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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위지(白偉志)
1938년 12월 5일, 동경
육군대신 이다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일본수상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有田八郞),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米內光政), 대장대신 겸 통상산업대신 이케다 시게아키(志田成彬),가 한 자리에 모여, 내각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극도의 보안속에 깊은 밤까지 토론하였고, 여러 의견이 나와서 논쟁이 끝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아주 전형적인 동양인의 방식으로 컨센서스를 형성한다.
프로젝트 이름 "복어(Fugu)"라는 계획이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복어계획의 핵심내용은 일본은 중국의 유태인과 협력하여, 유태인이 하르빈에 '유태인국가재건'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조건으로, 유태인의 일본에 대한 전쟁자금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고난의 시작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에서 박해를 받는 유태인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망명했고, 점차 하르빈이 몰려들었다. 1920년대초에 하르빈의 유태인은 2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도시인구의 약 20분의 1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금융, 공상, 법조, 의료, 문화, 예술계의 유태인 엘리트들이 밀려오면서, 하르빈은 급속히 발전한다. 원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하르빈은 짧은 수십년만에 북경, 천진, 상해, 항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외국을 유랑하던 유태인은 각종 고난을 겪으면서, 마침내 머나먼 동방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거주지를 찾게 된 것이다.
다만, 이런 짧은 안정은 일본인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된다.
1932년 7월부터, 큰 비가 연속 27일간 내렸고, 송화강의 강물은 부풀어 올랐으며, 강둑이 무너졌고, 시내 전부가 물에 잠겼다. 온통 물바다였다. 일시에 은행은 영업을 중단하고, 가게는 문을 닫았으며, 전화는 끊겼다. 하르빈 전체가 물속에 고립된 것이다. 도외구, 도리구의 10여만의 이재민은 벌떼처럼 남강, 향방등 고지대로 옮겨갔고, 대부분은 들판에 노숙했다. 옷도 얇았으며, 덮을 게 없는 경우가 많았다. 비바람속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참혹해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태인지역은 유태인단체의 조직하에 구호대를 조직하고, 난민들에 대한 긴급구조를 시작한다. 8월말, 홍수는 점차 물러가지만, 콜레라, 성홍열(searlet fever), 디프테리아, 홍역등의 전염병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유태인지역응 다시 의사 카우프만등 5명이 하얼빈시 곽란예방치료팀에 들어가 이재민을 구조했다.
천재(天災)는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인화(人禍)는 어떡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재도 인화의 결과와 반영이 아니겠는가.
그해 2월 5일, 일본군 제2사단이 하르빈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도시에 진주한 후, 방화살인약탈로 외부에서온 교민들은 화를 피하지 못했다. 유태인들은 경제능력이 뛰어나서, 일본인의 집중 약탈대상이었다. 일본군은 금방 유태인의 대기업들을 접수해버린다.
하르빈의 러시아 백군은 기회가 왔다고 행각했다. 즉시 일본헌병대에 의탁하여, 소위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만들었다. 목적은 하르빈의 유태인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련의 납치살인갈취사건을 기획한다. 주로 유태인 부상(富商)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납치되고 살해당한 사람은 중앙대약방의 주인인 카우프만과 중국대상인 목위당 등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납치사건은 소위 "Simom Kaspe 납치사건"이었다. 8월, 유태청년피아니스트 Simon Kaspe는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하르빈으로 돌아오는데, 러시아 백군 파시스트분자에게 납치당한다. 그리고 그의 부친에게 30만의 돈을 요구하였는데, 받아내지 못하자 살해하고 만다. 그리하여 인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흉수는 결국 무죄방면된다.
Abraham Kaufman은 이런 상황을 맞이해서,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동포에게 피하기 힘든 재난이 닥친 것이다.
