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74
2월21일[사순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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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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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Za9_tnxjAU
[서울대교구 박형준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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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는 우리 각자가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공생활 기간 동안의 행적은 한마디로 앞당겨 체험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잠시 동안이었지만 지상 천국을 맛보았으니, 정녕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당신 동포들을 위해 행하신 수많은 치유와 구마 행위, 이곳 저곳 다니면서 선포하신 위로와 구원의 말씀은 곧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입국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될 일상었습니다.
그러나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지? 모여든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또 다른 표징과 기적을 요구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입니다. 보여줄 것 이미 다 보여주셨는데, 더 이상 뭘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도에 넘치는 완고함과 불신앙에 크게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한탄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건네신 강력한 경고 말씀에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지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성찰할 부분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솔직히 우리도 유다인들처럼 더 강력한 기적, 더 화끈한 표징, 더 내 입맛에 맞는 맞춤형 기적과 표징을 끝도 없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매일이 기적이요, 매일의 성체성사가 가장 큰 표징인데, 또 다른 강력한 한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맞서는 한 신앙인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인데, 우리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희망하는 한 인간 존재, 그 자체는 또 다른 기적이요, 표징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평생을 잘 준비했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며, 불멸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이웃의 죽음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그리고 사도들의 적극적인 활동 기간을 끝으로 외적 기적의 시대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존재 자체로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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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EqHg1Ssc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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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의 기둥은 지혜, 지혜의 기둥은 진실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하다고 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지만, 지혜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지혜로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을 찾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왜 표징보다 지혜가 앞서야 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운전면허가 하늘나라의 기쁨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운전면허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으로 나뉩니다. 운전면허를 따는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실기시험을 치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교통법규를 제대로 모르는데 운전만 할 줄 안다면 큰일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필기시험이 지혜이고 실기시험이 표징입니다. 표징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지혜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는 지혜는 추구하지 않았는데 능력만 주어졌습니다. 푸틴 대통령도 신앙인입니다. 자기가 그리도 오래 러시아를 지배하는 것은 분명 하늘이 주신 능력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시골에서 낚시로 여생을 즐기는 사람만 못합니다. 자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타국의 국민이 자기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어갑니다. 현재도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게 뻔합니다. 그러니 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은 지혜와 함께, 오히려 지혜를 먼저 갈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지혜를 추구하지 않을까요? 지혜를 추구한다는 뜻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유튜브 강의도 듣고 책도 읽는 등의 노력을 꾸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설교나 강의, 책의 지혜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행복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폭력성 때문에 가정도 불화가 일어나고 관계도 힘들어지고 합의금을 주느라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때릴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남보다 싸움을 잘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지금은 남을 때리지 않겠다고 말해도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또 폭력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행복한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그것이 1%의 기쁨은 줄지라도 99%의 고통을 남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화와 겸손함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때로는 폭력을 쓰는 게 자기에게 더 행복한 일이라 믿을 때는 절대 폭력을 쓰지 말라는 사람의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은 지금의 1%의 기쁨을 99%라고 믿게 하는 도구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래서 점점 더 큰 죄로 떨어지게 됩니다.
죄를 짓는 사람 중에 진실한 사람은 다 한 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 더 큰 죄를 짓게 만들기 위해 사탄은 지금의 고통을 거짓으로 가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도 그 부끄러운 고통을 스스로의 힘으로 가리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두렁이를 스스로 만들어 입고 죄가 행복이라 믿으려고 한 그들에게 하느님은 지혜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그런 식으로 행복하냐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더 늦게 나가느냐 시합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기기는 했지만, 더는 그런 게임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는 쾌감보다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는 쾌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을 거짓말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지혜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러며 믿고 싶으니까 하늘에서 오는 기적이나 보여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진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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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1년입니다. 저는 버스 운전을 위해서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습니다. 성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는데 운전하려면 대형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에서 3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다행이도 저만 불합격했습니다. 봉사자 2명은 합격해서 25인승 버스를 몰고 교우들이 성당에 올 수 있도록 운행했습니다. 대형면허의 합격 기준은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코스를 정해진 시간 안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긴장해서 ‘시간초과’로 떨어졌습니다. 맞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가 대형면허 합격의 기준입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이 대형면허 시험 불합격 한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입니다. 젊은 신부님이 버스 운전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사실 저는 운전을 그리 잘 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왕에 25인승 버스가 생겼으니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형제님들은 운전 경험도 많았고, 연습도 열심히 해서 합격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다는 자부심은 경험했습니다.
