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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사명
□ 본문 : 창세기 49장 21절
지난주에 유다를 향한 야곱의 예언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통치자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빌2:10)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입니다.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고후8:9)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은 최고의 축복은 구원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회개하면 그 어떤 죄도 용서받습니다. 그 어떤 죄인도 구원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 꽤 오래전 일이라 상황도 장소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조금 나이가 드신 일본인 남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다 듣고 나더니 그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진짜라면 정말 좋겠네요.’ 정말 좋지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구원을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게 믿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좋겠네요.’ 하면서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오늘 본문은 납달리에 대한 유언이며 예언입니다. 짧지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야곱은 납달리를 ‘놓인 암사슴’이라고 예언합니다. 놓인 암사슴은 속박에서 풀려나 한없이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고, 그 무엇에 제약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왜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습니까? 돈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놀고 싶으면 놀고, 가고 싶으면 어디든지 가고, 가지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타락한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이, 그 마음에 교만과 탐심과 음란과 분노가 가득한 인간이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할까요?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방종입니다.
※ 어느 목사님의 동행일기입니다. (김○현, 940629)
백상원 목사님 강의하시는 세미나에 참석을 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그런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10억을 주면서 가족을 죽이라고 한다면 죽일 수 있겠는가? 43%가 ‘예스’라고 답했다고 한다. 충격적인 일이다.
돈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가족도 죽일 수 있다고 대답한 청소년들이 무려 43%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마귀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마귀는 네 마음대로 살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라고 유혹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쾌락을 따라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 일 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제발 부모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가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까? 물론 이런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들은 짜증을 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잔소리 좀 그만 마세요. 나도 클 만큼 컸으니 가만히 놔두세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자녀가 말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방종이고 타락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래서 듣지도 않는 잔소리를 하고 또 하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녀의 눈에 있는 티는 그렇게 잘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자녀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칩시다. 자녀는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고 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을 따라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립니다. 심지어는 지금 자신이 마귀의 각본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보며 하나님께서 무어라 하실까요? 우리가 자녀에게 하는 말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아들아, 딸아, 그렇게 고집 부리면 안 된다. 네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 그러면 정말 큰 일 난다. 나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그러니 어서 돌이켜라.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너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제발 나의 말을 들어라.’
물론 자녀가 우리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상관하지 마세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요. 왜 저만 이렇게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왜 저만 손해보고 살아야 합니까?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날마다의 싸움은 이런 자아를, 목사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대로 말하고 싶고, 여전히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어제 분명 못 박았는데 오늘 또 다시 자아가 고개를 듭니다. 그러나 저는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의 노예가 되고 마귀의 노예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살라고 나를 부추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을 도둑질하고, 나를 죽이고, 결국은 나를 멸망시키기 위함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자아와 매일 싸웁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나를 정죄하지만, 나를 낙심하게 하지만, 더 이상 마귀는 나를 속일 수 없습니다. 나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갈5:24) 내가 할 일은 예수님께 무릎 꿇는 것입니다.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 실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 꿇을 때 영적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늘의 평안을 누립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죄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죄 짓지 말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사도 요한은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 짓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 짓지 않게 됩니까? 십자가로 죄 짓게 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아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귀가 내 마음대로 말하라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화내고 싸우라고 우리를 충동질해도, 예수님 앞에 순종의 무릎을 꿇으면 마귀는 힘을 잃습니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은 순종의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에게 마귀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입니다. 그러나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 지역을 기업으로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방 민족으로부터 많은 침공을 받았습니다. B.C. 734년과 B.C. 732년 앗수르가 공격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놓은 암사슴이라는 야곱의 예언은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육적으로 놓인 암사슴을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아무리 놓인 암사슴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예수님 없는 인생은 결국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놓인 암사슴이 아닙니다. 놓인 암사슴은 죄의 속박에서, 마귀의 올무에서 풀려난 암사슴입니다. 물론 육적으로도 영적으로 놓인 암사슴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육적으로 놓인 암사슴보다 육적으로 무엇인가에 매인 암사슴이 영적으로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묶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이, 그것이 물질의 문제이든 건강의 문제이든 가정이나 직장의 문제이든, 인간관계의 문제이든,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가시를 살았던 바울이 좋은 예가 됩니다.(고후12:7)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이 불편했습니다. 이왕이면 육신의 기준으로 지혜롭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시면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들을 부르실 이유가 뭡니까? 그래서 지혜롭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 싫습니다. 마치 자신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만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육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기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싫어합니다. 영의 자유를 얻기 위해 육신의 자유를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육적으로 속박된 사람, 육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속박되어 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싶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간절함으로 사모함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납달리 지파가 그랬습니다. 그 어느 지파보다 이방인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놓인 암사슴이 아니라 묶인 암사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지파보다도 자신들을 놓인 암사슴으로 살게 하실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납달리 지파를 향해 구원의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1,2)
당시 애굽에서 다메섹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를 ‘바닷 길’ 또는 ‘해변 길’로 불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해변 길은 가버나움을 일컫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망의 땅’, ‘그늘진 땅’과 같았습니다.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었고,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가버나움과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이곳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버나움과 갈릴리는 납달리 지파의 땅입니다.
