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소년 때부터 시작(詩作)의 우수성 보여
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2장] 조지훈의 유년 시절 2015/02/16 08:00 김삼웅큰 사전 편찬전문위원 등을 지내는 등 항일투쟁으로 젊은날을 보내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고도
<통속 한의학 원론>을 비롯한 한의학서를 저술하고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비교연구하는 등 한의학
체계화에 공헌하기도 했으며, 이
저서들은 훗날 경희대 한의과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주석
4)
조헌영의 정계진출 등은 뒤에서 쓰기로 하고, 그의 일본 유학중에 있었던 두 가지 ‘비화’를 소개한다.
유학시절 그를 짝사랑하던 일본여성이 있었다. 폐결핵 3기인 이 여성을 고치기 위해 조헌영은 한의학을
공부하게 되고, 귀국할 때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한방처방으로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폐결핵을
고쳤다고 한다.
아내가 있는 남편이 병든 일본여성을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치료할 때,
본부인은 남편과 일본 여인을
용서와 이해로 관대하게 대하여 이 지역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또 하나는 아나키스트 박열(朴烈)이
도쿄에서 일왕부자를 폭살하려다 체포되어 국사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박열은 일본 재판부에 네 가지를 요구했다.
요약한다.
첫째, 천황을 대표하는 재판관이 법복을 입듯이 조선을 대표하는 나에게 조선 왕관과 왕의를 입도록 하라.
둘째, 나는
피고가 아니라 조선민족대표로서 내가 법정에 서는 취지를 스스로 말하게 하라.
셋째, 일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 통역을 대라.
넷째,
내가 앉는 자리를 일본법관의 좌석과 동등하게 해 달라. (주석
5)
박열의 이 같은 요구조건에 일본인 변호사 후세가 조선으로 들어와 왕관과 곤룡포를 찾고자 했으나
총독부의 방해로 구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헌영이 집안에 대대로 전해온 사모관대와 대간의
의복을 가져와, 박열이 착용토록 하였다. 박열은 조선의
사모관대를 하고 법정에 출정하여 재판을 받았다.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라던 시절은 일제식민지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나고 총독통치가
조선 천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기골이 있는 가문이고 아버지의 항일운동으로 평탄한 가정생활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조지훈은
훗날 <이력서>의 본적란에 “차운 샘물에 잠겨있는 은가락지를 건져내시는 어머니의 태몽에
안겨 이 세상에 왔습니다”라고 쓸만큼 부모의 기대와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6세 때부터
9세까지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신학문을 병행하여 배웠다.
손자들에게는
가학(家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시고 아버지에게 “너는 몸도 약하니 내 밑에서 배워
한의사가 되거라”하셨다고 한다. 가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의학을 배우기를 바라셨던 그 분이 문학의
재능이 있는 아버지를 알아채고 “이놈도 내 옆에 붙어 있을 놈이 아니구나” 하면서 “너는 문인으로
나가거라” 하셨다고 한다.(주석
6)
할아버지의 안목은 대단했던 것 같다. 6 ~ 9세 되는 손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문인’이 되라고 그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조지훈은 할아버지로부터 글공부를 배우는 한편 인근 영양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또래들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며 자랐다. 조지훈이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 기초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에게 동탁(東卓)이란이름을 지어 주었다.
‘동녘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소망이
담겼을 이름이었다. 하지만 조지훈은 문인활동을 하면서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조지훈
또는 지훈을 아호로 많이 썼다.
할아버지의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던지 조지훈은 9세 때에 처음으로 동요를 짓고,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배리의 <피터팬>, 와이드의 <행복한 왕조>등을 읽었다. 11세 때에는 형 세림(世林)과 ‘꽃탑’회를 조직하고
마을 소년들과 <꽃탑>이란 동요집을 만들어 돌려서 읽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소양이 있었던 것은
형의 영향과
선대로부터의 혈통이었던 것 같다.