미국에서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던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감독관과 계속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운행 중에 갑자기 앞에서 차가 나왔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감독관이 ‘그렇게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저 같으면 ‘미안합니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이런 긴급 상황에서 당신 같으면 급브레이크 안 밟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길에 눈이 쌓여서 버스가 덜컹거렸다고 합니다. 감독관이 ‘운전을 그렇게 덜컹거리면서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저 같으면 ‘미안합니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길에 눈이 쌓여서 그런 걸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차를 하면서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넓게 돌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감독관이 ‘이렇게 넓게 돌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차에서 내렸답니다. 형제님은 차분하게 주차하고 차 키를 반납했다고 합니다. 감독관과 그렇게 다툼이 있었으니 당연히 불합격했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이었답니다. 맞습니다. 대형면허 합격의 기준은 감독관과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합격 기준은 얼마나 소신껏, 안전하게 운전했느냐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구원이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위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구원의 표징으로 보내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요나의 말을 듣고 단식하였습니다. 이마에 재를 뿌렸습니다.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잘못된 악행에서 돌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표징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마에 재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자루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악한 길에도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놀라운 표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러한 표징을 보고 ‘회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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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솔로몬 왕 때, 스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스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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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말씀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과 예수님의 표징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요나의 표징을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기적적으로 구제받은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징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실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은 루카 복음서는 요나의 표징을 단순히 “요나 예언자” 그 자체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오직 요나의 설교만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이 세대 사람들을 위한 하나뿐인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징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 세대가 믿음이 없음을 반영하며 그들이 “악한 세대”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자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적을 요구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이미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많은 말씀을 남겨 주셔서 성경과 전승으로 내려오는 데도 우리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더 깊이 회개하고자, 그리고 주님께서 계신지 온전히 믿고자 어떤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셔야 할 의무가 없으시고, 이미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유일한 표징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갑니다. 놀라운 표징을 바라는 사람은 정작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루카 16,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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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과 표징>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요구한 자들입니다.(루카 11,14-16) 그 요구는 ‘사탄의 유혹’과 성격이 같은 일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루카 4,9-12)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자들은 사탄이 한 것처럼 주 하느님을 시험하려고 한 자들이기 때문에 ‘악한 세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 외에는 보여 줄 표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를 믿고 회개해서 멸망을 피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당신의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당신을 믿지 않으려고 하면서 표징이나 요구한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표징을 보여 주기를 거절하셨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의 기적이 좋은 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표징을 본 다음에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표징 덕분에 자신들의 믿음이 옳았음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메시아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믿으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곤경에 처한 신랑을 위해서 베푸신 ‘사랑의 기적’이기도 하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또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언제나 항상 말씀을 믿는 일이 먼저이고, 표징은 나중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 표징들을 통해서 말씀을 확증해 주신 것은,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표징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요한 11,45-46)
죽은 라자로가 살아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보았으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은 최고의회에 가서 그 일을 알렸고, 그날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고(요한 11,53),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요한 12,10) 안 믿으려고 한 자들은 표징 자체를 부정했고, 아예 표징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심판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유죄”라고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믿을 수가 없어서 못 믿은 것인데, 그것이 왜 유죄인가?”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신 분이고, 앞장서서 그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그 길을 걸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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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는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치지만 결국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반응은 요나의 반응과 대조적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멸망한다는 요나의 외침에 모든 사람이 곧바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십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요나는 예수님을 예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시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꽉 막혀 도무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요나 예언자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쳤지만 결국 뉘우치고 돌아온 요나 예언자, 또 그의 선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지체 없이 회개하고 구원을 청하였던 니네베 사람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은 바로 회개입니다.
