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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내 고향 순창 나들이
여행일 : ‘20. 10. 17(토)~19(월)
여행지 : 전라북도 순창군(책여산, 강천산), 임실군(국사봉)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손아래 남동생이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예식장이 머나먼 광주 땅이다. 거기다 코로나가 난리까지 치지만, 그렇다고 집안 행사인데 가보지 않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일산에 사는 여동생이 자기네 차로 편히 모시겠다니 말이다. 가타부타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2박3일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숙소 예약은 첫째 여동생이 이미 해놓았고, 현지에서의 안내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둘째 여동생 내외가 맡았다. 평생 직업이던 교편생활을 조기에 접고 여행 다니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부부이니 나머지 네 가족은 그냥 따라만 다니면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고향 순창 여행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굽어 흐르는 섬진강의 청류로 순창을 읽을 수도 있고, 곳곳에 숨어있는 명당으로도 순창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담을 삼은 정자의 풍류로 순창을 볼 수도 있다. 그윽한 자연을 앞세운 산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비어있는 종이 위에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 여행의 시작은 회문산 자연휴양림(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예식이 저녁시간(17:30)에 있다 보니 혼주 측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아예 만찬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모처럼 만나본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넉넉하게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미리 예약해놓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직행. 88고속도로 순창 IC에서 내려와 27번 국도를 타고 전주방면으로 올라가다 장암교차로(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624-5)에서 ‘회문산로’로 옮긴다. 이어서 구림방면으로 2㎞쯤 들어가다 자연휴양림의 입구 삼거리에서 이정표(휴양림→1.7㎞)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1993년에 문을 연 회문산 자연휴양림은 우리가 머물게 될 숙박시설(16개 동) 외에도 강의동과 야영장, 임간수련장, 물놀이장, 산책로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회문산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표본으로 활용하는 생태교육장은 흔치않은 자랑거리다.
▼ 휴양림의 가장 큰 볼거리는 ‘회문산 역사관(回文山歷史館)’이다. 역사관은 ‘빨치산사령부 벙커’에서의 생활모습을 구현하면서 2000년 시작됐다. 그러다가 2011년 빨치산 사령부를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역사관을 새로 짓고 회문산과 관련된 내용들을 벽화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회문산의 명소인 천근월굴(天根月窟) 등에 대한 소개, 회문산 자락에 위치한 천주교 성지에 대한 설명, 만일사(萬日寺)와 순창 전통 고추장에 대한 이야기, 순창을 지킨 사람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순창의 항일 의병 활동, 풍수지리와 순창의 풍수지리, 1950년 6·25 전쟁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회문산 지역은 1846년(헌종 12) 천주교 병오박해 때 삼족(三族)을 멸하는 화를 피해 김대건 신부의 일가친척들이 피신한 곳이며, 한말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임병찬(林炳瓚), 양윤숙(楊允淑) 등의 의병대장이 일제와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곳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사령부 터로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하였으며 사령부 막사가 설치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회문산은 조선의 건국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민족 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六·二五良民犧牲者慰靈塔)이 추가로 세워졌다. 탑은 중앙에 높이 10여m의 화강암 돌기둥을 두고, 그 앞쪽에 양손을 하늘로 뻗은 여인이 서있다. 그 왼편에 여인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像), 그리고 우측에는 철모를 쓴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을 배치했다. 참고로 회문산의 빨치산 활동은 1948년 여순사건에서 패퇴한 패잔병 가운데 일부가 회문산으로 숨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연합군의 북진으로 갈 길을 잃은 좌익 동조세력이 회문산에 모여들면서 활동은 더욱 거세진다. 이후 국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지리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이때 희생된 수많은 양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0년 이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의 ‘남부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목에서 말한 고추장 색깔의 첫 번째로 사상적인 빨강과 관련된 곳이라 하겠다.