조지훈의 부모와 할아버지는 자식ㆍ손자들에게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훈은
영양보통학교를 마치고 중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 와세다대학 통신 강의록을 구하여 독학을
하였다. 그러면서 틈틈이 시 습작에 손을 댔다.
시는 스스로 깨우침이고 독습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몸은 별로 건강하지 않았으나 키는 훌쩍 큰 소년 조지훈은 마을 뒤의 일월산과 마을
앞으로
흐르는 장군천을 놀이터로 삼아 시심(詩心)을 키우며 자랐다. 조지훈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주실마을
생가를 후배 문인이
답사했다.
경북지방 기념물 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훈의 생가는 마을 복판에 있다. ⃞ 자형 사방 일곱 칸의
정사각형 모양의 본채와 정자 형식의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높다란 본채의 댓돌이 자못 오만스럽다.
다만 돌아가며 유리문을 해 단 변형은 굴절이 심한 역사의 은유로 보여 눈에 거슬린다. 본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널따란 마당이 있다. 시멘트로 발는 안마당 가에는 한 그루 늙은 향나무가 섰고, 한 때는
정원이었을 본채 옆으로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다. 담 옆으로는 몇 그루 늙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주석
7)
조지훈의 생가인 이 집은 400여 년 전 인조 때 지훈의 선조인 조경형이 지은 것을 6.25 때 일부가
불탄
것을 1963년에 복구했다. 조지훈은 어린시절을 400여 년의 고택에서 보내고, 사망하기 5년 전에
복구했으나, 후년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다.
조지훈의 맏형 조세림은 조숙한 시인이었다. 동생들과 함께 ‘꽃탑’회를 조직하여 동생과 마을 소년들에게
문학정신을 일깨우다가 21세의 짧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이후 조지훈은 집안에서 장남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후일 조지훈은 형의 친구들이 세운 묘비에 비문을 써서 한 점 혈육도 남기지 않고 요절한 박복한
형을 추모했다.
조세림은 한양인(漢陽人)이니 이름은 동진(東振)이요 세림은 아호더라. 나라
허물어진 뒤 정사(丁巳)
2월 고은 매계동 향제에 나서 스물한 살에 세상을 버리니 미취무후(未娶無後) 함에 다만 한 권의
시집을 끼칠 따름이리라. 한 많은 세상에 병들어 설운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고향의 앞산 남쪽
기슭에 길이 묻혀 바람과 달을 벗하는 도다. 죽마(竹馬)의 옛 벗이 그를 아껴 찬 산에 한 조각 돌을
세우고 그의 아우 동탁으로 하여금 두어 줄 글을 울며 쓰게 하노니, 망망한 이 누리에 임 왔다간 줄
고향의 하늘은 아오리다. (주석
8)
주석
4> 앞의 책, 203쪽.
5> 김삼웅, <박열평전>, 69 ~ 70쪽,
가람기획, 1996.
6> 조광열, 앞의 책, 209쪽.
7> 신경림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9쪽,
우리교육, 1910.
8> 조광렬, 앞의 책, 218 ~ 219쪽.
[4회] 상경하여 고서점 내고 시작활동
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3장] ‘문장’지 통해 시단에 데뷔 2015/02/17 08:00 김삼웅
통신강의록을 통해 현대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과 형의 문학친구들과 더불어 시작(詩作)에 열중하였다.
당시의 소년회를
영도하였고 우리의 문학의 싹을 길어준 사람은 나보다 세 살 위의 조숙한 소년 - 뒤에 스물 한 살을
일기로 요절한 맏형(亡兄) 세림이었다. 열 여섯 살 짜리와 열 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못할 감시의 세월은 그때부터 나의 가슴 일말의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때의 우리 집
뒷방에는 무기징역수 박열 씨가 옥중투쟁 때 입었다는 사모관대 한 벌이 있었다. 아버지가 동경유학생 학생회장
시절에 옥중에 차입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어두운 방 시렁 위에서 좀먹어 가고 있던 그 사모관대를 몰래 열어보고
이상한 감격에 잠기곤
하였다. (주석
1)
조지훈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것은 17세 때였다. 형의 친구인 동향선배 오일도를 찾아서였다. 오일도는 당시
서울에서 <시원(詩苑)>과 <시인부락(詩人部落)>, <삼사문학(三四文學)>등을 경영하다가 재정난으로 <시원>만
유지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조지훈은 오일도의 시원사에 머물면서 부모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고서점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열었다.