가던 길에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고,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위해서는 엄청난 기적이나 대단한 표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회개는 단죄나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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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1장 14-54절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11장 앞부분, 곧 1-13절에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반면에 14-36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에게(11,16 참조) 응답하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발휘하였다며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셨고(11,17-23 참조), 예수님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칭송한 여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11,27-28 참조)
군중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으며,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보고 그 이상의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하고 분명하였습니다.ㅣ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요나의 표징’은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가 하느님께 구원되어 요나 자신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구원되시어 이 세대에게 표징이 되시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가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한 예언자였듯이, 예수님의 회개 선포도 이 세대의 유일한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듯이, 이 세대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해야만 구원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밖의 것이나 그 이상의 것을 찾는 이들에게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나 예언자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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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 복음>의 병렬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오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앞 장면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하신 일을 악마가 했다고 한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었듯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신성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 또한 하느님 아들을 불신하고 모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 되었듯이, <루카 복음>의 예수님의 공생활을 알리는 첫 발설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 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또한,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곧 요나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32.) 이는 결국, 요나의 설교만 들고도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평판으로만 듣고도 찾아온 남방이방인 세바의 여왕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건만,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징을 보고서도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하고 모욕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일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함은 우리의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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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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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11,31.32)
“은혜로운 회개의 때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 죄를 아파하며 뉘우치게 하시네.”(성가 124장) 어쩌면 하느님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뉘우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당신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바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난 다음, “니네베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1.4) 고 외치자, 놀랍게도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3,5) 그렇습니다.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던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단식하며, 하느님께 진노를 거두시라고 용서를 청하며 가장 높은 임금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걸치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참회했던 것입니다. 죽어 마땅했으며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요3,10)
예언자인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께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표징이란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신비가 당신이 보여 줄 표징이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이 우리 믿음의 전부이며 정수精髓입니다. 기적은 믿음의 필수요건이 아닌 부수 조건이며, 모든 기적과 신비의 절정은 바로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 는 표현처럼 자신의 존재와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고난을 겪으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세적 기적만을 요구하고 있는 우리의 기복적 신앙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주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 않도록 합시다. 지금껏 세상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많은 은총과 사랑을 헛되게 한 것도 모자라서 무슨 표징을 더 보여 달라고 요구하렵니까? 지난 재의 수요일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6,1)라고 권고한 것처럼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신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도록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마음의 눈,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급한 니네베 사람들과 요나의 실례에서 저에게 의미롭게 다가온 것은 요나의 진솔하고 절박한 설교의 힘과 능력이기도 하지만, 이를 기꺼이 마음으로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의 열린 마음과 그 들음의 자세입니다. 사실 누군가 설교를 잘해서 몇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지만, 니네베 시민들처럼 집단으로 회개한 것은 결코 설교자의 능력보다는 시민들의 마음에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있었으면, 이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이 그들 안에서 작용하였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들음의 기적은 전적으로 성령의 작용입니다. 이같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참으로 니네베 사람들처럼 갈라지지 않고, 모든 이가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설 때”(요나3,8)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표징을, 기적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니네베 시민들의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신 것처럼 주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고 은총과 사랑을 베푸시질 않겠습니까? 그 은총은 바로 당신께서 사람이 되시어 걸으셨고 사셨던 삶을 우리 또한 따라 걷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은총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걸어가셨던 진리의 길을 걷고, 사셨던 진리를 살며, 누렸던 생명을 만끽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무슨 표징을 더 보여 달라고 청하기보다 이미 보여 준 표징 곧,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사랑으로 우리 또한 또 하나의 사랑의 기적을 증거하고 실천해 나감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걸어야 길과 살아야 할 진리 그리고 누려야 할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따르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도록 십자가, 하느님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크고 확고한 표징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이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 앞에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그런 마음으로 한세상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다른 표징을 바라지도 않고 오직 당신 사랑의 위대한 업적인 십자가의 사랑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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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잠재력을 가늠할 때 출발점에 집중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즉, 타고난 재능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타고난 재능이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지식을 익혔거나 부모에게 배웠던 이유가 더 클 뿐입니다. 출발점만을 보는 부모가 종종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요.”
