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케 전투
우거킴 ・ 2025. 6. 17. 9:54
벌써 50여 년 가까이 지났다.
주월 맹호사단 기갑연대가 월맹군과 맞붙어 싸웠던 격전,
안케 638고지 전투는 1972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안케고지는 베트남 해안 19번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638고지와 그 아래 600고지를 포함하는 산악을 일컬었고,
안케패스는 5.5km에 이르는 19번 도로에 붙은 이름이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이 정글 숲에 만나 수시로 짙은 안개와 비를 뿌리는 곳으로,
고지 아래에는 수십 리에 달하는 킬러계곡이 펼쳐져있다.
당시 전황은 맹호부대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월맹군은 19번 공로상 요충지인 안케패스 지역의 638고,지를 기습 점령하고 도로를 차단하였다.
기갑연대 1대대장 김창호 중령이 1중대장 김병석 대위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김 대위, 내일 아침 06시 부로 중대 병력을 638고지에 투입시켜 고지를 탈환하고 19번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라.”
“알겠습니다.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뭐야?”
“지원 화력은 어찌 됩니까?”
“연대 포병의 지원과 미군 헬기의 탄약 공수가 있을 것이다.”
중대장 김 대위는 각 소대장을 소집하여 전투명령을 전달하며,
병사들의 안전을 위한 제반조치를 확실하게 취하라고 당부했다.
1중대는 아연 긴장했다. 군장을 꾸리느라 바쁜 손을 움직이면서 다른 작전처럼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군인에겐 예감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개인 장비는 40kg에 이르렀다.
킬러계곡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을 때,
베트남 군대가 프랑스 군 1개 사단을 섬멸했다는 곳으로 악명이 높다.
이곳에 베트콩 부대가 출물하면서 맹호부대 작전지역에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사단에서는 정기적으로 이 지역에 수색정찰을 나가곤 했다.
D 데이인 4월 11일 새벽 1중대는 소대별로 군장검열을 실시했다.
중대는 군용트럭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안케패스 19번 도로에서
200m 높은 곳에 위치한 600고지에 최전방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기지 주변은 6선의 철조망을 설치하고 사이사이에 조명지뢰를 매설했다.
기지 부근에는 클레모아를 촘촘히 깔고, 1m 깊이의 교통호를 판 뒤 마대를 쌓았다.
관측소와 30여 개의 초소를 재정비하고 주야간 경계근무를 강화했다.
OP에는 중대본부와 1소대, 그리고 화기소대가 주둔하였다.
화기소대는 106미리 무반동포와 81미리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4.2인치 로켓포와 M60 기관총을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밤이 되자 600 고지 주위가 어둠 속에 묻혔다.
1초소 황운용 일병은 조명지뢰가 터지는 것을 보고 분대장 박치원 하사에게 즉각 보고했다.
“분대장님! 1초소 전방에서 조명지뢰가 터졌습니다.”
“1분대 전원, 사격 개시!”
‘탕, 탕, 타당!’
분대장의 사격 명령에 따라 일제히 M16 소총의 자물쇠를 풀고 사격을 개시했다.
황 일병은 클레모어 스위치를 누르고 전방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홍성민 일병은 기관총 손잡이를 잡아당겨 탄알을 장전한 뒤 맹렬하게 사격했다.
나머지 병사들도 전방을 향하여 M16 소총을 발사했다.
야음을 틈타 접근하는 적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분대장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다음 날 4월 12일 새벽, 벌거벗은 몸에 검정 칠을 한 월맹군 다섯 구의 시체가 1초소 전방 1m 앞에 흩어져 있었다.
월맹군은 그 시각쯤, 19번 도로에 특수부대를 투입시켜 교량과 주행 중이던 대형차량을 폭파시키고 도로를 차단하였다.
기갑연대장 이창렬 대령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수색중대를 안케 지역에 투입시켰다.
수색중대장 임동민 소령은 소대장들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1소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2소대는 정글을 통과하여 적이 차단한 지점으로 진격하며,
3소대는 계곡으로 내려가 아래쪽에서부터 목표지점을 향해 공격하라는 지시였다.
