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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릴레이 논단 - 문화예술의 주체성과 민족미학
- 염무웅_문학평론가 -
먼저 민족미학이란 말을 쓰게 된 배경을 잠깐 얘기하려고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분위기에서 88년 12월에 뜻을 같이 하는 문학인, 예술인들이 모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 89년 1월 20일쯤 2박 3일에 걸쳐 경기도 일산 근처에서 임원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초청 강연도 듣고, 장르별로 또는 주제별로 여러 분과를 나눠서 토론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제안을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나라의 문학, 미술, 연극, 음악 등 여러 장르들은 각기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 일종의 불균등 발전상태에 있는데, 각 장르의 이론공부 내지 비평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경험을 서로 주고받는 토론 모임을 가지면 어떻겠느냐” 이 제안이 통과되면서 저한테 그 모임의 책임이 맡겨졌습니다.
‘민족미학’이라는 낱말을 그전에 누군가가 썼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모임에 ‘민족미학연구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민예총의 산하기구로 만들었습니다. ‘민족미학’이라는 확고한 개념의 내용이 있었다기보다는 각 장르에서 비평을 하고 이론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기구이니까 편의상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지요.
오늘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 ‘문화예술의 주체성~’ 입니다. 주체라는 것은 객체에 대한 대립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주체성이라는 것은 어떤 활동이나 조직에서 주인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시대 같으면 굳이 우리가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당연히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이고, 이 나라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라는 데에 별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주인된 입장에 어떤 위기가 생긴다거나 손님이 주인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주체와 객체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각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근대사를 보면 가령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주 대표적인 예가 아닙니까?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 내지 그 둘 사이의 싸움이 단재 역사학의 주제였어요. 그는 어떤 글에서 ‘나’라는 것의 알맹이를 ‘국수(國粹)’라는 말로 지칭했습니다. 국수주의 하면 아주 부정적인 개념이지만 단재 선생의 글 속에서 ‘국수’라는 것은 그렇게 부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분하게 해주는 알맹이, 그 존재의 근거, 그것을 국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나와 내가 아닌 것,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을 구별하다보니 즉 주체의 문제가 떠오르다보니까 ‘나’라는 것은 누구냐? 어디까지가 나이고, 또 어디서부터가 내가 아닌가를 생각하다보니, 결국 정체성의 문제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이나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성이나 정체성의 문제가 부각되는 것은 그 민족이나 민족문화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러한 위기 속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자기를 지키고자하는 생존 전략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럴 때 지켜야 하는 ‘민족’이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런데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책을 찾아보면 그것이 생각보다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을, 즉 자명하게 범주가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대체로 영토적으로 큰 변동이 없었고, 또 혈연적으로도 어느 정도 일정한 상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국이나 일본처럼 거의 99% 이상이 혈연적인 동질성을 가진 민족은 극히 예외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실은 혈연, 언어, 문화, 정치적으로 단일성을 유지해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근대에 접어들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떤 일관된 민족개념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근대적 상황의 전개에 따라 민족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민족은 시대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고려대학교 김현구 교수의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라는 책을 대강 훑여봤습니다. 이 책은 전문적인 학술서적이 아니고 약간 수필 같은 요소가 담긴, 그렇지만 내용은 상당히 전문적인 책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의 민족적, 종족적, 문화적 교류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김현구 교수의 논의는 서로 상반된 의견에 대한 반론입니다. 하나는 ‘일본문화는 주로 백제가 전해준 것이고 일본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문화적으로 우리 영향 밑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는 우리나라 사람들 다수의 생각이고, 또 반대로 일본 사람들은 ‘6``~7세기 경의 조선의 남쪽 지역은 일본의 지배 밑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반된 두 견해가 모두 일정한 근거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 김현구 교수의 목적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그동안 막연히 가지고 있던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상식의 상당부분을 수정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6~7세기경, 말하자면 백제시대에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상당히 활발한 종족적, 문화적, 물질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백제와 신라 사이보다 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보다도 더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럴 리가 있나 싶은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지금부터 천 오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다의 뱃길을 이용해서 사람이 가고 물건이 가는 것이 육상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교통수단이 발달된 지금의 시각으로 자꾸 생각하려고 해서 그렇지 옛날 천 오백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배타고 가는 것이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는 것이 납득이 됩니다. 또 그 책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부터 만 년 전쯤에 비로소 현해탄이라는 바다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일본과 한반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여기는 일본, 저기는 조선, 이런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우리가 흔히 ‘단일민족’이라고 하는 이 단일성이 사실은 상당히 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근대적 민족개념이 형성되는 그 시기에 실체적 민족범주의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00여 년 사이에 우리 민족은 이런저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이나 미국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 총수가 600여 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외국인 노동자들, 사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이런 외국인 이주민들 60여 만 명 정도가 우리 속에 끼여 살고 있습니다. 