첫 직장이 고서점인 셈이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독서를 하였다. 장사는 뒷전이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특히 동서양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혜화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조지훈이 정규적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았음이 오히려
그의 교양과 성격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평자는
분석한다.
쉽게 말해서 지훈은 정규적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음으로써 지적인
교양에 있어서는 손해를 보았고, 성격형성에
있어서는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일제의 것이나마 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던들 학자로서의 그에게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지만 한편 동양적 내지 한국적 교양인으로서, 그리고 지사로서의 성가(成家)에는 불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일제 교육이 근대적인 기능인 양성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한편 인격 형성에는
일본적인 왜소성과 폐쇄성을 강요한 점을 상기하면 쉽게 수긍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2)
조지훈은 상경하여 서울에 거처를 잡으면서 본격적인 시에 손을 댔다. 고향에서 소년기에 습작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동화적인 수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본인의 술회를 들어보자.
내가 시의 습작에 처음 손댄 것은 열
일곱 살 때였다. 30년대 내 시심의 소재는 엔간히 여러 차례 바뀌인 듯 하다.
그러므로 얼핏보면 내 시는 여러개의 마스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은
소재의 취택과 모티브의 포착과 테에마의 선정에 관심의 각도가 변동했다 뿐이지, 그 진면목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
3)
조지훈은 자신의 ‘시의 편력’을 밝힌다
상경 후 내가 처음 탐독한 시인은 보들레르와 와일드였다.
사실주의 이후 주조(主潮) 잃은 문예사조를 알아본다고
보들레르와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를 읽고 나서 보들레르의 상징주의가 정통이라고 믿은 것도, 와일드의
탐미주의에 혹하여 <살로메>를 번역하여 본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이내 그 당시의 모든
문학청년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대전 이후의 이른바 아방가르드 문학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쉬르니, 다다니, 포오멀이니 하던 그 날의 나의 습작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이 한때의
섭렵은 나의 시 공부에 결코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에 섭렵해 두었던 시론은 동란(6.25 - 필자) 직전까지도
나의 서랍속에 고운 객실로 꿰매어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러한 첨단문학은 나의 구미에 잘 당겨지지를
않았다. (주석
4)
시골의 17세 소년이 서울로 올라와 고서점을 내고 당시 세계적인 첨단문학(시) 사조를 익히는 독서를 하고,
여러 유형의 시를 습작한 것을 보면 조지훈은 대단히 조숙한 소년이었던 것 같다. 요절한 형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일본어로 된 세계 명시들을 읽고, 스스로 창작을 할만큼 독서열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무렵에 쓴 <참회>라는 시
전문이다.
참 회
샤를르 보들레르여 난 그대를 읽은
것을 뉘우치노라
오스카 와일드여 난 그대를 읽은 것을 뉘우치노라
이백(李白)이여 두자미(杜子美)여 랭보여 콕토여
무엇이여
무엇이여 난 그대를 읽은 것을 뉘우치노라
뉘우치는 그것마져 다시 뉘우치는 날 돌창을 울리고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며 창을
내린다. (주석
5)
낯선 서울생활을 하면서 남독과 난작으로 방황하던 10대의 조지훈의 문학세계는 <계산표>라는 시에서
당시에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과 전위시인들의 영향을 표시한다.
