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3:7]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성...유하던 성이냐 - 두로의 어제와 오늘이 대비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놀람이 함의된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한다. 두로와 관련된 세 가지 요인이 이 놀람을 더욱 증폭시킨다. 첫째, 두로의 유구한 역사이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두로의 도성이 약 2,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두로의 활력성이다. 이 활력성은 모험성과 진취성이 충만한 상업적 활동에서 기인된 것이며, 두로의 사치와 교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셋째, 두로의 끝없는 개척 정신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활력으로 먼 데까지 나아가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카르타고, 다시스 등과 같은 식민지들을 건설하기에 바빴다.
[사 23:8]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고들은 방백이요 그 무역자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이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 히브리어 원문에 이 물음이 문두에 나온다. 실상 이 물음이 8-14절의 주조를 이룬다. 두로처럼 역사성이 깊고, 활력이 충만하며, 개척 정신이 강한 나라가 몰락한 데는 역사의 우연 이상의 더 큰 무엇이 개입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선지자는 두로의 몰락이 주는 충격을 더하기 위해 과거 두로가 국제 사회에서 점했던 위치를 상기시킨다.
[사 23:9] "만군의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 직역하면 '땅의 모든 존귀한 자들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이다. 어원적인 면에서 '니크바딤'과 '하켈'은 '무겁다'와 '가볍다'는 대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 23: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찌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딸 다시스여...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 두로의 패망은 곧 그 밑에서 속박당해 온 속국들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스는 그 한 예로서 본문에 언급된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두로와 그 식민지 다시스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비유된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 다시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어떤 간섭도 받음이 없이 마치 나일 강이 넘쳐서 제멋대로 흐름과 같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사 23: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을 내려 그 견고한 성을 훼파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 두로의 파멸이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임을 선지자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손을 펴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숙한 이미지이다). 그가 바다에 손을 펼치심으로 바다에 의존하던 열방들 곧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왕을 섬기고 있던 페니키아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사 23:12]"가라사대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딸 다시스여...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 두로의 패망은 곧 그 밑에서 속박당해 온 속국들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스는 그 한 예로서 본문에 언급된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두로와 그 식민지 다시스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비유된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 다시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어떤 간섭도 받음이 없이 마치 나일 강이 넘쳐서 제멋대로 흐름과 같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