▼ 이왕에 왔으니 회문산의 정상을 밟아봐야 하겠지만 수년 전에 이미 올랐던 것을 핑계 삼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올려본다. <정상은 열 평 조금 못되는 盆地, 북서쪽은 바위 벼랑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잘 열린다. 많은 산들이 그 머리위에 TV중계탑이나 헨드폰 기지국들을 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어김없이 흉물스런 鐵製塔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회문산은 그 모습이 회문봉을 중심으로 깊은 계곡을 좌우로 뒤집은 U자 형상이다. 그 말발굽의 끄트머리를 출렁다리로 연결해 놓았고...>
▼ 당시 가장 의미 있게 보았던 풍경도 올려본다. 정상에서 10여분 정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는 바위다. 집체만한 바위의 한쪽 면에 적힌 상형문자가 ‘천근월굴’로 판독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천근은 陽으로 남자의 性을 그리고 월굴은 陰으로 여자의 性을 나타내어, 陰陽이 한가로이 왕래하니 소우주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란다. 陰陽調和. 아니 調和로운 男女合宮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하나 더, 묘에 대한 당시의 내 기록이 있어 잠깐 옮겨본다. <회문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다른 유명한 산들에 비해 墓가 무척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회문산 정상 바로 옆에도 묘가 있었고, 등산로 주변에 조그만 틈만 보여도 어김없이 묘들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이다. 이곳 회문산은 우리나라 5대 明堂중의 하나로서 예로부터 靈山으로 알려져 왔다. 홍문대사(홍성문)가 이곳에서 道通한 후, 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하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代까지 간다고 했다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이곳에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정상과 주면을 수많은 묘들이 차지하고 있을 수밖에...>
▼ 다음 날 아침, 이동 중에 ‘인계초등학교’에 들렀다. 고학년이 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전주로 유학을 떠났지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추억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당시 나는 동급생들보다 2살 정도가 어렸다. 거기다 작달막한 유전자까지 더해진 내 키는 동급생들보다도 머리 하나쯤은 낮았다. 그러니 오리(2㎞)나 되는 등굣길이 가뜩이나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중간에 만나는 공동묘지나 문둥이가 산다는 골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신은 물론이고 어린이 간을 떼어간다는 문둥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행여 놓치기라도 할세라 동급생들 뒤꽁무니를 쫄쫄 따라다닐 수밖에... 그나저나 반백년을 넘겨 다시 만난 운동장은 엄청나게 작았다.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 심어진 벚나무 고목들도 역시 작달막하다는 느낌이다. 작았던 내 키가 그만큼 자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 첫 번째 방문지는 순창(적성면·동계면·유등면)에 위치한 ‘책여산’이다. 책여산은 두 개의 정상을 갖고 있다. 순창과 남원을 잇는 24번 국도를 경계로 남쪽의 ‘순창 체계산’과 북쪽의 ‘남원 책여산’으로 나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 모두 ‘순창 책여산’이다. 특히 북쪽의 봉우리를 ‘남원 책여산’으로 부르는 것은 턱도 없는 오류이다. ‘순창 책여산’은 남쪽 능선(책암마을 들머리↔무량사 위 능선)에서 남원 땅과 잠시 어깨를 맞대고 있을 따름이고, 북쪽의 ‘남원 책여산’은 그 경계가 아예 산자락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 고려사(高麗史)에 <적성현(赤城縣)은 본래 백제 역평현(礫坪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적성(赤城)이란 지명이 ‘붉음(赤)’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 또한 고추장 색깔이 아니겠는가.
▼ 제1주차장 근처의 들머리(이정표 : 출렁다리 295m, 어드벤처전망대 560m)에는 환영인사와 함께 ‘채계산(釵笄山)’에 대한 안내문을 적어놓았다. 적성강변 일대에서 바라보면 비녀를 꼽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唱)을 읊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선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다면서, 그 중에서도 조선말기의 명창인 이화중선(李花中仙)이 유명하다는 자랑까지 빼놓지 않았다. 이밖에도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아 ‘책여산(冊如山)’, 적성강을 품고 있다고 해서 ‘적성산(赤城山)’이라고도 부르며, ‘화산(華山)’이란 또 다른 이름은 화산옹 바위를 품고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참고로 이화중선은 장재백(張在伯, 순창 출신의 명창으로 남원에서 활약했다)의 조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 이곳 적성에서 머물며 5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 계단을 오르려는데 오른편 편백나무 숲속에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일단은 들어서고 보는 이유이다. 그렇게 들어선 숲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결코 작지가 않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여간 진한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행복이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속설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 중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출렁다리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순창 고추장을 닮은 강렬한 빨간색이 인상적인 다리. 두 산등성이를 잇는 높이 90m의 다리 아래로 만물을 품은 세상이 갇혀있다. 그림치고는 조금 어색한 그림이 되어버렸지만 뭐가 대수겠는가. 상식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게 요즘사람들이다. 최근 이곳이 순창 여행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295m.