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교육인 출신 정치인의 김형민은 1907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38살인 1946년 9월28일 최초로 서울시장격인 경성부윤이되어 수도명을 서울시라고 고쳤고,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을 역임했다
수도 명칭 서울이 한글이기에 반대가 많았지만, 수도 이름이 쉽게 불려야 한다는 뜻으로
소신을 지켜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 이름이 되었다.
서울이란 이름의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나는 설(雪)울타리의 줄임말인 서울의 뜻을 선호한다.
겨울 눈(雪) 많이 내릴 때 연약한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 국가라는 뜻이다.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란 이외에도 일본식 한성을 모두 우리 언어로 바꾸었다.
서울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바꾸었다.
정(町)을 동(洞)으로, 통(通)을 로(路)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고쳐
서울시의 행정구역명을 지금의 형태로 바꾸었다.
황금정통(고가네마치도리)이나 본정통(혼마치도리)같은 일본식 가로명도
이 때 을지로, 충무로 등 대한민국 영웅들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광수 등 민족주의자들이 일제말기 친일파가 된 것은 영어를 못했기 때문이다
김형민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 교육학 학사 미시간 대학교 교육학과 석사를 마치고
개성 송도 송도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를 하였고
1943년 불온사상가로 지목되어 총독부 개성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
1945년 8월 16일 3.1 석유상사 대표이사 1946년 5월 10일 경기도 경성부윤,
1946년 9월 28일 경성부의 서울시 승격으로 초대 서울특별시장,
1948년 12월 15일 3.1 석유상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일제하 한국학의 거두들이 일제 말기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행위를 함으로 반민족범죄자가 된 것은 당시 세계흐름을 영국과 미국으로 읽지 못하고
일본이 영원히 동북아 제국국가로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면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란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김형님은 세계사 흐름을 안 인물이었기에 38살에 서울시장을 할 수 있었다.
김형민은 젊지만 식견이 높았다.
이승만 우상화로 서울을 이승만의 호인 우남시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김형민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서울시로 밀고 갔기에
서울시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김형민, 대한극장을 세우다
김형민은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석유사업을 하며 돈을 벌었다.
애수 등 영화를 보면서 한국에 좋은 영화관을 만들어 서울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비와 서울시와 20폭스사의 협조를 얻어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극장 대한극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자유당은 반 자유당성향의 김형민에게 평균 9배를 넘는 세금을 추징해서
김형민은 대한극장을 포기하고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국쾌남에게 대한극장을 넘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