하여간 혈통의 단일성만 가지고 민족을 정의하기는 어렵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엄격한 분단에 의해서 60년 가까이 남북이 갈려져 살고 있는데, 이 남북 간의 언어적, 문화적, 정치적 이질화라는 것은 이제는 민족개념으로 묶기가, 묶지 않을 수도 없고, 쉽게 묶어지지도 않는 아주 독특하고 어려운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민족문학이라든가 민족주의라든가 하는 말을 쓰는 일이 아주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족의 주체성, 민족문학의 주체성을 말할 때 어느 범주까지가 주인인지가 이제 쉽게 경계선을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주체성을 언급할 때는 역사적 역동성, 그 뒤얽힌 상황을 늘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의 주체성, 민족문학은 무엇이냐는 정체성까지 따질 때 어떤 특정한 시대의 민족문학을 지나치게 보편화하려는 성향을 경계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가령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일종의 민족근본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의 뿌리를 찾아가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묘청이 고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하다가 김부식에 의해서 좌절된 것을 조선역사 일천년이래의 최대의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는 원시 고유문화와 김부식이 대표하는 그 시대의 보편적 문화, 일종의 세계적 문화인 중국문화, 한문문화, 유교문화 사이의 대립에서 우리의 토착적 고유문화가 패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단재 선생은 묘청의 패배가 우리 역사 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과장된 어법으로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하고 유교가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적 보편성 속에 진입하기 이전의 원시적 고유성이 있었을 텐데 이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유교적 한문문화 속으로 대부분 융해되어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일제시대 때 창씨개명 가지고도 야단법석인데 사실 우리는 언제인지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몇 백년 동안에 걸쳐서 순수한 우리 이름이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중국식의 창씨개명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실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할 만큼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한 토착적인 원시문화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문명 속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편입됨으로써 동아시아적 보편세계에 일원이 되는 과정인데, 이것이 우리가 겪은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문화혁명이 아니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가령 신라의 삼국통일 즈음에 일정한 정도 완성이 되었다면 그로부터 천년이 넘는 동안에는 대체로 일관성,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고 봅니다. 물론 13세기 몽고에 의해서 한 1세기 가까이 정도 지배를 당하고 지낸 적도 있고, 또 병자호란 때 명나라의 한족중심의 문화가 만주족 중심의 정치질서로 되면서 ‘이제 중화는 없다. 우리가 이제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다’라는 소중화주의가 17~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점진적인 변화에 그쳤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우리는 천년이 넘게 우리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믿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서구적인 문명의 충격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1세기 반 동안 일종의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겪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적 보편성으로부터 서구문명 중심의 자본주의라고 할까? 그런 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구미세력이 기타 지역을 정치·군사적으로나 경제·문화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서세동점의 현실 속에 우리도 지난 1세기반 동안 놓여지게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민족적 각성, 민족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민족적 대응에 있어서 신채호 같은 분은 앞서 민족 근본주의다 말했는데 그와 반대되는 입장이 이광수인 것 같습니다. 이광수 같은 사람의 태도는 일종의 민족 기회주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광수의 행보와는 달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우리나라 문단을 양분했던 두 조류 중 하나는 계급주의고 하나는 근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데 가령 임화 같은 사람은 계급주의자이고 김기림 같은 사람은 근대주의자 입니다. 그런데 김기림도 1940년쯤에 쓴 글을 읽어보면 “우리시대는 참 이상한 시대여서 어떤 개인적 각성이나 개인의 감정도 민족의 형식, 민족주의 틀을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시대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압력에 대해 모더니스트 김기림이 어느 정도 굴복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해방 후에 김기림은 민족문학의 깃발 아래 섭니다. 그러니까 김기림이 근대주의자로 출발하지만 그 귀결점은 민족문학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임화는 맨 처음에 출발은 좀 이상했지만 결국 카프의 이론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고, 그러다가 30년대 말경에는 시문학사 연구과정을 거쳐 해방직후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이라는 테제에 도달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광수 같은 보수주의 민족주의자들이 문학이론의 공석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보수적 민족주의와 대립되었던 계급주의적 이론들 또 모더니즘적 이론들은 위기가 심각하게 된 30년대 말 4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족문학이라는 단일한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6·25를 거쳐 50년~ 60년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50년대에는 다들 하는 얘기지만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단순히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등 너무나도 심각한 탄압과 통제가 행해졌고, 그 속에서 제대로 된 이론이나 이념이나 사고가 거의 발붙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4·19가 터지는데, 이 4·19에 의해서 그동안 억제되었던 민족주의적 이념, 감성들은 폭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은 5·16 이후 여지없이 탄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민족주의는 또 민족문학은 억압의 대상, 기피의 대상, 적어도 공식 매체에서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러한 흐름들은 문학으로 바라보면 60년대의 참여문학론이나, 농민문학론, 민중문학론 등등의 과정을 거쳐서 대략 70년대에는 민족문학론으로 수렴이 됩니다.