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전 구간이 나무계단으로 되어있어 오르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올라선 출렁다리의 초입에는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 중간에서 보는 조망이 더 나을 것 같아 다리부터 먼저 건너기로 한다. 2020년 봄, 순창책여산과 남원책여산이라 불리던 두 봉우리 사이의 협곡에 최근 새로 놓인 이 다리는 길이가 270m나 된다. 높이는 90m, 가장 낮은 곳도 75m에 이른다. 국내에서 무주탑 현수교 가운데 가장 길다고 한다. 진안 구봉산의 구름다리 보다 170m. 파주 감악산에 들어선 출렁다리보다도 50m가 길고, 한국기록원이 국내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인정한 청양군의 천창호에 비해 63m나 더 길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赤誠江)’의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채계산을 휘돌아가는 저 물줄기는 광양만에서 남해로 흘러드는데, 조선시대에는 복흥의 도자기와 적성의 옥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중국 상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붐비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저 강에는 물이 넘실거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운암댐의 건설로 인해 물의 흐름이 김제평야 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 반대편에도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방금 건너온 출렁다리와 건너편 ’남원책여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특히 남원책여산(아래 사진에서 맞은편 산봉우리)의 정상어림에 조성된 ‘어드벤처전망대’도 한번쯤을 들러볼만한 곳으로 꼽힌다.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암릉은 물론이고, 적성 고을의 들녘이 발아래로 널따랗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 전망대는 출렁다리를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죤이기도 하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구름다리를 건너는 일은 수월치만은 않다. 주탑(柱塔)이 없는 현수교라선지 위아래는 물론이고 좌우로까지 큰 폭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40층 높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거기다 상하좌우로 흔들리기까지 한다면 이건 숫제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채계산의 출렁다리를 건너는 일은 짜릿한 스릴. 한여름에도 온몸이 오싹오싹해지는 공포 체험이 된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고 난간을 붙잡은 손과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 능선을 따라 놓인 나무계단(이정표 : 한옥정자↑ 62m/ 하산로1← 350m/ 하산로2→ 271m)을 오르면 회문산 및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채계산’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6년 전에 다녀온 것을 핑계로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책여산의 남쪽 정상인 송대봉(松薹峰)은 하도 위태로워 새들조차 앉기를 꺼려했다는 날카로운 바위봉우리이다. 특히 남원 책여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옮겨놓기라도 한듯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 이어진다. 짜릿한 스릴을 맛볼 수 있는 매력 넘치는 구간이다.
▼ 책여산 등정을 포기했으니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주차장이 있는 괴정리 방향(하산로1)이다. 이 구간은 엄청나게 경사가 심하다. 하지만 나무계단이 놓여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보기 드문 기경(奇景)들을 눈에 담으며 시나브로 내려가면 된다.
▼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놓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날머리와 주차장 사이에다 ‘농·특산물 판매장’을 배치했다. 그리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드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참고로 내가 태어난 마을은 이곳에서 4㎞도 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적성강이 내 어릴 적 물장구치며 다슬기 잡던 놀이터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물놀이가 싫증이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채계산(釵笄山)’에 올랐었다. 중턱에 있는 ‘금돼지굴’이 우리들의 또 다른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금돼지굴’에는 적성원님으로 부임만하면 부인이 실종되자 궁리 끝에 한 원님이 부인의 허리에 명주실을 달아놓고 부인을 끌고 가는 금돼지를 쫓아가서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판매장 안에서는 감과 밤, 버섯, 고구마 등의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꿀처럼 약간의 손질을 거친 특산품도 보였다. 관광객들로부터는 커피나 토스트,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가 더 인기를 누렸지만 말이다.
▼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강천산이다. 순창의 옛 이름은 옥천(玉川), 그리고 오산(烏山)이었다. 그 어원을 세세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순창이 예로부터 물과 산이 아름다운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자연 덕분일까, 순창은 예로부터 장수의 고장이었으며, 지금도 순창의 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받는 게 강천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제1호로 지정된 ‘군립 공원’으로 들머리에 집단촌이 들어서있으니 하루를 묵어가기에도 좋으며, 역사가 얽혀 있으니 이야기 듣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건 그렇고 강천산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처연할 정도로 붉은 단풍이다. 이곳 강천산이 고추장 색깔을 닮은 내 고향에서의 마지막 여행지가 되는 이유이다.