현실은 Kaufman의 우려대로 진행되었다. 유태인의 기업은 하나하나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주택과 건축물도 일본인들이 빼앗아갔다. 유태인을 향한 방화살인강도강간은 속속 발생하였다. 많은 유태인가정은 속속 이 도시를 떠나서, 상해 또는 중국의 다른 도시로 간다. 소수는 소련으로 되돌아갈지언정 일본인이 장악한 곳에서는 살지 않겠다고 하게 된다. 이천년이래 겪어온 유태인의 고난이 다시 시작되는 것같았다. 다가오는 재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전혀 생각밖으로, 하룻밤만에 일본인들은 마귀에서 천사로 바뀐다. 돌연 유태인들에게 아주 우호적이고 따뜻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적위우(化敵爲友)
변화는 1934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외교간행물에 강철대왕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의 글 <<오만 독일유태인을 "만주국"으로 불러들이는 하나의 계획>>이 발표된다. 이 글은 일본출판계와 유태인간행물에 중점적으로 소개되었고, 일분국내의 반응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이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이는 탐색을 위한 풍선을 날린 것이었다.
이전에, 그는 자주 일본은행 부총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남만철로주식회사 총재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友), 관동군 부참모장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육군참모장 이다카기 세이시로등과 비밀리에 회동을 거듭했다. 그리고 여러번 야스에 노리히로(安江仙弘), 이누즈카 코레시게(犬塚惟重), 치에코 키이치로(?口喜一郞)등의 소장파인물과도 여러차례 면담했고, 핵심문제는 "만주"를 어떻게 건설한 것인가였다. 화제는 자주 유태인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 글은 사실 이 일본의 "만주"파 실권인물, 공상기업계의 거두들 및 "유태문제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만주"의 풍부한 광산자원과 원료, 광대한 토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많은 공간은 모두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노려온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제정러시아에 대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목적은 바로 제정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동북지방의 광활한 대지였다. 1929년 국제적인 경제위기의 충격이후 세계적인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동경의 의사결정자들은 더더욱 만주를 원하게 된다. 만주를 얻어 위기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중 가장 실력이 강하면서 절박했던 것은 관동군 '만주파'였다. 그들은 전통방식으로 회귀하여 대륙에서 확장할 것을 요구하고, 첫번째로 '만주'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확장기지를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뜻대로 "만주"을 얻은 이후, 일본인들의 걱정거리는 어떻게 만주를 개발하느냐의 문제였다. 먼저 자금이 부족했다. 경제공황기에 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둘째는 이민사업이 난관에 봉착했다. 어떻게 권유하더라도, 일본국내의 잉여인구는 '만주'로 가고싶어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입은 실제로 이미 서방의 중국이익에 대한 독점국면을 깨트렸고, 서방국가의 일본에 대한 집단적인 고립과 배척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일본외교는 아주 곤란을 겪게 된다.
이때 일본인들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유태인"이다.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유태인"은 재부의 대명사이다. 이 인상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나왔다. 유태인 미국은행가인 Jocob Schiff는 제정러시아 니콜라이2세가 유태인을 학살한 원한때문에 4번에 걸쳐 모두 2000만달러를 모아서 일본군대를 대출해 주었다. 원래 곤경에 처했던 일본이 불가일세의 제정러시아를 무찌르고,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게 된다. 일본인들은 세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본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외에 유태인은 미국에서 특수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정부는 기본적으로 유태인들이 막후에서 조종했다. 경제, 법률, 미디어의 핵심영역은 모두 유태인들이 명맥을 쥐고 있었다. 만일 유태인들의 호감을 사고 지지를 얻어낸다면, 일본은 미국 및 세계에서의 외교적 곤경을 호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역량을 가상적 소련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의 유태인배격운동이 갈수록 격화되어, 대량의 지식이 있고, 기술이 있고, 자금이 있는 유태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곳이 많지 않았다. 만일 이들을 모두 '만주'로 끌어들인다면, 그들의 역량을 발휘해서 '만주'를 개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일본의 외교적 이미지도 많이 좋아질 수 있었고, 인도주의국가라는 이미지도 심을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런 와중에서도 이누즈카 코레시게는 동료들에게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태인은 복어와 같다. 신선하지만 극독을 품고 있다. 잘 요리해야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지, 조금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음험하고 교활하며, 세계를 탈취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니, 일본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소위 "복어계획"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경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위에 든 몇몇 사람들 뿐이다. 일본인들은 유태인과 대외적으로 유럽에서 망명한 유태인을 받아들이겠다고만 발표했다. 그리고 만주를 그들의 근거지로 할 수 있게 해주겠으며, 이로써 인도주의의 온정을 베풀겠다고 했다.