계 산
표
六十七分의 노동대가 일금 5전야(五錢也)
막걸리 일배 일금
5전야
막걸리 일배 쾌흠
소요시간 23초
67분과 23초의 나의 정가는 5전(五錢)
5전에 괴롭고 즐거우니 67분에 괴롭고
23분에 즐거웁다
이 술이 들어가면 24시간 후에 오장육부에서 자극을 섭취하고
꿈을 먹고 남은 뒤 모든 것에 체과당하여
배출되리니
아 - 67분의 잉여가치
아니 23분 즐거움의 대상(代償). (주석
6)
이 시기 조지훈은 <살로메>를 한글로 번역하고, 초기작품으로 <춘일(春日)>,
<부시(浮屍)>등에 이어 <된 소리에
대한 일고찰>이란 논문을 썼다.
주석
1> 조지훈, <나의 역정 - 시주(詩酒) 반생 자서>, <고대문화>
제1집, 1955년 12월 5일.
2> 김종길, <조지훈론>, <청록집ㆍ기타>, 1968년
11월.
3> 조지훈, <나의 시의 편력>, <청록집 이후>, 349~350쪽.
4> 앞과
같음.
5> <전집1>, 298쪽
6> 앞의 책, 372쪽.
[5회] 만해 만남으로 역사에 눈을 뜨다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3장] ‘문장’지 통해 시단에 데뷔 2015/02/18 08:00 김삼웅 나라 망한 지 10년 후에 태어나 자라는 조지훈의 소년기는 아무리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민족주의의 성향이라 하더라도, 사회는 일제의 폭압이 지배한 시대였다. 아직 조선어가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관청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일본어가 주로 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저항적인 혈통의 DNN 를 타고 태어난 조지훈에게 문학은 암울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사건ㆍ사연을 통해서 각성하거나 변신하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잠시 적었듯이 조지훈은 만해 한용운이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업고와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룰 때 참석한 것이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전에 심우장을 찾아서 만해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제자 최범술이 김동삼의 장례와 관련한 기록이다.
일송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신 직후 그 유해를 찾아가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나, 일제의 악독한 주목받기를 꺼리어 누구 하나 일송 선생의 유해를 인수할 사람이 없을 때에, 만해 선생은 즉시로 서대문감옥을 찾아가 일송 선생의 유해를 인수하였다.
그 뒤 그 시신을 자기 자택 안방에 옮겨 모신 후 5일장을 치룰 무렵에, 이 소식을 들은 국내 유지들은 모두들 심우장에 운집하였던 것이다. 그때 참석한 인사를 몇 사람 꼽을 것 같으면 정인보 ㆍ홍벽초ㆍ김병로ㆍ이인 씨 등 무려 수백 명 이었다 한다.
만해 선생은 일송 영구를 껴안고 방성통곡하였는데, 평생에 만해 선생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또는 호곡한다는, 만해 선생을 아는 사람은 처음이었을 것이며, 또한 단 한 번이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주석
7) 조지훈은 무명 청년의 신분으로 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만해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마음속에 작은 혼불을 심었다. 이것이 지조와 절개의 문인으로 성장하는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에 심은 혼불이 “동양적 자연관,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과 향수, 민족정서의 형상화” (주석
8)의 시세계에 도달하게 되었다면
과언일까. 국가 사회가 어려울 때 큰 바위와 같은 인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더불어 의식 있는 청년들의 혼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만해의 존재가 그러하였다.
이 무렵 조지훈은 또 홍노작을 댁으로 찾아 배움을 청하였다. 조지훈은 1958년 10월호 월간 <사조(思潮)>에 <한용운론>과 1947년 1월 3일자 동아일보에 <홍노작론>을 쓰고 <한용운 전집> 편찬에 참여하는 등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 스승들을 기리었다.