▼ 국내 최초의 군립공원이란 명성에 걸맞게 공원은 잘 꾸며져 있다. 애기단풍 숲 사이로 이어지는 왕복 5km의 탐방로(매표소↔구장군폭포)를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황토모랫길로 조성했는가 하면, 곳곳에 산림욕장을 배치해 목재데크를 따라 숲속 공기를 흠뻑 들이킬 수 있도록 했다.
▼ 매표소를 조금 지나면 ‘병풍폭포’가 눈에 띈다. 병풍처럼 넓게 펼쳐져 쏟아지는 물주기가 장관인 폭포이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어왔다. 산을 끼고도는 계곡과 바위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멋진 풍경에다 사람의 손길을 더한 곳이 바로 ‘병풍폭포’다. ‘병풍바위’라는 자연에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지자체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가며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걸 보면 말이다.
▼ 전형적인 ‘스토리텔링’도 보인다. 길가에 있는 평범한 바위에다 ‘거라시바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너스레까지 덧붙였다. 걸인들이 이 굴(사실은 굴도 아니다)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사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루에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외진 곳에서 과연 시주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이야기일 따름이니 그냥 넘어가자.
▼ 다음은 ‘천우폭포’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자연적으로 폭포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무래도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누군가는 순창을 일러 ‘화장기 없는 여자’와 같다고 했다. 수더분한 데다 다양한 매력이 있어서 화장을 하는 대로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곳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또 ‘강천산’을 여기저기 손을 대서 만든 경관이지만 그윽한 자연이라고 평했다. 천우폭포가 그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 메타세쿼이아 길도 운치가 넘친다. 참! 그러고 보니 아까 강천산으로 들어오는 도중에도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났었다. 메타세쿼이아라 하면 사람들은 보통 담양의 것을 최고로 꼽는다. 하지만 이곳 팔덕면이 고향인 제수씨의 말로는 순창의 것도 이에 못지않단다. 특히 가로수 길을 걷는다고 담양처럼 야박스럽게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란다. 아무튼 담양은 거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있다는 걸 알고 가는 곳이지만, 순창은 모르고 문득 만나는 것이어서 더 반갑고 감격적이다.
▼ 강천산(剛泉山)의 또 다른 매력은 계곡이다. 오죽했으면 소금강을 나타내는 ‘강(剛)’자 다음에 ‘샘 천(泉)’를 붙여 놓았을까. 물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며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용소(龍沼)’도 그런 풍경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웅덩인데 윗용소에는 숫용이, 그리고 이곳 아랫용소에는 본처인 암용이 살았었단다. 안내판에는 풍산면 향가에 살던 소첩용과의 다툼도 적혀있었으나, 첩이 본처를 이기는 내용이 귀에 거슬려 옮기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일주문(一柱門)을 만났다. 그런데 문에 걸린 편액(扁額)이 조금 이상하다. 일주문이라는 게 본디 절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 번째의 문일지니, ‘강천산 강천사(剛泉山 剛泉寺)’라고 적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앞뒤 다 빼고 ‘강천문(剛泉門)’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쩌면 군립공원을 정비하면서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맞다. 강천산의 입장료도 절이 아닌 지자체에서 받고 있었다.
▼ 강천사로 오르는 길가에는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돌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이 바라는 바를 담아 하나씩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못생긴 외모라고 해서 품은 염원까지 비하시키진 말자.
▼ 30분쯤 걸었을까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잡은 강천사(剛泉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887년(진성여왕 1)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기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몇 차례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불에 훼손되었다가 이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창건자 도선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는 예언이 적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선은 한국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매표소에서 이곳 강천사까지는 1.65Km이다.
▼ 강천사의 풍경소리를 뒤로하자 개울 건너로 ‘삼인대(三印臺,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가 나타난다. 1506년의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나 그의 부인인 ‘신씨(愼氏)’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축출된다. 10년 뒤, 새로 맞이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이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 축출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이때 목숨을 건 결의용으로 관인(官印)을 걸어놓았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불러오다, 1739년(영조 15년)에야 신씨가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는 비각과 빗돌을 세우게 된다. 참! 근처에는 ‘절의탑’이라고 쓰인 돌탑도 세워져 있었다. 2004년 순창군내 300여 개가 넘는 각 마을들에서 돌 2개씩을 가져와 쌓았다고 한다. 순창의 모든 기(氣)를 품었을 것은 당연한 노릇. 그러니 순창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 근처에는 수피가 아름다운 300년이 넘은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97)’도 있다. 외형은 늙고 보잘 것 없지만 해마다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특히 못생긴 모과 몇 알에서 풍기는 향기는 온 마을을 덮는다고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세 번 놀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먼저 저처럼 너무 못생긴 외모에, 그리고 못생겼는데 향기가 너무 좋아서, 마지막은 향기로운데 너무 뜹뜰해서 놀란다는 것이다.