일본군이 처음에 하르빈에 들어갔을 때의 야만적인 행동은 거의 70%의 유태인을 쫓아내 버렸다. 복어계획의 입안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순조롭게 계획을 시행하려면, 반드시 하르빈 내지 '만주'를 유태인의 천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 일을 책임진 사람은 야스에 노리히로였다. 그는 여러번 하르빈 유태인지역을 방문하여, 카우프만과 우의를 쌓았다. 그는 태도는 아주 성의가 있었고, 그렇다고 지나치지도 않았다. 적극적으로 유태인을 도우겠다고 하지는 않았고, 유태인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적극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많은 유태인들은 일본인들이 정말 바뀌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일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사람들도 그냥 지나갔다. 누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생활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생각하면, 카우프만은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가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저 감격한 것인지 아니면 이용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둘 다 인지.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는 이 기회를 잡아서 일본인들과 협력해야 했고, 생사의 존망기로에 있는 동포들에게 생존의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일본인의 발아래 신음하는 또 다른 민족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는지, 그들이 자리잡은 그 땅이 바로 일본인들이 총칼로 빼앗은 다른 민족의 피와 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와 인간성의 복잡함은 여기서도 교차된다. 사람은 이미 가고 없고, 옛 일은 연기속에 묻혔다. 도덕판단은 사실 그렇게 취약한 것이다.
모든 일이 일본인의 계획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1937년, 하르빈 유태인지역은 Kaufman을 우두머리로 하는 극동유태인평의회를 조직한다. 연말에 마디르여관에서 제1차극동유태인지구회의를 개최한다. 대표에는 하르빈, 상해, 고베 세 지역의 유태인 약 700여명이었다. 야스에 노리히로와 치에코 키이치로는 옵서버로 참가했다. 유태인들은 일본인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공개적인 결의를 통과시켰다: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국가법률하에서 종족평등과 공평을 누리며, 일본과 '만주국'과 합작하여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건립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종교신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시아의 이스라엘
카우프만은 이때 야스에 노리히로와 이미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자주 함께 호화열차를 타고 하르빈과 대련을 오갔다. 1938년과 1939년에 그들은 다시 두 번의 극동유태인지구회의를 개최한다.
이와 비교하여, 더욱 관건적인 것은 1938년 년말에 동경에서 개최된 "5대신회의"였다. 회의에 참가한 대신들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의 논쟁촛점은 유태인들과 협력해야하느냐 아니냐였다. 그리고 정착지점을 하르빈으로 할 것인지 상해로 할 것인지였다(전자는 육군의 기반, 후자는 해군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독일, 미국과의 사이에 이 미묘한 문제를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오랜 협의와 토론을 거쳐 상세한 계획서가 나오게 된다. 유태인들은 이때부터 일본의 접시 위에 놓인 복어가 된다. "독을 제거하면 먹기 좋은 음식이 된다"
"복어계획"이 정식 실시된 후, 일본인과 유태인의 합작은 날로 긴밀해졌다. 1939년 5월 카우프만이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한다. 카우프만이 일본에 머무는 1개월여의 시간동안, 내각의 각성을 방문하고, 접대를 받는다. 카우프만은 여러 모임에서 만주의 유태인이 일본에 보내는 감사의 목소리를 전하고. 연이어 일본인들이 내는 우호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르빈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제국훈장"을 받는다. 이 훈장은 일본인들도 받기 힘든 것이고, 외국인으로서는 거의 전무한 것이었다.