성북동 심우장으로 한용운 선생을 찾아뵈온 것과 자하문 셋방으로 홍노작(洪露雀) 선생을 찾아뵈온 것도 이 무렵이었으니 두 분 다 잊히지 않는 분으로 몇 가지 추억을 남겨주셨다. 나는 이 시기에 니체와 셰스토프와 메레스코프시키를 읽고 좋아하기도 하였다. 평원선(平原線) 철로가 놓이기 전에 원산서 평양까지를 걸어서 여행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 ‘극예술연구회’ 와 ‘중앙무대’ 와 ‘낭만좌’를 드나든 것도 이 1939년 전후의 일이었으며 서정주ㆍ김달진 두 선배를 만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주석
9) 조지훈은 만해를 만난 영향이었는지, 1939년 중구 필동에 소재한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혜전은 원래 불교계에서 세운 중앙교육기관이었다. 3.1혁명 후 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28년 불교전수학교라는 교명으로 다시 개교하여,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40년 재단법인을 조계학원으로 개칭하였다. 같은 해 6월에 교명을 혜화전문학교로 변경하고, 1945년 5월 일제에 의해 다시 폐교되었다. 해방 후 동국대학으로 교명을 바꿔 다시 개교하였다. 조지훈이 입학할 당시는 중앙불교전문학교였다.
[6회] 정지용이 추천한 ‘고풍의상’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3장] ‘문장’지 통해 시단에 데뷔 2015/02/19 08:00 김삼웅 조지훈이 정신적 방황을 겪으며 시작을 하고 있을 즈음인 1937년 2월 <문장>이란 월간 문학잡지가
창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 김연만, 주간 이태준, 표지 제자(題字)를 추사 김정희의 필적을 집자하여 제작할만큼 민족의식이 깔려 있는
잡지였다. 서구문화 도입에도 지면을 할애하였다. 또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한다는 사고를 내걸었다. 해방 후 ‘ 청록파’의 일원이 된 박두진ㆍ박목월과 함께
조지훈도 이 잡지의 추천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선작이 되었다. 시인 정지용이 선정위원이었다.
이 시는 후일 교과서에도 실리는 명시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풍의상
하늘로 나를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느리운 주련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곱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호장저고리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감춘 운화(雲靴) 당화(唐靴)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첩인양 사푸시 춤을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곳줄 골라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손을 흔들지어다. (주석 10) *
독자 주: 연 바꾸기(붉은 글씨), 한자사용부분이 시 원문과 다르고
오자(誤字) 및 한자(漢字)가 틀린 곳
(청색글씨)이 있어서 아래와 같이 바로잡습니다. 대조해 보시기를.... 댓글 참조. '조지훈 문학동산 카페지기 曉泉 고풍의상 (古風衣裳)
하늘로 날을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접(蝴蜨)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곳줄 골라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손을
흔들지어다. (주석
10) 19세 청년의 시라고 보기는 너무 동양적(한국적)인 정한이 깃든 시로 평가받는다. 이 시를 뽑았던 정지용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군의 회고적 에스프리는 애초에 명소(名所) 고적(古蹟)에서 날조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유한 푸른 하늘 바탕이나, 고매한 자기(磁器) 살결에 무시로 거래하는 일말 운무와 같이 자연과 인공의 극치일까 합니다. 가다가 명경지수에 세우(細雨)와 같이 뿌리며 나려앉는 비애의 artist 조지훈은 한 마리 백학처럼 도사립니다. 시에서 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천성(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시니 시단에 하나 ‘신고전’을 소개하며 .... 쁘라 보우! (주석 11) 조지훈은 훗날 <고풍의상>이 추천되는 등 문단의 ‘기린아’ 로 등단한 시기를 회고한다.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응모하여 그 제1회로 <고풍의상>이 당선된 것은 1939년 봄 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고풍의상>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그때까지의 나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이었으나 실상은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뽑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문화에 대한 나의 애착, 그 중에서도 민속학 공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감성 안에서 절로 돋아나온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에 <승무>, 그 이듬해 2월에 <봉황수>가 추천되기까지에는 열 한 달이나 경과되었었다. (주석