▼ 주변 풍경은 수년 전 들렀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꽃무릇(石蒜)이 눈길을 끈다. 최근에 새로 식재한 모양인데 산자락이나 길가 공터 등 제법 무성하게 나라나있었다. 2006년 문화관광부 주관 ‘전국 최우수 관광자원’,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뽑혔을 만큼 이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다 다른 하나의 옷을 더 입히려는 모양이다. 하긴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니 그 정도의 공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 석산(石蒜). 즉 꽃무릇은 가정에서도 흔히 가꾸지만 사찰 근처에서 주로 발견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 식물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사용하며, 고승들의 진영을 붙일 때도 썼기 때문이란다. 또 하나. 꽃무릇은 상사화와 자주 혼동된다. 언뜻 보면 두 꽃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이 똑같다. 그러나 꽃 색깔이 달라서 석산은 붉은색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이다. 상사화가 여름꽃인데 반해 꽃무릇은 가을꽃이라는 점도 다르다. 하지만 국내의 상사화 축제를 찾아가 보면 상사화보다 더 많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눈에 거슬리는 풍경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생동물도 아닌, 특히 이곳 강천산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판다’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포토죤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인데, 이왕이면 신토불이를 살려 ‘반달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야생동물로 바꿔 세웠으면 어떨까 싶다.
▼ 강천산은 애기단풍부터 노랑단풍까지 숨겨진 단풍 명소이다. 특히 현수교 조금 못미처부터 구장군폭포까지 800m가량의 아기단풍이 장관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저 단풍나무들이 순창고추장처럼 붉은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할라치면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 이 부근은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아 흔히 애기단풍으로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를 이룬다. 타오르듯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보기 좋다.
▼ 단풍으로 곱게 물든 풍경을 떠올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구장군폭포(매표소에서 2.65Km 거리)’에 도착해 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바로 앞에 팔각정과 벤치 등 쉴 자리가 많고, 폭포가 잘 보이는 곳에 데크를 만들어 사진 찍기도 좋다. 구장군폭포는 옛날 마한시대 혈맹을 맺은 아홉 명의 장수가 전장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차라리 자결할 바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자’는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 구장군폭포는 병풍폭포와 마찬가지로 인공폭포이다. 하지만 병풍폭포가 소담한 여성의 미를 간직했다면, 구장군폭포는 웅장한 남성미가 돋보이는 폭포다. 용이 꼬리치듯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용천산(龍天山)이라 부르던 강천산은 산세가 수려하다. 그 산세에다 사람의 손으로 세 줄기의 폭포를 만들었으니 그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 거기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도 자연스러워 원래 있던 폭포처럼 느껴진다.
▼ 고개라도 들라치면 허공에 걸린 출렁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1980년에 완공된 80m(폭 1m) 길이의 현수교로 철계단을 따라 다리 위로 오르면 50m 아래의 골 바닥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설치될 당시만 해도 담력 약한 사람은 섣불리 올라서지 말라는 너스레도 있었지만, 요즘은 이 보다 더 높은 곳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니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 강천산까지 둘러봤으니 배가 출출해질 건 당연한 노릇.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차례이다. 내 고장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다. 십여 년 전, 나를 초대했던 군수님은 순창의 맛이 남도의 맛이라며 걸쭉한 밥상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메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순창 땅을 잠시 벗어나 이웃 동네인 담양으로 가잔다. 죽통밥에 곁들인 떡갈비가 먹을만하다면서 말이다. 거기다 안내를 맡은 여동생 내외는 담양의 새로운 명물이라면서 청둥오리 전문점인 ‘유진정’ 카드까지 내놓는다. 그네들의 말대로 청둥오리전골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오리의 머리와 뼈를 이틀 동안 푸욱 삶아냈다는 육수가 끓으면, 대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부추와 깻잎 등 신선한 야채를 살짝 익혀 먹는 방식인데, 담백하며 깊은 맛이 나는 육수에 몸을 푼 야채의 향이 코끝에서 향기롭다. 거기다 ‘동의보감’에는 오리가 정력 강장제, 해독작용,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고 성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했다. 뛰어난 맛에 건강까지 챙겼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지척에 있는 임실군의 옥정호(玉井湖)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옥정호 제일의 경관인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국사봉’이다. 내비게이션으로도 검색이 가능한 ‘국사봉 전망대’의 초입에 카페까지 들어선 주차장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 차를 대기도 좋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자락에 놓인 긴 나무계단을 따라 ‘국사봉 전망대’로 향한다. 참! 차에서 내리면 100m쯤 떨어진 아래쪽 언덕에 지어놓은 누각 형태의 전망대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일부러 가볼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는 ‘붕어섬’이 조망되지 않기 때문이다.