출발점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멀리까지 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출발점보다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신동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을 휩쓰는 모차르트 같은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는 서서히 부상하는 대기만성형인 바흐 같은 이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지극히 정상이며, 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도 더 많이 받습니다.
출발점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조상님께 받은 유산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재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먼 거리를 갈 수 있느냐를 생각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 모두가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시간을 계속해서 탐내고 있습니다. 왕년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이 장래의 밝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출발점에만 연연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조상들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지요. 조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내세워서 선택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하고, 자기의 회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회개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심보로 꽉 막힌 이기적인 모습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들의 앞에서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나가 외쳤던 심판의 선포와 회개에 대한 호소에 니네베 사람들이 곧바로 믿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크신 분이 이야기하는데도 믿지 않고, 또 회개하지도 않기 때문에 표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믿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조상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놀라운 표징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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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32)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참을 만나니
참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착함을 만나니
착함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나니
아름다움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믿음을 만나니
믿음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희망을 만나니
희망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나니
사랑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니
사람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땅을 만나니
땅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늘을 만나니
하늘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니
하느님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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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감곡 매괴성모순례지 성당에는 성당 제단 위쪽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부터 총탄을 7발이나 맞고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난 받으신 성모님,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분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 하여 치유를 받았기에 치유의 어머니라고도 합니다.
저는 성모님 앞에서 미사를 봉헌해 왔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면 성모님의 형상이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며 성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느님, 제발 어머니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는데 너무도 짧은 순간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찰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번만 더요!” 했습니다.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 성모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다시 한번 만요!” 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보여주시며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감각적인 표징을 요구하며 살았던 저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주님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 중의 표징이요, 기적 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 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영성체를 통해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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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旅程)>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회개(悔改)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서서히 걷히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것도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선물일 수 있음은 회개를 통한 깨달음입니다. 영성생활의 기초가 회개입니다. 우선적인 순서도 메타노니아(회개), 코이노니아(친교),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열던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사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사순시기의 삶을 요약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49,3-4)
눈만 열리면 곳곳에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고 어제가 “사회정의의 세계의 날”(World Day of Social Justice)임을 알았습니다. “소비문화(Cultur of waste)”를 개탄한 교황님의 한말씀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특별히, 교황은 끊임없이 기후변화에 의해 위협받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를, 이민자들과 피난민들의 보호와 환영을 호소하면서, ‘무관심의 지구화(the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를 경고하면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 행동에 돌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집은 여기다(Home is here)”, 시위자들의 팻말의 말마디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의의 열매로 표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오래 전 자작 고백시가 반가워 인용합니다. 18년 전 2006년 제 나이 58세 이때쯤 쓴 “나 창밖을 볼 때마다”라는 장시입니다. 이 시 또한 제게는 시공을 초월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창밖 풍경은
살아있는 그림, 살아있는 성경
해마다 창밖을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고
날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이 지나간다.
때로는 구름도 흘러가고 새들도 날아간다.
창밖을 바라보며 배우는 인생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함을
또 매사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초연히 바라봐야 함을 배운다.
아, 계절을 볼 수 없어 철없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시간을 볼 수 없어 때를 분별 못하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오늘의 현실은 자연을 떠난 업보다.
저녁기도 시간 짙어가는 어둠,
‘어, 내 인생 몇시이지?’ 불현 듯 떠오른 생각
내 나이 58세, 1949년생
아마 오후 3시, 혹은 3시 30분? 점점 어둠도 고요도 깊어지겠지.
해맑은 아이라면 아침이슬 머금은 아침6시,
십대 사춘기 나이라면 오전 10시,
한창 청년의 나이라면 낮 12시,
삼십대의 무르익은 젊음이라면 오후 1시,
이러니 하루가 평생의 압축이 아닌가?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맑고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는 오전의 나이들이라면
점심지나면서는 고요히 스며드는 어둠과 더불어
깊어지는 오후의 나이들이어야 맞는 거다.
