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부활 대축일[2019. 04. 21]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시간을 사이버 공간(Cyber space)에서 보내는 세대에게 부활은 어떻게 다가올까? 오늘 루카 복음(24,1-12)의 ‘앞을 가로 막던 돌이 굴려져 이미 열려 있는 빈 무덤’은 뉴욕의 어느 매장이고 ‘왜 여기서 그것을 찾고 있냐’고 반문하는 두 남자는 사이버 매장 내 점원과 비견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날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기술이 진리를 대치할 수 있는가?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ㄴ 비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화이트헤드 (A. N. Whitehead)의 과정철학이 보이는 ‘조직적 통합’ 시도 이래로 결국에는 과학적 유물론에로 귀착되는 실증주의와 맹목적 신앙에로 이끄는 축자적 성경해석(Verbal Inspiration)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극복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부활 신앙이 야기하는 실존적 긴장이 다 해소된 것인가?
이성적 탐구와 분석에 입각한 자연과학적 연구에 있어 여전히 제일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이론인 ‘일반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밝혀진 사실 하나가 우리의 사안에 있어 특별히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나아가건 미시적으로 접근하건 자연은, 세상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초기 폭발로 간주되는 빅뱅의 결과로 우주는 지금도 여전히 팽창하고 있고, 팽창하고 있는 우주 내 어느 시점에서 온도가 내려가 중력의 힘이 작용하였으며, 그 결과로 우주 내 파편들이 뭉쳐 은하계들로 결집하게 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계속되는 팽창력은 우주 물질들이 중력작용에 의해 과도하게 결집되는 것을 억제했다. 이렇듯 우주는 그 시작부터 팽창과 중력이라는 창조적 긴장 안에 미묘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주 내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다. 그 관계성 안에서 상대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독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없다. 양자역학에 있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물질을 원자 이하의 단위로 계속 쪼개어 나갔을 때, 입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물결처럼 움직이며 특정 장소에서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성향’을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어나는 성향’을 지닐 뿐 반드시 일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를 ‘불확정성의 원칙’이라 부른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제 불확정성에 기반 한다. 그리고 온전한 의미의 개체(Individuum은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움직이며 일어나는 성향을 보이는 입자를 학계에서는 쿼크(quark)라 부른다. 이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불확실한 관계성 안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전공학은 한 개체의 염색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게놈의 구조와 구성 요인이 모든 생물체에서 동일하다는 결과에 이르렀다.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부호 속에 살고 있고 동일한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탄생조차도 별들의 핵반응 결과를 통해 우연히 이루어졌다. 기본생명체의 기본단위인 아미노산이 핵반응 파생물질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먼지와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무생물인 화학물질로부터 태동된 생명체가 드디어 자의식을 갖게 될 정도에 이르게 된다. 만일 초기 우주의 물리학적 상수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값들을 가졌더라면, 과거에는 전혀 없던 생명이, 더 나아가 자의식을 지닌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가? 한 생명체가 개체로서 누리는 절대적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가? 다른 개체와 공유하는 관계성 역시 불확실하게 머물 수밖에 없는가? 앞의 질문들에 대한 긍정적 답변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에 달려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적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탱하는 관계성이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 관계성의 내용을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확인된다. 생명의 끊임없는 진화과정에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비우는 ‘자기포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은 ‘자기비움’, 곧 ‘케노시스’라 부른다. 창조로부터 부활, 곧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세사 내 모든 결정적 사건들이 이 신적 ‘자기비움’과 피조물이 보이는 그것에로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파스카의 신비는 이 신적 ‘자기비움’의 절정을 이룬다. 취약성 내에서 신적 권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제 상대적 의미를 지닐 뿐인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절대적 의미에 참여시키는 것은, 곧 ‘부활시키는 것은’ 이 신적 ‘자기비움’의 신비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다. 하느님을 상대로, 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상대로 내가 ‘살고있는’ 관계성은 이 신적 ‘자기비움’을 어느 정도로 반영하고 있는가? 바로 거기에 내 부활신앙의 진정성과 실체가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도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