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로 지어진 옷
나희덕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사라진 손바닥>(2004)-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의지적, 역설적
◆ 특성
① 시어의 대조를 통해 주제의식을 강조함.
② 역설과 도치법을 통해 의미를 강조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봄비를 건너간다 /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적 의미를 부각함.
의연하고 당당하게 시련을 이겨나가는 흰 나비의 모습
* 비 → 현실적 어려움이나 시련을 의미
*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창작인의 고통
*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 → 현실적 어려움, 시련
* 몸을 태우고 남은 재 → 시를 창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고통과 노력, 그것의 결과물
*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 시 창작인으로서의 고통
* 저 사람 → 새로운 시적 대상, '흰 나비'와 동일시됨.
*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 역설적 표현, 고통을 극복한 정신적
성숙을 의미함.
*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 도치법, 고난의 승화
◆ 주제 : 현실을 이겨내고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봄비 속을 날고 있는 흰 나비
◆ 2연 : 나비의 고요하지만 격렬한 날갯짓
◆ 3연 :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지만 걸음이 가벼운 '저 사람'
◆ 4연 :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시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 '고요함'과 '격렬함', '무거움'과 '가벼움', '젖음'과 '마름'의 대비를 통해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아름다움을 향한 영혼의 비상을 '나비의 날갯짓'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흰 나비'의 모습을 통해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 내고 시를 창작해 내는 시인의 삶을 우회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 더 읽을거리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가진 사람은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긴다.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가는 나비의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사실 얼마나 격렬한 삶의 욕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퉁겨내면서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으며 가는 나비! 그 나비는 제 마음 몇 배의 돌을 굴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사람과 같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무거운 슬픔을 물리치는 힘도 고요히 간직한 사람이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인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재 혹은 흰 재인데, 이건 삶의 허무나 혹은 어떤 큰 지혜를 가르키는 바, 그런 걸 소유한 사람은 역시 남보다 몇 배의 무거운 돌멩이를 굴리면서도 나비처럼 고요하고 가볍게 한 세상을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빗속의 나비날개와 흰 재와 그것을 무욕의 사람과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작가소개]
나희덕 Ra Heeduk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66. 충청남도 논산
소속 :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교수)
학력 :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데뷔 : 1989년 중앙문예 '뿌리에게' 등단
수상 :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
경력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마른 물고기처럼
작품 : 도서, 공연
<약력>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창작과비평》, 《녹색평론》의 편집자문위원을 역임했다. 1998년 제17회〈김수영문학상〉, 2001년 제12회 〈김달진문학상〉, 제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 부문, 2003년 제48회〈현대문학상〉, 2005년 제17회〈이산문학상〉, 2007년 제22회〈소월시문학상〉, 2010년 제10회 〈지훈상〉 문학 부문, 2014년 제6회 〈임화문학예술상〉, 제14회 미당문학상,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1]을 수상했다.
<저서>
-시집
《뿌리에게》(창작과비평사, 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작과비평사, 1994)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야생사과》(창비, 2009) ISBN 978-89-364-2301-8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ISBN 978-89-320-2530-8
《그녀에게》(예경, 2015)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
<시인의 말>
-《뿌리에게》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담아내는 일이란 결국 그것의 비참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면, 느릿느릿, 그러나 쉬임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매순간 환절기와도 같을 세월 속으로.
-《그곳이 멀지 않다》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두워진다는 것》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사라진 손바닥》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 시
나희덕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땅끝, 배추의 마음, 뿌리에게, 푸른밤이있다
-<배추의마음> :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느끼는 생명의 가치를 주제로 한다. 배추를 사람처럼 대하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으며, 독백체의 어투로 생명존중이라는 마음을 고백한 작품이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말(馬)과 말의 이중의미를 한데 어우르며 표현하였으며, 지식인의 언어 또는 시인의 말이 땅끝에서 퍼져나가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진중하게 고백하고 있는 작품이다.
-<땅 끝> :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어, 힘든 삶에서 느끼는 것을 표현했으며, 또한, 절망의 끝에서 다시 찾은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시적 화자가 말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산문집
《반 통의 물》(창비, 1999), 《저 불빛들을 기억해》(하늘바람별, 2012)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달, 2017)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2003), 《한 접시의 시》(창비, 2012)
-편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삼인, 2008),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나라말, 2013),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도서출판b, 2012)
첫댓글 재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삶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여름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올 여름 휴가는 계획하고 계시는지요?
오늘도 여유로움과 함께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