하르빈뿐아니라, 일본인들의 계획에는 상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7년 일본군은 상해를 점령한다. 이는 다시 한번 "복어프로젝트"의 입안자들을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상해에는 약 4700여명의 중동유태인이 몰려 있었따. 그중에는 상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권력있는 가족과 개인이 포함되어 있었따. 예를 들면, 부동산갑부 사이라스, 하통, 사손양행의 사장인 빅터 사손, 아부라한 가족, 카두리가족등이 그들이다. 상해금융거래소 주석과 99명의 회원중 1/3이상이 중동유태인이었다.
이누즈카 코레시게, 야스에 노리히로와 일본의 주상해총영사 이시구로 시로(石黑四郞)는 유태인의 재산을 이용할 기회를 찾았다. 그리하여 와이탄에 정박해있는 일본의 만톤짜리 전함 "이즈미호"에서 대책을 비밀리에 논의했다. 이누즈카 코레시게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만일 유태인들이 우리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목졸라 죽여버리겠다"
이후, 이누즈카 코레시게는 유럽유태인사회와 연락을 취한다. 1939년에는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일본인, 중국인, 유럽유태인과 중동유태인이 공동으로 자금을 출자한 태평양무역공사가 성립된다. 이 회사의 성립은 상징적인 의미가 경제적인 의미보다 크다. 이는 공개적으로 일본인과 유태인이 합작한다는 것을 보여준 계기였다. 또 다른 일이 이누즈카 코레시게를 흥분시켰다. 빅터 사손이 그를 연회에 초청한 것이다. 이는 이미 일본인들이 상해 유태인들의 사회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태의 발전은 아주 순조로웠다. 이누즈카등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하나의 기밀연구보고서를 올린다. <<유태인자금을 끌어들이는데 관한 연구와 분석>>이었다. 이 90페이지에 달하는 문건은 상해의 부유한 유태인의 자금을 끌어들이는 수든등이 언급되어 있을 뿐아니라, 미국의 여론을 지배할 계획도 있고, 유태인신문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좋은 보도를 하게 하는 것도 있고, 헐리우드 상업영화상인들을 상해로 와서 일본인들이 유태인을 잘 대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일본 미국 양국의 신도교와 유태교 종교간에 상호방문계획도 있다. 그러나 보고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유태인 난민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야스에 노리히로의 표현에 의하면 "아시아의 이스라엘"이었다.
이 계획은 바로 세분화된다. 야스에는 '만주'에 건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누즈카는 '상해'근교에 건립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취하든, "유태인재벌은 반드시 우리의 요구와 조건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유태인자치를 허용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반드시 점진적으로 일본관방이 감독과 막후조종을 하는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복어프로젝트'와 연관하여, 일본에서도 이민정책을 변경한다. 일본은 고베에 유태인사회를 건설한다. 동유럽에서 망명온 유태인들을 받아들인다. 리투아니아에는 일본 주리투아니아영사인 스기하라 지우네(衫原千畝)는 유태인난민 6000여명의 비자를 발급해준다. 그리고 흑룡강일보기자는 일찌기 <<매국노인가 '신들러'인가>>에서 만주국의 주독일공사관 서기 왕체부(王替夫)는 유태인들에게 12000장의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고 조사했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형세의 발전을 보건대, 계획대로 질서있게 잘 진행되었다. 다만 유태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전환기가 너무 빨리 왔다.
운명돌변
1936년 일본과 독일이 방공협정을 체결한 후, 1938년 다시 소위 "문화협정"을 체결한다. 1939년 8월부터 일본은 유태인난민이 상해로 진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외에 일본군경이 상해의 유태인을 때리고 겁주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진정한 전환점은 1940년에 발생한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육군대신을 맡은 후, 실제로 일본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도조는 부임하자마자 야스에 노리히로에게 칼끝을 들이댄다. 야스에는 일체의 직무에서 쫓겨난다. 스기하라 지우네도 리투아니아를 떠난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정식으로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동경으로 와서 문의하는 카우프만을 안심시킨다: 비록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지만 절대로 반유태정책은 쓰지 않겠다.