12) 제3호에 <승무>가 제2회 추천, 그리고 1940년 2월호(제2권 제2호)에 <봉황수>와 <향문(香紋)>이 추천되어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한국시사에 큰 획을 긋는 <봉황수> 전문이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소리 날라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등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랑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 옆에서 정일품 종9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 에 호곡하리라. (주석 13) 독자 주: 이 시도 원문과 달라(빠진 글자,
빠진 문장이 있기에) 아래와 같이 바로잡아 정정합니다. 비교해
보시기를.. 댓글 참조. 조지훈 문학동산 카페지기. 曉泉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등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
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 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 에 호곡(呼哭)하리라. (주석 13) 조지훈의 일련의 추천작은 암울한 일제말기 조선문단과 식민지
백성들에게 말살되어가는 민족문화에 대해 의식을 일깨우고 큰 감명을 주었다. 한 평자의 비평이다. 한국의 고유한 것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이를 재창조하고 있는 지훈의 추천기의 작품들은 일제 말기의 어둡고 답답한 상황속에서,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의 고향을 다시 찾은 감명을 안겨줌으로써, 그 갈증과 향수를 달래 주었던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애수, 민족정서에 대한 애착은 <고풍의상>ㆍ<승무>ㆍ<봉황수>ㆍ<향문>ㆍ <가야금>ㆍ<무고> 등 많은 가편에서
표현되었다. 노래한 것이다. 노래하는 대상을 다만 시각적 영상으로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리듬의 흐름이 이루어주는 우아한 격조가
의상이 지니는 전아한 품격과 잘 어울려 고전적인 한국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재창조하였다. (주석
14) 14>
정한모, <초기작품의 시세계>, <시문학>, 1975년 6월호.
[7회] ‘동인지’ 내고 독립운동가 딸과 혼인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3장] ‘문장’지 통해 시단에 데뷔 2015/02/20 08:00 김삼웅 <문장>지의 추천 어간에 조지훈은 서울에 있는 문학도들과 일본에서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청년들과 함께 <백지(白紙)> 라는 동인지를 간행하였다. 조지훈은 여기에 <계산표>와 <귀곡지(鬼哭誌)>등을 실었다. <고풍의상>직전까지의 습작들이었는데, 그 1집에 실린 <계산표>와 <귀곡지>를 유진오 선생이 혜민(慧敏)한 지성을 산다고 평을 써 줘서 은근히 기뻐하던 기억이 있다. <백지>는 서울에 있는 문학공부하는 학생 14명과 일본 예술과 학생 4명에 기타 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시ㆍ소설ㆍ희곡을 다 실린 창작지였으나 3집으로 끝나고 말았다. (주석 15)
독자 주; 위의 시가 원문과 띄어쓰기나 줄 바꾸기, 빠진 단어가 있기에 원문을 옮겨와 아래에소개합니다. '조지훈 문학동산' 카페지기 효천. 귀곡지 (鬼哭誌) 애비 없는 아들보담도 애비의 자식됨이 더욱 서럽다. 하래비의 아들보담 유산(遺産)은 작아 슬픈 족보(族譜)를 뒤져보는 마음이여! 지나간 시절에는 그래도 명문(名門)의 후예(後裔) 신수좋은 얼골에 수염을 쓰다듬으면 대청 사랑방 놋재떠리 소리가 요란했다. 소슬대문 개와집이 오막살이로 찌그러지던 날 뒷산(山) 밑 어무러진 사당에선 눈가이 진무른 신주(神主) 우는 소리가 났단다 아들이 나면 하얀 백설기에 미역국 끓이고 삼신할머니 앞에 복(福)을 빌었다건만 염소수염을 쓰다듬고 노루기침을 하면 앙반 된 비극(悲劇)에 하얀 발바당이 서러웠다. (주석 16) 당시의 관습대로 사진만 보고 혼인을 하게 되었다. 