? 조용필은
박정희 시대가 끝난 지 20년도 더 지난 김대중 정권 때, SBS TV에 출연하여 철부지한 객기였다고 솔
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합법적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대마초를 단속한다고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던 전인권은 대표곡 <걱정 말아요 그대>가 표절시비에 휘말리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급기야 독일로 가서 원하는 보상을 해주고 오겠다며 꼬리를 내렸다. 이런 자들이 있기
때문에 대마초를 엄격하게 단속했던 것이다.
물론 단속이 지나친 면도 있었다. 첫째는 당국이 너무 요란하게 떠벌려 해당 연예인의 명예를 실추시
키고 지나친 불이익을 안겨준 점이다. 수갑을 찬 채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은 살인자의
수갑도 감춰주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분명 지나쳤다. 5년 간 방송 출연과 무대활동을 금지시킨 징벌
도 과했다. 판권이나 인세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생계가 막혔던 것이다. 우리가 자랄 때
만 해도 삼 농사를 짓는 집이 흔하여 나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삼 껍질 벗기는 일을 거들어주고 지렆
을 얻어다가 장난감을 만들곤 했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어른들 가운데는 마른 삼잎을 담배 대신 피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모습에 익숙한 우리 세대로서는 대마초 단속이 좀 지나치게 보이기도 했다.
1년 단속에 무려 1700명이나 걸렸는데, 그 가운데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 널려 있는 대마초를
피워온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둘째는 언론이 대마초를 흡연한 연예인들의 신상을 지나치게 과장 보도했다는 점이다. 전체 관련자
가운데 연예인은 10% 미만이었는데, 신문기사를 보면 마치 연예인들만 대마초를 흡연한 것처럼 온
통 도배가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75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인 7면을 보면, 윤형주‧이장희‧
이종용이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끌려가는 모습과 기사가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곧이어 신중현‧김
추자 등도 대마초 흡연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 중죄인처럼 수의를 입은 채 법정에 서 있는 모습도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벌금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재판이 끝나는 즉시 풀려
났다.
대마초 사건에는 씁쓸한 뒷얘기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외동아들 박지만(1958년생)은 윤형주(1947
년생)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을 즐겨 들었는데, 1971년 아버지의 생신을 맞
아 축하곡을 들려달라고 엽서를 보냈다. 이게 인연이 되어 윤형주와 박지만은 자주 서신을 나누고 종
종 만나기도 하는 등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경호원의 보고를 통해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박지만이
대마초를 피웠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이 진노하여 경찰에 대마초 특별단속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잡혀 들어온 연예인이 윤형주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마초
를 피운 연예인들이 표적이 되어 밀수범보다 더 중죄인처럼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이다.

금지곡이 많은 가수들이 대마초사건에도 잘 걸려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미운털’이 박혔다는
얘기다. 신중현의 <미인>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하는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적
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담당공무원이 연애경험이 없는 게 분명하다. 김추자의 <거짓말이
야>는 제목과 가사가 사회 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그건 너>는 가사가 저속하고 퇴폐
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는 구절의 ‘너’가 대통령을 가리
키는 불경스런 뜻을 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이들은 대마초
단속이 시작되자 곧바로 구속되었다.
대마초 연예인들을 시국의 희생자들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마초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한 1975
년은 월남이 패망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월남
전 파병 명분이었던 도미노이론에 따르면, 월남이 패망하면 소련의 관심이 휴전선으로 쏠려 우리나
라도 적화통일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긴급조치 제9호를 발령하여 대학
에 경찰을 상주시키고 집회와 시위를 엄금하는 등 국민의 입에 단단히 자물쇠를 채웠다. 하필 이때
박지만이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아버지에게 보고되었고, 박 대통령은 이를 윤형주의 영향으로 보고
대마초 엄단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대마초 사건을 대중가요의 무덤이라고 보는 비관적인 견해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평론가들
도 있었다. 대마초 가수들의 노래보다는 나훈아의 <고향역>이나 남진의 <임과 함께>에 열광하는 대
중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록에 트로트를 살짝 얹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오동잎><사랑만은 않
겠어요>도 잇달아 히트를 쳤다. 즉 대마초 사건이 없었더라도 그들이 주로 부른 포크송은 거품이 빠
져 시들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강변 가요제》《대학 가요제》《해변 가요제》 등이 생겨 구창모‧
김수철‧배철수 등 신세대 가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어 대마초사건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이내 사라졌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의 급류를 타고 한 시대가 10‧26사태
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한서희
연예인들과 대마초의 악연은 전혀 의절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지난 3월에는 한 연예기획사의 연습
생 한서희 양을 대마초 흡연혐의로 수사하던 중, 한 양이 ‘빅뱅 소속 가수 탑의 집에서 그와 함께 세
차례 대마초를 흡연한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 선배를 물고 늘어진
걸로 보아 아마도 탑이 性的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한 양을 끌어들인 듯하다. 지난 6월에는 브아걸의 가
인 양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옛 애인 주지훈의 친구로부터 대마초 흡연 권유를 받은 적이 있
다’고 폭로했다. 가인 양이 본인의 이미지 손상까지 각오하고 오래 전 일을 새삼 들춰낸 걸로 보아 거
기에도 性的 사연이 얽혀 있는 듯. 대마초를 피든 설리처럼 열심히 바람을 피든, 꽃다운 청춘도 머잖
아 다 지나가리라.

주마간산 격으로 이야기를 마치려니 유독 걸리는 가수가 한 사람 있다.
5년 전에 타계한 조미미(1947~2012)다. 1965년 <떠나온 목포항>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조미미는
<님이라 부르리까><동창생><먼 데서 오신 손님><바다가 육지라면><서산 갯마을><선생님> 등
주옥같은 히트곡으로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음색이 부드럽고 스펙트럼이 넓어 나훈아 남진 오기택 등 정상급 남자가수들과 입을 맞춘 듀엣 곡들
도 크게 히트했다. 조미미는 특히 한국적 미모를 지닌 우리 또래의 여자가수로서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가사와 곡이 이미자와 비슷하여 생전에는 끝내 그 탈세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미미는 2012년 아픈 데도 없이 체중이 심하게 빠져 병원에 갔다가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겨우 두 달을 버티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상을 뜨기에는 66세의 나이가 좀 이른 것 같아
짚어봤다.
이영미 지음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해설 끝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사먹는것은 입맛이 없다고 하는 손녀 맛타령으로 세번째의 삼계탕을 끓여다 갔다준 말복 아침입니다. 덥고 힘든 일이지만 잘 먹으니 이또한 재미가 있어 즐겨하는 과잉사랑? 입니다. 국가안전처의 재난경보가 끊임없이 오는 요즈음 입니다. 피서에 각별힌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