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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책은 마치 「사진첩」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당시 생생한 사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선배님?들의 ‘나를 울린 글’들이 주옥처럼 수 놓아져 있기도 하다. 어쩌면 그 당시로 돌아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진들이 너무 생생하고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책은 ‘박도’라고 다소 생소한 이가 사진을 모으고 편집했으며, 당시 전쟁을 체험하고 회상한 글은 작가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이 네 분이 썼다.
사진을 수집하고 편집한 박도 선생은 1945년 구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민학과를 졸업하고, 30여 년간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퇴직 후 강원도에서 장편소설 「사람은 누구를 그리며 산다」와 단편집 「비어 있는 자리」등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관련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1, 2」를 2005년 출간하기도 했는데, 2004년 우연히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방문하여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파일을 보다가, 아무 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시쳇더미, 쌕쌕이가 염소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배만 볼록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모습, 흥남부두 철수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 끊어 질듯 위태위태한 대동강 철교 위를 곡예 하듯 걸어서 남하하는 피난민, 부산 영주동 일대 판자집, 꽁꽁 언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 등을 보고는 그 전쟁의 실상을 못 보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고, 다행히 스캔은 허용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것을 사진첩으로 만든 것이 「지울 수 없는 이미지1.2」라고 한다.
그는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해야 할 책무로 역사의 진실을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전쟁 당시 사진들을 사진첩으로 엮은 데 이어서,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평소에 존경한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선생이 생생한 체험담을 ‘사진 자료라는 비단에 수를 놓는 증언으로 한국전쟁의 비망록이 되게 해 주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은 형제간에도 이편저편이 되고, 동족 간 총부리를 겨누던 골육상쟁의 전쟁으로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휴전상태로 남아 있다. 미국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탑 옆에는 전몰자 위령비가 서 있는데, 여기에 보면 전사자 수가 기록되어 있다. 미군 5만 4천여 명, 유엔군 62만여 명, 부상자 미군 10만여 명, 유엔군 1백만여 명, 실종자는 미군 8천여 명, 유엔군 4만 7천여 명이라고. 자유진영에서 사상자가 2백만 명에 달하고, 공산진영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보다 훨씬 많은 350만여 명이라고 한다. 어림잡아 500만 명이 넘는다. 어떻게 그들을 위령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독후감 삼아 사진 자료는 여기서 다 보여줄 수가 없겠지만, ‘비단에 수 놓은 것’같은 작가들의 이야기는 읽을 수 있어서 요약해 볼까 한다.
【1】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 --- 김원일
나는 1942년 김해 진영에서 태어났다. 내가 문단에 등단하여 30여 권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를 다룬 소설들이다. 남로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던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우리 가족은 1949년 봄 서울로 올라가 3개월 동안을 숨어지냈는데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1950년6월27일 우리 식구는 충무로에 있는 영진공업사 건물 지하 방공호에 숨어 있었다. 우리 식구 외에도 세 가족이 함께 그곳에 피해 있었는데, 모두 지하 남로당에 적을 둔 식구들이었다. 영진공업사 자체가 남로당 아지트였다. 밤새도록 벽을 뚫고 들리는 총소리와 포탄 터지는 소리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28일 새벽녘이 되어서 총소리가 잠잠해져 나는 살그머니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네거리에 영진공업사가 있었기에 나는 정적 속에 텅 빈 네거리로 나서 보았다. 총소리가 귓전을 스쳤고 길 건너 미명 속에 총을 든 여러 그림자가 획 지나갔다. 처음 본 북한군들이었다.
아침을 먹고는 을지로 쪽에 왁자한 함성이 터져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의 시가행진이 벌어지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북한군들이 인도에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홍안의 소년병도 섞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멍가게가 포탄에 박살 나 길가에 흩어져 있는 사탕을 주머니가 차도록 주워 담아왔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 이튿날인가 아버지가 집에 나타났다. 행색이 남루하고 텁수룩한 남자들이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연방 머리를 조아리더니, “김동지 고맙소”하고 우는 걸 보았다. 뒤에 안 일이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사상범’들로 이들은 석방되기 전 출신성분을 선별할 때 아버지가 관여해 그 고마움을 표하러 온 동지들이었다. 그날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북에서 대남사업 책임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 금강산 부근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들었다.