또 80년대 후반에는 이 민족문학론 틀 안에 여러 분파들이 치열한 이론적인 쟁태를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난 20~30년대에 있어서는 여러 갈래의 이론들이 민족문학론으로 구심적인 행진을 벌였던 기간이라고 한다면 6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치면서 특히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는 민족문학 테두리 안에 모여들었던 여러 이론적 분파들이 다시 원심적으로 확산되고 분해되는 시기입니다. 20~`30년대와 70~80년대는 일종의 역방향의 이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90년대가 벌써 10여 년 이상이 지났고, 여러 가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면서 민족주의와 민족문학들이 일반 대중들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나고, 매력과 영향력도 별로 없는 그런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령 우리가 있는 이 자리, 저 거리에 있는 풍경이 말해주듯이 민족이라는 것은 아직도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 방향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일종의 세계화주의라고 볼 수 있는 흐름에 의해서 민족주의, 민족문학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화주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것이 갑자기 생겨났다기보다는 지난 냉전시대에 근대화 근대화하던 것이 냉전이 끝나고 미국 단일 패권이 되면서 세계화라는 것으로 좀더 공격적이고 좀더 포괄적인 방향을 취하면서 민족이라는 것이 열등하고 시대착오적인, 말하자면 시효가 지난 것으로 점점 치부가 되고 그래서 탈민족주의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화두로 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민족 내부에서 또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성적인 또는 계급적인 차이나 차별을 은폐하기 위한 이념적 구성물이 아닌가 하는 협의가 민족주의, 민족문학에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위 두 방향은 상당히 다른데 하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하나는 안으로부터 나온 공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방향에 의한 민족주의와 민족문학에 대한 공격이 그 나름으로는 상당히 일리가 있고, 현실성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민족을 어떤 고정 불변의 것으로 고착시키기보다는 그 역사적 시대가 요구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그때그때 새로 가져야 할 것으로 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민족문학도 당연히 세계화주의의 공격과 민족내부의 민족 해체적 요구를 맞이해서 이것을 새로운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90년대 이후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민족문학,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주체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온갖 시도들에 대해서 지난날의 고정적인 민족개념을 가지고 방어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또 어쩌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객관적인 정세 속에서 민족 개념을 재구성하면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는 것이 옳을지, 또는 새로운 개념으로 완전히 대체하게 될지는 판별하기가 쉽지가 않지만 어찌됐던 지난날 8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민족문학의 이론과 시각으로는 이 현실을 뚫고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운 시대가 됐다라는 것이 저로서 내린 결론이라면 결론입니다. 이에 대해서 한 두 가지만 더 붙여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바이러스가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1차대전 때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보다도 1차대전 직후에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백인들이 16세기 초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서 500년 가까운 동안에 미국대륙을 완전히 점거했습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에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약 1억명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 수 백년 동안에 백인에 의해서 총칼로 학살된 원주민 수가 몇 백만이었다면 백인들이 묻혀 가져간 역병 바이러스에 의해서 수 천만명의 원주민들이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지난 날 총칼 같은 직접적인 압력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침투, 세계화라고 하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이 문화 바이러스이며, 이것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좀 먹고 있는 것 아닌가 마치 그 북미 대륙에 들어갔던 역병 바이러스처럼 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돌리고 있는 극장 앞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아프간 사람들, 미제 담배·껌을 파는 시장의 활기, 그리고 여자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는 모습 등을 통해 이제 탈레반 정권이 망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자유가 왔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봤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폭탄을 퍼부은 것보다도 더 심각한 아프가니스탄의 민족문화에 대한 역병 바이러스가 들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거의 무방비 입니다. 이라크와 북한 같은 나라들이라고 해서 미국중심의 세계화 바이러스를 퇴치할 항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병균이 들어오는 것을 원천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옳은 대안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런 세계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항체 바이러스’, ‘항체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 감각적인 쾌락을 향해서 전 세계인들이 지금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정신은 날로 공허하고 피폐해지고 불안에 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날 우리 민족문학과 민족과 더불어 이루어졌던 문학 예술인들은 이런 점에서 너무 외재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 성찰적인 요소가 너무 부족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날 인류를 뒤덮고, 휩쓸고 있는 물질적이고 외부적인 요소와 반대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면성을 확보하고 자기 성찰적인 문화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생태계의 위기, 인류 문명의 절멸을 가지고 온다고 하는데, 이런 위기를 생각하더라도 외적 저항에 치중했던 민족문화가 성찰적이고 내면성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옳은 방향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계속 이어질 여러분들의 지적을 통해서 섣부른 얘기가 좋은 결론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