그리고 밤 나이에는 풍요로운 고독과 침묵의 품안에
별빛, 달빛 그윽히 반짝이는 그분 밤의 품안에 머물다 잠같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다.
이어 새벽 동터오는 아침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찬란한 부활을 맞이하는 거다.
궁극엔 햇빛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한 여정이기에
내 나이 시간에 구애됨 없이 아침에는 아침
나이의 순수로 점심에는 점심
나이의 열정으로 살 수 있기에
늘 희망 가득할 수 있는 우리이다.
‘내 나이 지금 몇시인가?’
나 창밖을 바라볼 때 마다 생각한다.”-2006.2.
18년 전 집무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이니 새삼 ‘정주의 축복’을 깨닫습니다. 지금부터 18년 후라면? 아마도 살아있기 힘들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라 주어지는,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절박한 깨달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깨달음의 여정이요 깨달음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지혜로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온통 회개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회개의 선포에 즉각적인 거국적, 거족적 회개로 응답하는 니느베 사람들, 시공을 초월 전 인류가 자비로운 하느님의 눈에는 회개의 대상, 구원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묘사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요, 이때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를 당신 품 안에 맞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에 눈먼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 무지한 중생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이방의 니느베 사람들처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았던 이방의 남방 여왕처럼 신속하게 주님을 찾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지혜로운 현자가,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표징들의 표징인 빛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 자비의 표징, 지혜의 표징인 예수님을 못보고 표징을 찾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지에 눈먼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보다 더 좋은, 은혜로운 회개의 표징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주님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순시기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 1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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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러자 회개한>
오늘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어떤 표징일까요? 그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가 망할 것이라고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즉시 회개한 것이 바로 요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요나서는 이렇게 간단히 묘사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자’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하자 즉시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 회개해!’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그러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린 회개하고 니네베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믿습니까?
회개하라는 뜻에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적을 받아들입니까? 다시 말해 지적을 받자마자 바로 회개합니까?
그러자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변명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핑계를 대지 않습니까? 그러자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머뭇거리지 않습니까?
사실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킨 요나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주님께 명령을 듣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만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원했지 원수 니네베가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래뱃속에서 삼 일 밤낮을 보내고 난 뒤에야
다시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뒤에야 마음이 바뀌었고
그렇게 자신이 회개한 다음에 회개를 선포한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회개를 선포한 것이고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세대뿐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도 필요하고 주어져야 할 하늘의 표징입니다.
사실 병이 낫는 것보다 마음이 바뀌는 것이 기적이고, 떼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돈을 벌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회개하게 된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세상 소망을 이룬 것이 기적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기적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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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회개의 기적!>
오늘 복음(루카 11,29-32)은 '요나의 표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요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이 회개의 표징을 오늘 독서(요나 3,1-1)가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
요나 예언자의 이 외침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표시로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습니다. 마침내는 니네베 임금까지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에 앉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회개의 기적!'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을까?' '그 악한 세대는 지금 우리의 세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닐까?'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세대를 두고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시기가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인 이유는 이 회개 때문입니다. 사순시기에 회개하는 이들, 주님께로 돌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합시다!
주님 부르심에 나의 회개로 응답합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너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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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DeJaFFnP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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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욕심에 눈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회개가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시작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표징은
우리자신의
올바른
회개입니다.
그러나
쉬이 구별되지
않는 회개의
참된 삶입니다.
회개의
원천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는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크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 없이는
우리의 회개는
지속적인
회개의 삶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회개는
실패가
없습니다.
믿음의 동반자인
참된 회개를
만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처절하게
주님을 만났던
요나의 여정을
만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랍니다.
회개의 삶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주님의
기쁜 소식이며
복음입니다.
회개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의 생활로
써내려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요나보다
더 큰
참된 사랑이
참된 회개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오늘입니다.
참된 사랑을
살고있는가를
묻는 사순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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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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