카우프만은 떠날 때 근심이 태산같았다. 그는 일본인과의 합작은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유태인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은 바로 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일본인들은 하느님과 같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일본인들의 태도변화는 예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려 요소에 좌우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미국유태인은 생각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고, 상상했던 미국금융그룹의 투자는 구리판 하나 온 것이 없다.
1938년, '만주'유태실업가 레프 치크만은 미국의 세계유태인조직 우두머리 Stephen Wise에게 서신을 보내어 "일본인은 만주의 유태인들에게 상당히 공정하게 대한다"고 적었다. Wise의 회신은 그러나 분명했다: "유태인이 일본인을 지지하는 것은 완전히 타락한 행위이다"
한마디로 모든 합작의 가능성을 막아버렸다. 또 다른 측면으로 히틀러정부는 자주 일본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그들과 유태인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눈엣가시였고, 이는 일본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중국전쟁의 진흙탕에 빠져있어서, 일본은 쉽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소련의 위협이 가해지다 더 이상 또 다른 대국인 미국과 등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일 독일의 요구에 따라 유태인을 처리한다면, 일본의 원래 고립된 국제적인 지위는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 분명했고, 이는 일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복어프로젝트"가 별다른 효과가 없더라도 계속 추진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마음 속으로 얼마나 원한을 쌓았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마침내 일본인들의 원한을 풀 기회가 왔다. 독일이 소련 변경을 밀고 드렁가면서, 승리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일본은 이미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군은 진주만을 습격하고, 상해의 일본군은 상해의 모든 외국조계를 점령한다. 유태인의 고난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누즈카 코레시게는 "복어프로젝트"의 창시자의 하나이다. 그는 바로 빅터 사손의 수백만 파운드짜리 건물에 올라가서 이렇게 선포한다: "이제부터 이것은 나의 건물이다. 너의 모든 사람들은 일본의 정책을 따르라. 시대가 바뀌었다. 우리는 너희로부터 빚을 받아내겠다"
이누즈카가 이처럼 실태를 보인 이유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그가 이왕에 유태인들과 교류했던 경험, 그가 쏟았던 정력, 땀, 그가 얻은 성취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누즈카는 책임을 유태인들이 미국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잘 못한 것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들이 루스벨트를 설득해서 일본의 동방에서의 통치권력을 인정하게 했어야 했다. 루스벨트도 유태인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복어프로젝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누즈카의 예측은 맞아떨어진다. 진주만습격후, 일본외상 도고 시게노리(東響武德)가 선포했다: "오대신회의는 실시를 잠시 연기한다. 유태인은 더 이상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육군부도 선포했다: "반드시 유태인은 엄격한 감시감독하에 두어야 한다...반항하는 자는 진압하여 조치한다." 이에 따라, 부유한 중동유태인은 특별수용소에 수감되고, 나머지 1만여명의 유태난민은 소위 '팔굉일우'의 원칙에 따라 보호한다.
유태인은 이용가치가 없어졌다. 그들은 '복어프로젝트'도 몰랐다. 그래서 자기들이 하룻밤만에 일본인들과 나란히 할 정도의 지위에 있다가 갑자기 죄수의 신분이 된 것에 대하여 적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운명이 그들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항공운수업이 운영을 중단한다. 수출입무역에 의존하던 상해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대부분의 회사는 도산하고 문을 닫는다. 살아남은 것은 일본에 접수된다(그들이 하르빈에서 했던 것처럼). 미국에서 온 구조대금도 대폭 삭감되고, 유태인공동분배위원회는 진주만습격후 몇개월후 상해유태인난민구제와 단절되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욱 무서운 재난이 연이어 다가왔다.
