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라 후덥지근 하다.
장마를 일본어로 쯔유, 한자로 梅雨로 써놓고 바이우(バイユー), 때로는 사미다래(サミダレ) 라고 읽기도 하지요.
일본어의 특징,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한자를 읽는 방법은 멋대로지요.
일본어가 어려운 점이 바로 요미가타(よみかた,読(み)方) 즉 읽는 방법이지요.
같은 한자라도 때에 따라 여러 가지입니다. 심지어 열 개가 넘는 요미가타도 있습니다.
장마 즉 쯔유를 바이우 사미다래로 읽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거죠.
일본어의 또하나 특징은 한자가 기본이 되기는 하지만, 어원의 기원이 불투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은 대체적으로 어원을 추측 가능한데 일어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같은 한자를 놓고도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심지어 그때 그때 달라요.
일본 사람들도 요미가타를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장마철을 이야기 하다가 엉뚱한 길로 잠시 빠졌네요.
우산을 쓰고 거리를 잠시 걸었어요.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정겹더군요. 잠시 감상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내 돌아왔습니다.
전,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 하는 편입니다.
감상은 때로는 사람을 치사하게 만드는 수도 있거든요.
그 보다 선호하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입니다.
19 세기,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독일은 커다란 혼란에 빠집니다.
사회는 온통 뒤죽박죽이었죠. 청년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보다 더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그것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로 탄생한 겁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동시에 니체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때 독일도 청년들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헬스 독일 상태였죠.
서유럽의 국가들처럼 식민지 쟁탈전에 선두에 섰다면 그런 고민은 아마 덜 했을 겁니다.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멋대로 살아라 였습니다.
“그냥 살어, 되는데로 살어, 어쩌다 보면 되겠지, 내 버려 둬, 살다 보면 뭔가 되겠지,”
이런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니체의 대표적인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도 니체는 의아해 했을 겁니다.
그의 말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멍 때리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크리스챤이지만, 그의 철학 곳곳에는 불교적 가치관이 숨어 있습니다.
비우는 거죠. 골치 아픈 세상에 대해 뭐 그리 고민할 필요가 있냐는 거죠,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면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거죠.
베란다 역시 같습니다.
책 읽다 혹은 글을 쓰다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머릿속은 담배 연기에 자욱해지면서 하얗게 비워져 갑니다.
이윽고 내가 키우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어느새 화분들 사이에 거미줄이 쳐져 있네요.
거미가 들어 올 틈이 없는데 어느새 들어와 먹이 사냥을 합니다.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들이 몇 마리 걸려 있네요.
모기도 한 마리 돌아다니네요. 난 놈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내 피를 빨아 먹다가 배가 부르면 중단할 것이고, 모기의 평균수명은 사람보다 적으니까 그렇게 살다 죽겠지요.
나의 베란다는 그런 식으로 살아라 하는 니체의 철학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멋대로 살아라!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봄이 오고 여름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그런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