신부는 영주군 문수면 무섬마을 출신으로 부친이 신간회 지회장과 청년동맹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경에 체포돼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규수였다. 아들 조광렬이 회상하는 어머니 관련 내용이다. 반대로 졸업을 앞두고 학업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졸업장을 못받은 것을 어머니께서는 늘 아쉬워하셨다. (그 무렵은 당신의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계실 때라 어머니를 대변해 주실 분이 안 계셨기 때문이다). 옥중에 계셨기 때문이다. 당시 그 집을 드나들던 독립운동가들 중의 한 여자분은 나중에 어머니가 시집와서 보니 나의 친척 아저씨의 어머니였다고 하셨다. (주석 17) 두 사람은 서울 명륜동 아버지의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조헌영은 전셋집에 ‘동양의학연구소’ 와 ‘일월서방’ 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약 약조제와 책을 간행하고 있었다. 못하는 등 생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아들 부부까지 끼어들면서 생활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조광렬의 기록이다. 시절이었다. 동경유학까지 하신 할아버지께서 취직을 하려 했으면 좋은 직업, 높은 자리,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하였음에도 나의 할아버지는 당신이 살고 계시는 전셋집에 이런 간판을 거시고 한의사로서 한의학을 연구하시며 한의서를 집필하고 계셨다. 살아야 했다. 또 가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을 할아버지께서 진찰하고 치료했는데 이를 고맙게 생각해서 인사로 쌀이나 음식, 기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놓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주석 18)
8회] 속리산 월정사의 비승비속 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4장] 일제말기 암흑속에서 2015/02/21 08:00 김삼웅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3월 홀연히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떠났다. 신혼의 아내를 남겨두고
떠난
길이었다. 혜전에서 불교학을 공부하여 불심을 따른 구도의 길은 아니었다. 창씨개명을 강제하여 조선인의 성씨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10월 16일에는 국민총력연맹을 조직하면서 쌀 공출과 강제 저축운동 추진, 사상통일운동 등 ‘황국신민화’ 와 전시 수탈에 광분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수감하였다. 이에 앞서 39년 10월 29일 친일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되어 박영희ㆍ유진오ㆍ이광수 등 저명 문인들이 참가하는 등 문단에 친일변절의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조지훈은 이와 같은 시기에 서울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스물 두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학교를 마치자 곧 오대산 월정사로 가게 되었다. 경서제대(京城帝大) 종교사회학 연구실의 적송(赤松)ㆍ추업(秋葉) 양 교수의 호의로 ‘만몽민속품참고관’(滿蒙民俗品參考館)에 일자리가 났으나, 나의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기 위해서는 이 심산(深山)의 고찰이 더 필요하였던 것이다.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란 이름으로 스물 두 살 짜리 백면서생은 주지(住持)와 조실(祖室) 의 다음 자리에 앉아 가승(假僧) 노릇으로 1년을 보냈다. 자기침잠(自己沈潛)의 공부에 들었던 그 1년은 나의 시에 한 시기를
그은 것이 사실이요 그만큼 나의 생애에 중요한 도정(道程)이기도 하다. (주석
1) 그리고 존경하던 문단 선배들의 훼절을 보고 충격을 느꼈던 것 같다. 갓 결혼한 신부를 남겨두고, 가출을 결행할 만큼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기
위한 길이 고찰의 수행이었다. 부르기도 하였다. 증곡에 관한 ‘자변’을 들어보자. 고 곡자(谷)에 인(人) 변이 있으면 ‘속’(俗) 자가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증(曾)에 인(人) 변이 없으니 승(僧) 이 아니요, 곡자에 인(人) 변이 없으니 속이 아니라, 이른바 증곡은 비승비속의 뜻이니 우리 말로 바꿔서 풀이하면 죽도밥도 아니라는 자조(自嘲)에 지나지 않는다. (주석