▼ 주차장 옆 꽃밭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가을색(秋色)’하면 사람들은 울긋불긋 눈을 휘황하게 하는 단풍이나, 맑은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 내는 억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곱고 그윽한 그 빛. 푸른 밤 달빛을 닮은 꽃, 가을 안개처럼 분분이 피어나는 꽃, 순백의 구절초가 전하는 색 역시 가을색이다. 구절초는 5월 단오에 줄기가 5마디였다가 음력 9월9일(중양절)이면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 흔히 들국화로 부르는 그 꽃이다. 무릇 꽃이란 한 송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무리를 지으면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하는 법이다. 구절초 또한 마찬가지인데 마침 이 근처에는 ‘구절초 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임실 치즈마을’에 들를 예정(코로나 때문에 문이 닫혀 못 들어갔지만)인 우리 일행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새색시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구절초가 큰 군락을 이뤄 피어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비탈진 산자락을 파고드는 계단은 가파르다. 거기다 제법 길기까지 하다. 그러니 다리품을 팔아도 한참을 팔아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통신사 기지국시설이 있는 능선에 오른다. 이곳에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첫 번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붕어섬은 상수원 보호구역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원래 이 근방 산군을 이루던 봉우리가 섬진강댐 건설로 물이 채워지면서, 고향을 잃은 수몰민처럼 본모습인 산을 잃고 섬이 되어버린 곳. 그나마 바위 절벽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을 옥정호 관리선의 운항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폭파하면서 진짜 섬이 되어버렸다. 옛 주민들은 외따로 떨어진 산이라며 ‘외얏날(외안날)’이라고 불렀다. 강줄기가 바깥 날과 안 날을 빙돌아 S자를 그리며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날’은 산등성이를 말한다. 더 오래 전에는 ‘섬까끔’이라고 불렸다. ‘까끔’은 전라도 방언으로 ‘벼랑’이다. 외안날의 북동쪽 날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생긴 데서 연유했다. 그러다가 옥정호에 물이차면서 물안개를 찍으려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고, 예술성 짙은 그들의 눈에 섬이 (금)붕어로 비쳐지면서 ‘붕어섬’으로 불리게 됐다. 전망에서 바라보는 붕어섬은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금붕어. 그것도 화려한 지느러미를 펼치고 유유자적 헤엄치는 중이다. 치렁치렁한 꼬리와 불룩한 배, 툭 뛰어나온 눈까지 금붕어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붕어섬 주변 옥정호의 옥빛 속살도 제대로 보인다. 담백한 수채화 같은 풍경에 눈과 마음이 취한다.
▼ 옥정호 풍경의 절반은 물안개의 몫이다. 새벽녘 물안개가 호수를 감쌀 때면 그야말로 선경이 따로 없단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올랐던 우린 물안개를 만나지 못했다. 호수면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아침햇살을 받으면 마치 신선이나 노닐 법한 풍경을 그려낸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1년 만에 만난 형제, 자매들이니 나눌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웬만큼 조망을 즐겼다면 정상을 향해 또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길은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하면, 너무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경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좌우로 몸을 비틀어가면서 말이다.
▼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둘 모두 붕어섬이 잘 조망되는 곳에 설치했는데, ‘높이 오를수록 풍경은 깊어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순번이 높아질수록 나타나는 붕어 또한 생동감을 더해간다. 참! 세 번째 전망대에는 이야기판도 걸려있었다. 조선 중기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玉井)이 되겠구나.’라고 예언한데서 ‘옥정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훗날 각색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호수가 됐다.