인공치하 석 달간 나는 서울에서 살면서 후방의 전쟁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7월 중순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습은 대단했다. 처음 한동안은 비행기가 뜨면 사이렌이 울렸으나, 시도 때도 없이 폭격을 해대자 나중에는 사이렌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한 번에 대여섯 대씩, 어떤 때는 열 대가 넘는 비행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쏟아붓고 포탄을 주르르 떨구곤 사라졌다. 서울은 차츰 잿더미로 변해갔다. 북한군이 남한 어디까지 해방시켰는지 그려 넣은 뉴스판이 거리 담벼락에 자주 바뀌어 붙었다. 영진공업사 앞 거리에는 부서진 북한군 탱크가 한 대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동네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당시 충무로는 포장이 되지 않은 상태로 장충동 빨래터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는데, 학교가 징발당하자 피난을 못 간 초등학교 학생들은 방학 때임에도 교회로 등교했고 북에서 온 여선생이 공부를 가르쳤는데 특히 북한 노래를 많이 배웠다. 피난 못 간 서울 시민들도 입에 풀칠은 해야 했기에 화원시장에 나가보면 사람 떼거리로 시골 대목장을 방불케 했다. 집에 있는 온갖 것을 갖고 나와 난전에 펼쳐 놓고 팔았다. 한번은 청계천에 놀러 나갔다가 청계천 바닥에 걸레처럼 던져져 있는 시체들을 숱하게 보았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던 때인지라 옆집 사람이 폭격을 맞고 죽어도 그러려니 했지 놀라지도 않았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도 불구하고 9월29일에야 서울 외곽이 뚫렸고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다. 14일 동안 북한군은 북으로 가져갈 것, 불태워 없앨 것, 잡아 둔 우익인사 처형, 좌익인사 북송 등 일을 끝냈다. 노래에도 있듯이 미아리 쪽이 아리랑 고개였다. 인공치하 석 달 동안 음으로 양으로 북에 협조했던 사람들도 후퇴하는 북한군에 줄을 대 식구들을 이끌고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중앙청에 꽂힌 태극기를 구경하러 동무들과 세종로에 나가봤더니 지금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중앙청 지하실에서 끌어낸 시신들이 길 가운데 이 층 높이의 피라미드 꼴로 쌓여 있었다.
우리 식구는 아버지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왕십리 어느 문간방에서 10월 말까지 견뎌냈다. 충무로 지하방에서 가져온 옷가지를 내다 팔아 양식을 조달했다. 동사무소에서 나왔다는 청년방위대원들이 우리 식구를 두고 어디에서 살다 왔느냐며 뒤를 캐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누나와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는데, 누나와 나는 만리동 쪽 개구멍으로 빠져서 역구내로 들어 갔다. 하룻밤을 노천에서 새우잠을 자고 하행하는 무개차(석탄이나 목재등을 나르는 뚜껑 없는 열차)에 올랐다. 피란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싸 가지고 간 주먹밥은 하루 만에 떨어졌고, 기차는 겨우 대전 부근을 통과하고 있었다. 누나와 나는 삼량진에서 하차해 진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기차는 밀양역을 출발했으나, 고장이 났는지 경부선에서 가장 길다는 밀양 근처 굴속에서 멈춰 버렸다. 사람들은 꽥꽥거리다가 도저히 매연을 참을 수 없자 모두 기차에서 내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 앞만 보고 뛰었다. 겨우 굴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기진해 쓰러진 채 기차가 굴을 빠져나오기를 기다렸으나 누나와 나는 삼량진까지 걷기로 했다. 사십 리를 걸어 삼량진역에 도착할 동안 배추 뿌리도 캐 먹고, 민가에 들어가 구걸도 했다.
