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86]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초판 1쇄 2014년 5월 9일, 초판 132쇄, 창비 2024년 11월 펴냄, 215쪽, 15000원)를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진작부터 그 소설 얘기를 들어 읽으려 했다. 마침 『작별하지 않는다』『채식주의자』를 읽은 뒤였다. 노벨상 수상이야말로 아주 일부 ‘넋빠진 인간’들을 빼고는 나라 전체의 경사임을 모르는 이 없을 터. 더구나 평화상에 이은 문학상이라니. 이제 경제학, 물리학, 화학 부문 등 학문영역에도 굿뉴스 터질 날이 멀지 않았을 게다.
아무튼, 200쪽 약간 넘은, 길지 않은 이 소설은 ‘어린새’를 시작으로 6장으로 치밀하고 극도로 절제한 플롯으로 돼 있다. 읽는 내내 맨 뒤에 실린 작가의 에필로그가 너무 궁금했다. 작가는 10살때 친척들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고, 13살때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가 보여준 사진첩을 보았다한다. 그리고, 결론은 아이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책을 덮은 시간은 새벽 2시 24분. 광주항쟁(민주화운동)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독파하는데 4시간쯤 걸렸다.
한마디로 소감을 말하자면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아내의 “너무 핍진逼眞하여 힘들었다”는 멘트를 고스란히 돌려줄 수밖에 없다. 소위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5.18은, 세월호는, 4.3은 무엇일까를 혼자 생각했다. 그보다 먼저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작가 한강의 얼굴에 언뜻언뜻 비치는 ‘깊은 우수憂愁’가 떠올랐고, 막내 여동생뻘인 작가가, 작가의 업보가 너무 안쓰럽고 짜안했다. 또한 세계가 인정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쓰기까지의 작가의 고독과 외로움, 그 치열한 문학정신을 생각했다. 너무 아리고 아파 몇 번이고 읽기를 중단하려 했으나 ‘그래도 읽으라’는 아내의 채근에 힘을 냈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우리는 그를 ‘모델’이라 가볍게 얘기하지만)이 누구이든, 이 소설은 인두겁을 둘러쓴 한 인간(태어나서는 안될 귀태들이 또 많지만) 의 만행으로 인한 전체 피해자들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으로 읽혔다. 그게 어디 실제로 죽거나 다친 2000여명만의 문제이랴. 1만명 아니 1백만명도 더 되는 사람들의 가슴앓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작가가 도움을 받은 많은 자료 중에 <5.18 자살자-심리부검 보고서>라는 제목을 놀랐다(연극인듯). '심리부검 보고서'라니? 처음 들었다. ‘전쟁문학’이라면 또 모르겠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우리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한 여성작가로부터 엄마처럼 큰 위로를 받아, 이제는 '훌쩍훌쩍 울면서'(이럴 때의 울음은 '울음의 미학美學'이 아닐까) 인간의 의미와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할 것같다.
나는 맨처음 광주항쟁 소식을 언제 어떻게 알았을까? 80년 5월중순 작대기 하나도 받지 못한 신입쫄병(4월4일 '전주장정'으로 입대)이 내무반에서 도심에 탱크가 들어서는 것을 TV뉴스로 보았다. 솔직히 다른 나라의 내전인 줄 알았고, 그곳이 광주인 줄 생각도 못했다. 입대 18개월( 상병 3호봉)만에 첫 휴가를 나와(그것도 열흘에 불과) 전주 ‘금강서점’ 책방에서 두런두런 수상한 얘기를 몇 토막 흘려들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 진상을 알 수 있었으랴. 뭣도 모르고 82년 10월 신문기자가 됐는데, 그 겨울, 어느 친구가 던져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허접한 복사본을 밤새 읽고 전율했다. 토할 정도로 살이 떨려 어쩔 줄 모르고 무서워했던 그 밤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황석영이 정리했다는 그 복사본은 그날이후 D일보 내에서 은밀하게 돌려보는 필독서가 되었다. 80년 당시 기사 제목을 ‘폭도’라 붙였다는 선배 편집기자와 술자리에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생으로 도서관에서 투신자살, 광주의 숨겨진 비극을 전국에 처음 알린 김태훈 열사 소식을 당시 신문은 1단으로 보도했다. 당시 그 신문 사회부차장이 김열사의 친형이었으니, 그분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런 엄혹한 세상도 지나갔는데, 대명천지 21세기 정보산업화시대에 판을 치는 무당 나부랭이식 권귀權鬼는 또 누구인가.
그 이후 그 불후不朽 불멸不滅의 '사건'은 <화려한 휴가> 등 영화나 연극 등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마침내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 나오기는 했지만, 무엇 하나 시원한 게 없기는 마찬가지, 도무지 ‘성에 안찼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는 다큐였지만, 이 책은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소설이란 핍진한 허구가 아니던가. 다큐와 소설의 차이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나, 너(어린 새, 동호), 나(검은 숨, 정대 ), 그녀(일곱 개의 뺨, 은숙), 제(쇠와 피, 23살 교대복학생), 당신(밤의 눈동자, 선주), 나(꽃핀 쪽으로, 동호 엄마)로 풀어가는 여섯 마당 주인공들의 넋두리는 독자들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핍진하다. 우리는 동호, 정대, 은숙, 선주 등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이시여, 아 하늘이시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하늘’은 유사有史이래 늘 이렇게 무심했거늘, 새삼 무엇을 탓할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어야 하듯,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문학평론가 신형철) 『소년이 온다』를 읽어야 할 지니. 여전히 참람하고 참담하기이를 데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