▼ 전망대에 서자 더욱 또렷해진 금붕어가 꼬리를 친다. 그런데 그 금붕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게 아닌가. 옷 벗은 나무들이 숭숭 솟은 붕어의 비늘처럼 보이는데, 그 사이사이에 길을 내고 정자를 세우는 등 공사가 한창인 것이다. 관할 지자체인 임실군에서 ‘섬진강 에코뮤지엄 사업’의 일환으로 잔디마당과 숲속도서관, 꽃이 가득한 정원 등을 갖춘 휴식공간을 만드는 중이란다. 하나 더.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바라보던 저 섬을 앞으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게 된단다. 국사봉 전망대 부근에서 붕어섬까지 출렁다리를 놓고 짚라인까지 설치한단다.
▼ 또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자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국사봉(475m)을 거치지 않고 곧장 오봉산(513m)으로 가는 길이다. 오봉산은 높지 않고 주변 풍경이 좋아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렇다고 5분만 더 투자하면 ‘국사봉’을 넘을 수 있으니 누가 이용하겠는가마는 그쪽 길도 제법 또렷하다. 아니 등산로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하긴 장삼이사의 마음이 어찌 똑 같을 수 있겠는가.
▼ 바위벼랑에 기대어 만든 나무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국사봉(國士峰) 정상이다. 20~30평은 족히 됨직한 정상은 온통 데크로 도배되어 있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무나 바위 등 기존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려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국사봉이 품고 있는 기(氣)를 헤치지 않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동쪽 아래 잿말에서 12명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진사 벼슬을 했다니 말이다. 이는 또 국사봉(國士峰)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드넓은 옥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운암대교까지 시야에 잡힌다. 옥정호를 포위하고 있는 오봉산, 묵방산, 회문산도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진안 마이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요산공원’일 것이다. ‘붕어섬 주변 생태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생태공원이다. 호수 쪽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최응숙(崔應淑)이 지었다는 ‘양요정(兩樂亭, 전북 문화재자료 제137호)’과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세운 ‘망향탑’도 들어서 있다. 봄이면 갓꽃, 튤립, 수선화, 팬지 등 아름다운 꽃들이 넓은 대지를 형형색색으로 수놓아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데, 이때를 기해 ‘옥정호 꽃걸음 빛바람 축제’가 열려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 굴곡이 이어지는 리아스식 호숫가에는 도로가 보일 듯 말 듯 연결된다. 저 도로를 지나는 여정도 하나의 여행코스가 된다. 옥정호를 삶의 터로 삼고 있는 운암리와 마암리를 잇는 저 도로(749번 지방도)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로의 아래 호반에는 ‘옥정호 물안개길 마실길’이 조성되어 있다. 들쭉날쭉한 강변길을 따라 걸으며 옥정호의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이다.
▼ 국사봉(國士峰)은 해발 475m의 작은 산이다. 하지만 등산객들 사이에는 인기가 높은 편이다. 옥정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교차가 심한 날 새벽에 산에 오르면 옥정호를 감싸고 있는 운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섬진강(蟾津江)의 젖줄인 ‘옥정호’는 1965년 섬진강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물을 배수하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하다.
▼ 산을 내려오니 배가 출출해져 있다. 마침 옥정호 근처는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점이 많고 유명하다. 과거 깨끗한 물에서 어업을 주로 삼았던 주민들 덕분이리라. 머리만 채울 게 아니라 배도 채워야겠다며 찾아간 곳은 운암면사무소의 소재지인 상운암마을. 아까 주차장에서 눈여겨봤던 민물요리 전문점(상운암 전주식당)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주요 메뉴는 빠가사리(동자개)와 메기, 민물새우를 넣은 매운탕. 그밖에도 다양한 사이드메뉴를 내놓는데 우리는 이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 ‘빠·새·메탕’을 주문했다. 매운탕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슬기탕’을 선택했는데 부재료로 아욱이나 부추를 넣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애호박을 넣고 있었다. 맛은 물론 좋았다. 매운탕을 먹은 일행들도 맛과 양이 훌륭하다는 평이다. 거기다 밑반찬으로 나온 채소튀김과 도토리묵도 별미였다. 식당 외벽에 걸어놓은 KBS, MBC, SBS, JTV 등 ‘언론이 극찬한 대한민국 대표 맛집’이라는 자랑이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