삼량진역에 도착했으나 미군이 철교를 지키고 있었다. 민간인 통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철교 아래로 한 마장을 더 내려가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을 보냈다. 작은 나룻배를 가진 분이 우리 남매를 불쌍히 여겨 낙동강을 건네주었다. 거기서 진영까지도 삼십 리가 넘었다. 누나와 나는 철길을 따라 하루를 꼬박 걸어 저녁때 진영 장터 친척집에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와 두 동생은 다음 달 중순에야 진영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일부만을 요약했지만 생생해서 눈물이 날려고 한다.
【2】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 문순태
나의 고향은 후방인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구산리다. 6.25를 여기서 맞았다. 남만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나는 후방에서 저절러진 빨치산과 토벌대가 서로 싸우면서 생긴 시체들을 수도 없어 보았다.(흔히 공비나 공비토벌이라고 하면 지리산을 떠 올리지만, 후방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 무렵 낮에는 경찰들이 진을 쳤고, 밤에는 산사람(빨치산을 산사람 혹은 밤손님으로 불렀다)들이 마을로 들어와 밥을 지어 달라하여 먹고 가거나 식량을 가져가곤 했다. 산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난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몰려와서 밥을 해준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 낮과 밤의 세상이 서로 달랐으며 마을 사람들은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지서에 붙들려 간 사람들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문을 받았다. 성한 사람들이 초주검이 된 사람을 지게에 짊어지고 오기도 했다. 밤에 나타난 밤손님들은 마을 남정네들한테 식량을 지워서 산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가끔은 우리 마을에서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그런 날은 총소리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도굴 속에 숨어 있어야만 했다. 꼬박 사흘 동안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듯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눈 부신 햇살이 화사하게 퍼졌다. 비가 오는 동안에는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햇살을 본 마을 사람들은 토굴에 들어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사흘 동안의 평화가 마을 사람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는지 몰랐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더니 토벌대가 구물구물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토벌대는 마을을 향해 일제히 집중 사격을 가했다. 총탄이 숭숭 소리를 내며 날아와 감나무와 돌담, 마당에 꽂혔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식구도 마을 안 고샅(좁은 골목길)쪽으로 뛰어가 공동우물 담 뒤에 숨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겨우 할머니를 찾은 뒤에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날 나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마당이며 고샅,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 하천가 자갈밭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이날 우리 마을에는 일곱 사람이 토벌대 총에 맞아 죽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와 아낙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와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도망치다가 총알이 날아오자 죽는가 싶어 대밭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고 하셨다.
우리는 더 이상 고향마을에 숨어 살 수가 없었다. 언제 토벌대가 다시 들이닥칠지 몰랐기에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백아산으로 향했다. 백아산에는 전남유격대 총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젊은이 중 상당수가 백아산에 입산했다. 백아산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입산한 가족들이었던 것 같았다. 할머니도 한사코 백아산으로 가자고 성화셨는데, 전남유격대 사령부가 있는 물골(수리)에 우리 고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백아산에 가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은 시체들을 보았다. 발가벗겨진 채 비를 맞아 배가 팅팅 부어오른 여자의 시체, 나무막대기로 죽은 사람의 항문으로 쑤셔 박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세워둔 시체, 음부에 작대기를 꽂아 놓고 벌거벗겨진 젊은 여자의 시체도 보았다. 후미진 숲정이마다 시체가 있었고, 마을 어귀 텃밭에도, 흙구덩이와 대밭에도 어김없이 시체가 썩고 있었다. 백아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나는 많은 주검을 목격했다. 그때는 어렸지만 주검이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나이 든 지금은 왜 이렇듯 무서운지 모르겠다.
