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수출 호재’ 공식 무너져… 원자재값 급등에 효과 상실
[고환율 비상]
에너지-부품 등 수입가 대폭 상승
中 저가공세에 가격 경쟁력 밀리고 수출 늘어도 손에 쥐는 이익은 적어
“원자재 수입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산업 체질 개선해야” 지적
환율 1371.7원… 또 연고점 경신
고환율=수출 호재’ 공식 무너져
인도네시아와 중국, 베트남 등에서 펄프를 수입해 키친타월과 화장지를 만들어 미국 등에 수출하는 중소기업 대표 A 씨는 올해 수출이 지난해보다 70%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가뜩이나 비싼 원자재 수입 가격이 더 크게 뛰었기 때문이다.
A 씨는 급등한 원자재 값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의 경쟁업체들은 반대로 저가 공세를 펼치면서 A 씨의 기존 거래처들을 접수해 나갔다. A 씨는 “펄프 가격이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50% 넘게 올랐는데 환율까지 올라 달러로 사오려면 사실상 값을 두 배로 치러야 할 판”이라며 “가격 경쟁에서 밀려 거래가 끊긴 곳이 이미 여러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은행이 먼저 중국 펄프 업체에 달러로 대금을 주고 우리가 은행에 3개월 뒤 달러를 갚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3개월 새 환율이 오르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생겼다”고 털어놨다.
고(高)환율이 한국 기업에 ‘축복’으로 불렸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환율 급등으로 원자재 수입 비용이 크게 늘어난 데다, 수출 경합국의 통화 가치도 동반 하락하면서 가격 경쟁력 제고 효과를 누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간 70원 넘게 급등한 환율은 6일도 전날 종가보다 0.3원 오른 달러당 1371.7원에 거래를 마치며 또다시 연고점을 경신했다.
○ 원료 수입 비용만 오르고 수출 효과는 미미
고환율은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다. 하지만 올해 무역수지는 수출이 둔화하고 수입이 급증한 영향으로 역대급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환율 급등으로 에너지와 부품 등 생산 요소의 수입 단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소형 가전제품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는 업체 대표 B 씨는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회로나 센서 등 부품 가격이 크게 올랐다”면서 “그런데 막상 일본 거래처는 ‘엔저 시대라 달러로 당신네 제품을 사려면 엔화가 너무 많이 드니 가격을 내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생산 비용이 오르는데 제품 가격은 내려야 하다 보니 B 씨 입장에서는 마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B 씨는 “결국 올해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원자재 가격이 20% 오르다 보니 이익은 적었다”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환율 쇼크에 아예 문을 닫기도 한다. 경상도에서 포장용 종이박스를 만드는 업체의 C 대표는 올해 3월 환율이 1200원대로 올라서자 더 이상 해외 납품 단가를 맞추기 어려워 폐업했다. 원자재를 수입해 중간재를 만들어 납품하는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은 대부분 영세기업이라 생산 비용이 올라도 해외 거래처를 상대로 납품 단가를 올리기가 어렵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6월 중소기업 508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환율 급등으로 피해가 발생했다고 답한 기업은 30.5%나 됐다. 이익이 발생했다는 기업은 19.1%에 불과했고, 50.4%는 영향이 없다고 응답했다.
○ “환율 상승으로 이득” 20%도 안 돼
이런 현상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환율이 오르면 기업 입장에서는 원재료 매입 비용이 급등하고 달러 부채나 투자 비용이 오르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달러로 유류비와 항공기 리스료를 지불하는 항공업계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수출을 늘리는 효과는 이전보다 미미하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2000년 이후 올해까지 무역 실적을 분석한 결과 원자재 가격과 환율이 각각 10% 상승하는 경우 수입은 3.6% 증가하지만 수출은 0.03% 늘어나는 데 그쳤다.
대한상공회의소 자문위원인 정혁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은 원자재를 수입해 와서 제품을 만들고 해외에 파는 수출 구조이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 사슬’에 크게 의존한다”며 “반도체나 조선, 자동차 등 원료와 중간재를 수입해 오는 업종은 고환율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현금을 확보하는 등 급격한 환율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강력한 통화 긴축이 이어지면서 환율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소재나 부품, 장비 등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도록 한국 경제와 산업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준 기자, 박민우 기자
고환율 지속땐 고물가-고금리도 부채질
[고환율 비상]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플레 유발… 물가안정 위해 금리 인상 불가피
경기회복 늦추고 가계 이자부담 쑥… 고물가속 침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가파른 환율 상승은 기업들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와 가계 살림살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환율이 고물가와 고금리를 야기함으로써 경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분석이 많다.
부작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물가다. 고환율은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인플레이션에 악영향을 준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8월 5.7%로 전달에 비해 다소 내려왔지만 하반기 환율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고물가 추세가 장기화될 우려가 크다. 이 경우 한국은행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에 더욱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한은의 고강도 긴축은 경기 회복을 늦추고 서민 가계의 이자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된다.
환율 상승은 외환보유액 등 건전성 지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급등하는 환율을 막기 위해 외환당국은 달러화를 시장에 매도하는 실탄 개입을 반복해 왔고, 이로 인해 외환보유액이 1년도 안 돼 300억 달러 이상 급감했다. 외환보유액 감소로 단기외채 비율도 10년 만에 가장 높은 41.9%로 치솟았다.
이런 대외건전성의 악화는 최근 무역적자 행진과 맞물려 환율 상승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 올 1∼8월 누적 무역적자는 247억2000만 달러로 1956년 무역 통계 작성 이후 66년 만에 최대다. 과거에는 고환율이 한국 기업들의 수출 확대로 이어졌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적자만 쌓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과 같은 고환율 국면은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대외 신인도가 하락해 환율이 다시 상승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민우 기자
中-日 등 수출경쟁국 통화도 약세… 韓 가격경쟁력 뚝
[고환율 비상]
美 긴축에 달러화만 ‘나홀로 강세’
“현금 확보해 불확실성 대비해야”
한국 기업들이 고환율에 따른 수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로는 다른 수출 경쟁국의 통화가치도 함께 떨어진 점도 크다. 미국 달러화가 중앙은행의 고강도 긴축으로 전 세계에서 ‘나 홀로 강세’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 급등에 따른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가 상쇄되고 있는 셈이다.
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이달 5일까지 15.07% 하락했다. 같은 기간 일본 엔화 가치는 22.01% 떨어졌고, 영국 파운드화(―15.12%)와 유로화(―12.77%)는 물론이고 반도체 수출 경합국인 대만 달러화(―10.50%)도 10% 넘게 추락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을 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는 한국 등과 달리 여전히 ‘제로 금리’를 고수하면서 엔화 약세를 더 부채질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엔화 가치를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며 “한국 수출기업에 독(毒)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동범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주요국 환율이 모두 올라 한국이 중국, 일본, 유럽 등에 비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강하다고 할 수 없다”며 “중소기업은 현금을 확보해 환율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