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다한 형광등을 위한 노래
하린
숙면에 드는 날보다 뒤척임에 드는 날이 많았다
그 모든 걸 지켜본 건 형광등뿐이다
빈방에서 빈속을 달래느라 빈병이 될 때까지 마셨고
불만에 찬 곰팡이가 장판 밑에서 스멀스멀 번식하는 걸 방치했다
어떤 날은 애인을 둘이나 두고도 자위를 했다
몇 번의 졸업식이 끝나자 계집애들은 엄숙해졌고 미래는 변덕스러웠고 현재는 산만했다
난 마지막 남은 거처인 나에게 한심하게 얹혀살았다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르지 말아야 할 이름을 부르다 서글퍼졌다
심장이 허전할 때 긁지 말아야 하는 규칙을 또 어겼다
악취 나는 집착을 악착같이 천변에 버렸고 당신이 없는 방향에서 바람의 충고를 씹었다
아무리 새로운 하늘을 끼워 넣어도 오늘의 창문은 늘 불편했다
보편성은 돌려줘야 할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사람처럼 속물적인 것
멍하니 빈방에 던져져서 형광등의 까만 부위가 더욱 더 까매질 때까지 몽상만 했다
크레이터
달을 삼키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실패다
곯아터진 걸 들키지 않으려고 웃고 있는 저 달 아래
누군가 나 대신 치욕을 참고 있다
왜 중심은 쓸모없이 위험한가
바람이 앉았다 간 자리 새알이 있고
비가 앉았다 간 자리 안개가 있는데
당신이 앉았다 간 자리엔 증오가 없다
아무도 나쁜 높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기에
난간의 승리를 접어두기로 하자
달을 넘보던 구름만 무탈했으니 나는 완벽한 패배로 증명된다
폭우가 오지 않는 날엔 뒤돌아서지 않으려 했다
잘 가라는 흔드는 손 따윈 없어도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에게 쉽게 낭떠러지를 들키고 만다
심장 속에 만월은 없고 그믐만 있다만
황무지는 없고 수렁만 있다만
시래기처럼 바짝 나를 말려 달무리 속에 풀어 놓으련다
달 속엔 도달할 수 없는 데인 자국이 많다
달로 출퇴근하는 억지를 당분간 부리지 않을 테다
눈물박물관
일평생 사무실을 견딘 사내가 고요해졌다
그가 지나쳐온 사람이 지하철이 잠시 묵념을 한다 0.5초쯤
다시 회전문이 돌아간다
눈물박물관이 있어 사내의 눈물을 유리 안에 보존한다
만지세요, 표정을 보고 싶으면
마지막으로 사내가 저장한 건 운동장을 돌고 있는 장면이다
사내는 돌멩이처럼 날아가기 좋은 태도를 가졌지만
휑한 공터가 사내에게 부여한 건 뺑뺑이다
부득이하게 같이 돌고 있는 그림자가 말을 건다
당신이 가진 내일에 소금을 뿌려요 염장을 하는 거예요 당신의 휘파람은 중세적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우리 같이 연애나 할까?
두터운 옆구리 살을 서로 뜯어 먹는 상상을 하며 사내가 농담을 던진다
제기랄, 어둠이란 가능성에 대한 불가능이 아닙니까?
그림자는 예의 바른 운동장만을 저장한다 개가 되지 않기 위해
한 바퀴만 더 한 바퀴만 더, 사내가 슬퍼진다
관광객의 그림자가 박물관 앞을 서성인다 다시 또 회전문이 돌아간다
도시형 늑대
행성의 아침은 도식적이다
난 점점 검은 늑대로 진화한다
혀를 신뢰할 수가 없다
무의식적으로 회의(回議)를 하고 의식적으로 회의(懷疑)를 한다
늑대는 경험이 많으니 복잡하지 않다
내 안의 기계가 모두 피맛을 본 지 오래
책상이 때론 사람처럼 편견을 씹어 먹을지언정
20세기적으로 유순해지고 싶지 않다
늑대는 서랍을 벗어난 최초의 습작처럼 비참을 넘어 처참을 반복한다
실수는 흔하고 완벽은 겉과 속이 모두 바뀌지 않는다
오만이 가득 찬 태양이 뜬다 안녕, 내 이빨을 잘 달궈줘
늑대에겐 밤보다 아침이 더 포괄적이다
그런데 태양의 긴 혀가 힌트도 없이 참견을 한다, 까불지 마!
질서는 오랜 시간 굶주리면 쾌활해진다
비명도 슬픔도 벌레도 의자도 엉덩이도 육식을 버린다
끝내 내 계급은 위독하지 않다 다정다감하게
식별법
월요일의 노래가 금요일까지 살아 있다면 당신은 하나의 비상구를 갖고 있는 거다 뿌리가 뽑힌 자리에 얼마나 깊은 어둠이 고여서 썩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기척을 감춘 뿌리의 감각에게 오랫동안 공손해졌던 거다 때론 꽂힌 시집보다 누운 시집이 당신을 머무르게 한다 누운 시집 보다 엎드린 시집이 손을 놓지 않게 한다 읽다만 부분부터 해설까지 닿았을 때 단 한 줄의 지음도 만나지 못했다면 깜깜한 페이지와 오탈자를 증명해 볼 일이다 갑자기 뒤통수가 가려운 건 누군가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기 때문, 그럴 땐 피곤한 자해나 친절한 자학 안에서 머뭇거릴 일이다 금요일 다음엔 스케줄 대신 식욕이 자란다 토마토가 신앙으로 발전한다 시인이 개보다 토마토를 사랑하는 것은 토마토가 오랫동안 이빨을 갖지 않기 때문, 그런데 안개 속에 손을 집어넣고 낯선 손과 불투명한 악수를 복습하다 돌아와도 토마토에겐 우울을 견뎌낼 근육 따윈 없다 금요일의 후회가 월요일까지 살아 있다면 당신은 하나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