우리는 백아산에서도 토굴을 파고 살았다. 그러나 고향마을에서처럼 낮에도 토굴에 처박혀 있지는 않았다. 유격대를 통해 토벌 작전이 언제 있을지 미리 정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설이 내린 한겨울 동안에는 토벌 작전이 뜸해서 비교적 여유로운 평화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그러나 봄이 되자 토벌 작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개나리가 지고 산에 진달래가 불길처럼 타오르던 1951년 4월이었다. 소문대로 대규모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새벽부터 사방에서 백아산을 포위해 왔다. 우리 가족도 다른 피란민들과 함께 새벽에 ‘문재’를 넘어 토벌대를 피해 백아산 심장 깊숙이 들어갔다.
토벌대는 계속 우리를 추격해 왔다.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우리는 가시덤불을 뚫고 계속 도망쳤다. 죽을힘을 다해 마당바위 밑 ‘군부샘’까지 쫓겨 올라갔다. 마당바위에 가면 유격대가 주둔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바위 턱밑까지 올라와 위쪽을 쳐다보니 철모를 쓴 무리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면서 올라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은 빨치산 유격대가 아니라 토벌대였다. 우리는 죽었구나 싶었다. 순간 아버지가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나도 냅다 바위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우리 가족은 총알을 피하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와 나는 해가 설핏해져서야 마을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동생은 다음날 새벽에 허수아비 같은 몰골로 마을에 나타났다. 동생이 바위에 부딪혀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어머니는 손목이 꺾여 왼손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날의 토벌 작전으로 여러 명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 친구 형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채 수십 년을 살았다. 백아산 토벌 작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그곳에 주둔하던 빨치산 유격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옮겨 갔다. 우리 가족은 지리산행을 포기하고 백아산을 떠나기로 했다. 백아산으로 들어갔던, 20여 호 마을 사람들 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여남은 명에 지나지 않았다. 백아산에는 골짜기마다 6.25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나는 6.25를 소리로 듣는다. 골짜기를 흔든 총소리며, 아무도 없는 물방앗간에서 삐끄덕거리며 돌아가는 빈 물레방아 소리, 때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부직음과 죽어가며 마지막 내지른 비명이 잠든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뙤록뙤록 살아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되살려 주고, 골짜기에 떠도는 고혼을 달래 주기 전에는 6.25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3】한국전쟁 속의 희비극 --- 이호철
나는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6.25전쟁을 겪었다. 당시 북한에서 고3으로 군무에 동원되어 울진까지 내려와 그해 9.26일 추석날 저녁에 한국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박격포 중대에 속했던 나는 포 한 발 쏴보지 못한 채, 이튿날 태백산을 통해 올라오던 중 양양 수리 뒷산에서 포로로 잡혔다. 그때 내 경험을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으로 써서, 지난 1999년 일본 독일 폴란드 프랑스 중국 미국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장편소설 『소시민』도 독일 멕시코 프랑스에서 출간되고 중국 독일어로 번역이 끝난 상태여서, 내가 겪은 6.25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외국 여러 나라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6.25가 개인적으로 엄청난 불행의 시작이었으나, 그것이 오늘에 와서는 내 문학의 영광으로 둔갑해 나 자신조차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시간과 세월이 엮어내는 묘미를 한껏 맛보기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내가 겪은 6.25를 진짜배기로 맛보려면 나의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을 꼭 한번 읽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는 말한다.