2) 모습은 이내 오대산에 괴물 중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강릉에서 신문기자가 왔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포복(抱腹)할 지경이다. 마시던 비승비속의 멋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석
3)
겹친다. 교감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와 <화엄경(華嚴經)>에 경도하고 <전등록(傳燈錄)>과 <염송(䬯松)>을 탐독하고 절의 선고에 있는 노장(老莊) 과 스피노자와 헤겔, 베르고송을 조금 읽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시 몇 편은 이때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발레리ㆍ릴케ㆍ헤세를 집어치우고, 다시 당시(唐詩)를 읽고 한산시(寒山詩)를 비롯한 선가어록(禪家語錄) 과 창송(倡頌)을 좋아한 것이 그때의 나의 생활이었다. (주석
4)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饍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을 앙양하라고 강요하였다. <문장>은 이에 불응하여 스스로 묻을 닫고 말았다. 산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조지훈은 오열하였다. (참고로 <문장>은 1948년 10월 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1회로 종간하였다.) 노파집에서 술이 취하여 방성통곡을 하는가 하면, 진주만 폭격이 있고 나서는 내 서실(書室)의 수색이 있었고, 싱가포르 함락의 보(報)가 전해지던 날은 주재소(駐在所) 수석이 와서 축하행렬을 명령하고 갔다는 것이다. 주지(住持)에게서 백지 몇 권을 받아 학인들에게 아무거나 만들라고 시켜놓고 나서 나는 아랫골 주막에 누워 종일 혼자서 통음(痛飮) 하였던 것이다. 나는 전보를 받고 내려오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암혈(岩穴)>의 노래, <비혈기(鼻血紀)>같은 것이 이 무렵의 작품이었다. (주석
7) 것이고 찌그러진 책상에는 키르케골이 밤새 흐느껴 우는 것이다. 이런 슬픈 무대에서 나는 화루(火酒) 몇 잔에 10세기는 정조(貞操)를 팔고 불쌍한 배우가 되어 있다. 속약(俗惡)한 흥행사(興行師) 20세기는 램프와 함께 나를 절명(絶命)하라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반역(反逆)하는 길은 아무리 짓밟혀도 살아 있다는 존재 그것뿐 - 침을 뱉어라 침을 뱉는 이가 누구냐. 돌을 던져라 돌을 던질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서러웁구나. 신이여! 항상 저희를 살려 두시고 괴롭히시는 당신의 비주정신(悲劇精神)을 저희는 존중하옵니다. 죽어서 비웃음 받을 슬픔보다는 살아서 올 수도 없는 회한(悔恨)을 주십시오. 눈물을 잊어버린 사나이에게 어쩌자구 한 잔 술을 권하는 사람들만 이리도 많은가 꼭 같은 한(恨)이 있어 같이 울자구 이 술잔 이 동정(同情)을 내게 주는가. 술을 마시고 피를
뽑아주마. 걸레쪽도 빛이 변했다. 그리운 옛날의 어느 마을 앞 굽이치는 강물에 복사꽃 지는 철이 이러했었다. 림색(淋濇) 한 핏방울에 옷을 적시고 슬픈일이 없어서 웃어본다. 이러한 밤에 내가 부르고 싶은 단 하나의 이름이여 --- 당신이 논아주신 피를 저는 이렇게 헐값으로 흘리고 있습니다. (주석
9) 자체가 일제의 촉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을 것이다. 의지가 강한 자에게 외압은 더욱 강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조지훈은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한다.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사업에 들어간 것이다. 27년 2월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발행하고, 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였다. 42년 7월 일제는 이극로 ㆍ최현배ㆍ이희승ㆍ이은상ㆍ안재홍 등 한글학회 간부 30여 명을 검거하고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 라는 죄명으로 기소했다.
曉泉 14:09
위에서 열째 줄의 붉은 글씨 '해'자가 빠져서 삽입했고, '서'는
'성'으로 다음줄 '업'은 '엽'으로, '장'은'자'로, 그리고 청색 글씨는 중복이니 삭제요함. 또, 시 '산방'에서 '움쩍'은 '옴찍'으로
고쳐야 하고, '암혈의 노래' 전 세째 줄의 '환'은 '황'으로, 그리고 시 '비혈기' 둘째줄 '루'는 '주'로 고치고 "몇 잔에"에가 빠져있어
삽입했으며 청색 글씨 '10세기'는 삭제되어야 함. 그리고 '약'은 '악'으로 '뱉는'은 '뱉을'로 '비주정신'을 '비극정신'으로' '살아서 올
수도'를 '살아서 울 수도'로 고쳐야 할것입니다. 그 이외에 한자의 삽입이 이해를 돕기 좋고 원문의 품위도 지킬 것이라 사료되어 원문대로 한자를
삽입했음.
曉泉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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