야곱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납달리는 고통 받는 흑암의 땅이었습니다. 사망의 땅, 그늘진 땅이었습니다. 육적으로 묶인 암사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납달리입니다. 죄로 고통 받는 흑암의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나름대로 잘나가는 인생이었다 할지라도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사망의 인생, 그늘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 인생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멸시받는 인생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허무한 인생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의 어둠을 몰아내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사망의 어둠을 몰아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아를 내세우며 살아가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놓인 암사슴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납달리를 향해 이렇게 축복합니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신33:23) 서쪽과 남쪽은 갈릴리바다의 서쪽과 남쪽을 의미합니다.
죄로 고통 받는 흑암의 인생,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사망의 인생, 그늘진 인생이었던 우리가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육적으로 묶인 것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육적으로 묶여서 고통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육적인 묶임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고통과 멸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의 빛이 임하여 사망의 인생, 그늘진 인생이 영화로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놓인 암사슴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를 직역하면 ‘그가 아름다운 그 말씀을 전하다.’입니다. 놓인 암사슴이 발하는 아름다운 소리는 아름다운 말씀, 즉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아름다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야곱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영혼들이 죄로 인하여 고통 받으며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사망의 인생, 그늘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까? 놓인 암사슴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아름다운 소식은 입으로 전합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입이 아니라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입이 아니라 발이 아름답습니까? 입으로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발로 산을 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입이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수고를 하는 것은 발이기 때문입니다.
※ 지난 주 화요일에 부산에 있는 ○○○교회 단기선교팀 9명이 왔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 6명도 함께 했는데, 그날도 36도 37도를 오가는 날씨였습니다. 그 무더위 속에서 단기선교팀이 무려 1시간 30분 넘게 치바역에서 찬양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무더위 속에서 찬양하는 선교팀과 전도티슈를 나누어주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면서, 왜 입이 아니라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수고, 몸과 시간과 물질의 희생 없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입이 아니라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은 입 때문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귀찮기 때문입니다. 산을 넘는 수고와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현재형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도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작은 유혹도 이길 수 없습니다. 작은 시련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교회를 섬기다보면 여기저기서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구를 판단하고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깨지는 소리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내 내면에서도 들려옵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문제는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놓인 암사슴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의지하며 세상을 소망하며 세상을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죄에 묶인 암사슴이 되어버립니다.
놓인 암사슴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합니다.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더욱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힘을 다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은혜의 강물이 흘러넘칩니다. 이것이 은혜와 사명의 선순환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차가운 마음, 메마르고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 내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언제부터인가 구원의 은혜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언제부터인가 복음의 사명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직장 동료에게 계속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시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는 구원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듣는 상대방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우리도 차갑고 메마른 신앙에서 구원받습니다. 우리 안의 은혜의 강물이 막히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전하는 것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빌1:29)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귀는 우리의 자아를 충동질합니다. ‘이런 말 들으면서까지 주님 일을 해야 하나? 이런 일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온갖 조롱과 멸시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하는 사명도 감당합니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납달리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사망의 인생, 그늘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로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인생이 되었음을 감사합시다. 이 구원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합시다. 이 구원의 은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이 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