“통일? 남북통일은 아직은 멀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비로소 이루어질 때만 제대로 알맹이가 차서 제 모습이 됩니다. 어거지(억지로 방언)로 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남북통일이라는 우리의 역사도 서푼 어치 머리로 기획을 세울 일이 따로 있지, 애당초에 그런 식 일변도로만 접근할 때가 아직은 아닙니다. 이 책은 지난 50년간 이 땅에서 소설을 써 온 저조차 자신의 오늘과 마주 선 극히 소략한 문학적 총괄이라는 뜻까지 담겨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오늘 남북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6천만 누구나 꼭히 읽어야 하고 읽히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2000년 3월에 펴낸 『소설가 이호철이 겪은 분단 60년의 남북한 사람살이』의 책머리 말이다. 그리고 이호철은 “어언 반세기 넘어 흘렀지만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동안 이어졌던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는가? 3백만의 인명을 앗아가고, 1천만 이산가족을 생겨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소위 중국 의용군까지 끌어들이며 국제전으로까지 비화, 미·소간 제3차 세계대전에까지 이르렀던 참으로 아슬아슬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국면을 세부적으로 국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웃지 않고는 못 배길 희극적인 장면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차마 웃을 수는 없다. 웃다니? 싶어지며 울컥 분노 같은 것이 새삼 치솟는다. 그렇게 차마 웃을 수는 없는 웃기는 장면들이 실제 다반사였다는 점이야말로 바로 이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이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4】내가 겪은 6.25전쟁 --- 전상국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열 살 나이에 전쟁을 겪었다. 우리는 경찰서에 잡아다 놓았다는 빨갱이를 보기 위해 경찰서 담벼락에 매달려 보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빨갱이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냥 경찰서 뒷마당에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던 대여섯 명의 남자 어른들을 보았을 뿐이다. 맥빠지는 일은 빨갱이들 속에 우리 옆집 아저씨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 가 꽤 여러 날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암울했던 집안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옷이 피투성이가 된 채 둘둘 말려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연맹 문서에 이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어른들의 귓속말을 나는 흘려들었을 뿐 지금까지 그 사건의 경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 일에 대해 더이상 아는 것이 겁났기 때문이다.
전쟁의 공포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은 멀리에서 소리부터 들려오는 폭격기의 출현이었다. 어느 날 읍내 상공에 비행기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그 전처럼 삐라를 뿌리는 줄 알고 비행기를 따라가다가 혼비백산했다. 그날 비행기에서 떨어진 것은 삐라가 아니라 읍내 다리를 끊기 위한 폭탄 세례였다. 그 폭격으로 일제시대에 놓인 읍내 다리는 두 동강이 났다. 그날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을 피해 우리는 멀리 물걸리로 피난을 갔다. 나는 무서웠다.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낯선 사람은 낯설어서,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무서웠다. 다른 세상을 만나 살기 띤 눈으로 기세등등하던 어른들이 그해 9월쯤에는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마을 청년들한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해 가을 퇴각하는 북한군 패잔병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숨어 있던 어른들의 살기 띤 눈만 봐도 우리는 오줌이 마려웠다. 마을 사람들한테 붙잡힌 북한군 하나가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우리 집 부엌에 숨어들었던 북한군 병사가 마을 청년들한테 붙잡혀 나가면서 나를 바라보던 절망적인 눈빛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붙잡힌 북한군 패잔병들은 진격해 오는 국군에게 인계되기도 했지만, 당시 급박한 상황으로 대부분 마을 인근 골짜기로 끌려가 땅속에 묻혔다. 어른들이 그렇게 북한군을 처치하고 돌아온 밤은 유난히 마을 사람 전체가 공포에 떨었다. 북한군이 보복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으로 그럴 때는 마을 사람 모두가 산속에 숨어 들어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겨울 전쟁이 난 그해 1월 강원도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그야말로 민족의 대이동이 눈길 속에 길게 이어졌다. 우리 가족도 부엌 바닥에 세간을 대충 묻고 피난민 대열에 끼였다. 홍천 삼마치 고개에는 전날 적의 공격을 받아 죽은 수십 구의 시체가 눈 속에 그대로 나뒹굴고 있는게 보였다. 눈길 속에서 피난민은 하루 20리를 못 걸었다. 전쟁의 공포 속에 배고픔은 또 다른 공포였다. 겨울 피난, 1.4후퇴 당시,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채 남쪽을 향하던 그 도도한 흐름을 이룬 피란민 대열 속에서 나는 춥고 배고파 울었다.