1942년, 독일의 게쉬타포(Gestapo) 두목 Josef Mesinger('바르샤바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있음)가 상해로 왔다. 소위 '최종해결방안'을 들고 온다. 이 방안은 중국의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이었다. 유태인신년을 맞이하여, 유태교회당에서 모든 유태인을 체포하고, 그 후에 그들의 옷을 벗겨 묶어 배에 실은 후, 해상을 표류하게 하여 굶겨죽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배를 침몰시켜 흔적을 없애는 것이다; 아니면 소금광산에 보내어 소금을 캐게 하고, 최저 영양량으로 최고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아니면, 수용소를 만들어 유태인들로 의학실험을 하는 것이다.
Mesinger는 눈썹을 휘날리며 자기의 방안을 소개했다. 그 때 자리에 앉은 시바타 미쯔구(柴田貢)라는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는 양심이 남아있는 일본인이었다. Messinger의 방안에 그는 모골이 송연했다. 그리고 반국의 죄명을 무릅쓰고 적시에 유태인에게 통지한다. 상해유태인은 하르빈유태인의 우두머리 카우프만에게 통지한다. 카우프만은 야스에 노리히로와 마쓰오카 요스케 등의 우인들을 통하여 일본정부에 압박을 가한다. 결국 일본은 이 '최종해결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무슨 선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2차세계대전기간동안 일본인과 유태인의 비밀교류사인 <<복어플랜>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유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원래 너의 머리를 가지러 왔지만, 최소한 팔 하나는 가져가야 겠다"
금방 일본군은 홍커우에 유태인지역을 만든다. 각지이 산재하여 있던 유태인은 모두 이 곳에 모아둔다. 그리고 엄격하게 감시한다. 소위 유태인구는 실제로는 두개의 담장 사이에 면적이 약간 넓은 감옥이었다.
1943년에서 1944년 겨울까지, 상해의 기온은 백년이래 최저로 떨어진다. 석탄과 전기공급은 완전히 중단된다. 유태인들은 모든 의복을 팔아서 먹을 거리를 마련했다. 이제는 마대자루같은 것으로 겨울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더욱 늘어났고, 매춘하는 부녀도 수가 늘어났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남자들은 할 일이 없었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혜에 의지하거나 처자에 의지하여 살았다. 이것은 죽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가장 심한 것은 이러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버린 야채등을 주워먹으면서 살아남았다. 전체 유태인사회는 절망의 분위기에 휩싸여 갔고,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장기간 세계정치와 군사각축의 저당물역할을 했던 가련한 사람들은 점점 마비되어 간다.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들의 세계는 유태인거주지의 4000여평방피트 범위였다. 그들의 바람은 그저 매일 배불리 먹는 것뿐이었다. 독일인들은 살육으로 그들을 쫓아냈고, 일본인들은 그들을 괴롭혔다. 미국의 유태동포들도 그들을 포기했다. 하르빈의 동포들도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카우프만은 아마도 후회했을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당초 일본인들과 합작할 때의 의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시온으로
"희망"은 1945년에 다시 떠올랐다. 전국은 일본에 불리하게 진행되었고, 일본인들은 다시 '복어프로젝트'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완전히 미국에 잘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로써 정전을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일본정부의 특사와 유태인의사 칼 챈트만은 교섭을 통하여, 미국유태인들이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정전평화회담을 진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그 보답으로 상해의 2만 유태난민들에게 만주에 자신의 유태국가를 건립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상해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본 챈트만은 바로 Wise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Wise는 그 자리에서 거절한다: "미국유태인대회는 국무원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일본과 여하한 협상도 진행하지 않는다"
유태인이 중국에서 나라를 세우려는 꿈은 무산되었다. 유태 시온조직의 주요창시자인 에이브라함 카우프만은 1945년 소련홍군이 하르빈에 진주할 때, 소련으로 압송되고, 그로체로보감옥에 구금된다. 나중에 아잔카수용소등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16년만인 1961년에 이스라엘로 이민이 허용된다. 그는 마침내 반생을 분투했던 영혼의 나라로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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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일이 있었군요!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국 출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태인들이 하얼빈에 자기네 나라를 세우려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