전쟁 중에는 으레 전염병이 돌기 마련이다. 피란민 수용소에 이질이 돌아 사람들은 배를 움켜 진 채 아무 데나 엉덩이를 까고 설사를 했다. 결국 내 동생이 쓰러졌다. 꽁꽁 언 땅에다 동생을 묻을 때 할머니가 내 고깔모자를 그 애 머리에 씌워 주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청주 광산촌에서 장질부사를 앓을 때는 바로 우리 옆의 움막에서도 사람이 죽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피란 온 만삭의 아낙네가 해산을 한 뒤 배가 고파 실성한 끝에 낳은 아이를 끓는 물에 집어넣은 것이다. 결국 아낙네도 죽고 말았는데 아버지마저 만나지 못한 그 집의 어린애 둘이 움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볕쪼임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복이 되어 고향에 돌아 왔지만 읍내는 온통 폐허가 되었고,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헌병대 막사로 철조망이 겹겹이 쳐져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물걸리 마을이었다. 휴전이 되던 그 해 가을에 임시로 머물던 물걸리 우리 집에 열 살짜리 사내 아이가 하나 나타났다. 할머니가 그 애를 끌어 안고 울었다. 고모의 아들, 즉 내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동생은 충남 서산 해미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의사였던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행방불명이 되자 거기에서 살길이 없어 달랑 혼자서 외가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고종사촌 동생의 입을 통해 철사로 손이 묵인 채 끌려갔다는 고모부의 죽음이 그날부터 내 안에 자리잡았다. 한 때 6.25적 소재의 동의반복에 신명을 낸 것도 결국은 내 속에 깃든 악령들의 시킴에 의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은 다소 낭만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나는 내가 선택한 ‘문학의 길’ 위에서 내삶을 돌아보게 하는 악령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
【...】내 이야기도 해 볼까 한다.
나는 6.25가 터진 와중에 태어났으므로 내가 겪은 6.25는 없다. 기억이 없다는 말이다. 내 이야기는 풍월처럼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께서 참전하고 안 계실 때 어머니는 다른 식구들과 경남 거제로 피란을 갔다가 3개월 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피란 중에 겪은 배고픔과 구걸을 해야 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보다 돌아와 보니 미니리깡의 미나리가 사람 키만큼 커 있더라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사람 아니면 짐승이 죽어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는 장질부사(장티푸스)를 앓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누구도 장사치를 사람이 없었으나 멀리 살던 큰고모부가 와서 혼자 힘겹게 할머니 장례를 치러 주셨다고 한다. 관도 없이 거적에 둘둘 말아 공동묘지에 장사지냈으나 2001년 아버지가 운명하셨을 때 할아버지할머니를 같이 이장했다.
구순까지 살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큰외삼촌도 참전용사셨는데, 당시 입대할 때 지금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면민 환송회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버스 2대로 입대한 동료들이 돌아올 때는 여 나무 명밖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외삼촌은 동료들의 명까지 사시다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도 참전했고 강원도 양구에서 전투를 하다 후송되고 싶은 마음에 야전 곡괭이로 몇 번인가 다리를 찍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그리되지 않더라고 하셨다. 하면서 8년 일등병으로 제대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셨으나, 외삼촌과 달리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해 참전용사 연금은 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우리 동네 앞 늪을 농지로 개간할 때 불도자로 산을 깎자 당시 미군들이 쓰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수류탄이 박스채로 나왔는데, 그것을 집에 가져와서는 수시로 들고 나가 강물 속에서 터뜨리면 고기들이 뒤집혀 올라왔고 그것을 주워 동네 사람들에게 회식을 시키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첫댓글 그러게요!~6.25전쟁발발이 벌써 만72주년이 되었네요!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요.
남북으로 대치된 상황에서 북 김정은이는 올들어 미사일을 6회나
쏘아올리며 협박하고 있는데 국군통수권인 대통령은 한마디 말 못하고,
종전을 입에 오르네리니 정말 답답한 노렷입니다.
하루속이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기원해 봅니다!
잘 정독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