3소대가 계곡 쪽으로 나아가는 데 킬러계곡 안쪽에서 적의 총성과 아군의 M16 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1소대 정찰조가 공격목표인 638 고지를 향해 1열종대로 접근해 가는 순간,
콩 볶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리고, 맨 앞의 첨병 박일순 일병이 쓰러졌다.
고지에 매복해 있던 적의 기습사격을 받은 것이다.
포반장 조재기 하사의 명으로 고지를 향해 박격포가 불을 뿜었다.
정찰조는 적의 포격을 피해 고지 아래로 신속히 후퇴했다.
월맹군 3사단 12연대 소속 특공대가 도로변에 벙커를 구축하고 매복해 있다가 1소대를 향하여 화력을 쏟아 부었다,
이때부터 교신이 끊어지고 1소대 병력은 분산되었다.
다른 방향에서 산비탈을 타고 638 고지를 공격하던 중대 지휘부도 큰 피해를 입었다.
킬러계곡에는 희뿌연 안개가 잔뜩 끼어있고 금방 소낙비라도 뿌릴 것 같이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3소대는 안케패스 정상에서 퀴논 방향으로 400여m를 행군종대 대형으로 이동했다.
소대 후미에 적의 로켓포가 몇 발 떨어졌다. 아군의 이동상황이 적에게 노출된 게 틀림없었다.
3소대 첨병 분대는 계곡 아래에 적의 기관총 기지가 있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얼마 뒤 무전이 열리고 아군 피해상황이 전해졌다.
중대장 임 소령이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고 상당수의 전우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피해지역은 3소대와 불과 100m 떨어진 지점이었는데, 정글이라 관측이 불가능했다.
수색중대는 어느 순간 작전 마비상태에 빠졌다.
3소대는 뒤로 돌아 능선으로 올라갔다. 중대 무전병이 요청하여 헬기가 출동했지만,
적의 맹렬한 대공사격으로 착륙할 수 없었다. 중대장 전령이 임 소령을 업고
600고지 1중대 OP로 올라가 의무대로 그를 후송했다. 수색중대장은 과다 출혈로 생명이 위험했다.
2소대와 3소대는 은밀하게 정글 속으로 이동하여 월맹군 벙커 앞 50m까지 접근했다.
병사들은 엎드려쏴 자세로 의심이 가는 곳에 집중 사격을 하며 포위망을 좁혀갔다.
월맹군의 반격도 맹렬했다.
2소대 김귀덕 상병이 고개를 쳐드는 적병을 향해 유탄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정글에 어둠이 깔릴 무렵 2, 3소대 병력에게 뒤로 물러나와 도로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소대장 이진철 중위와 3소대장 양종태 중위, 관측장교 오기원 중위가 대책을 의논하여 특공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2소대장이 특공대장을 맡고 소대별로 4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아홉 명의 특공대원들은 1소대 전우들이 쓰러진 곳을 향하여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갔다.
교전이 있었던 곳에서 1소대장 김석종 중위가 전사한 것을 확인하고
특공대장이 다가가는 순간 적의 방망이 수류탄이 날아와 이 중위마저 쓰러졌다.
저녁 19시에 특공대를 엄호하던 2, 3소대 지역에서 특공대원은 모두 철수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머지 특공대원들은 아무 소득 없이 귀대했다.
수색중대는 작전지휘 능력을 상실한 채, 장교는 3소대장 양 중위만 살아남았다.
수색중대는 비상출동을 한 탓에 준비한 탄약과 식량을 거의 소비하여, 어둠 속에서 마냥 지체할 수 없었다.
적은 로켓포와 소총을 수색중대 쪽으로 계속 쏘아댔고, 중대는 적에게 완전 포위되다시피 하는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부대의 사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수색중대의 작전권을 위임받은 1중대장 김 대위는 수색중대에게 1중대 기지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10명의 전우 시신을 정글에 남겨두고 죽기 살기로 적의 매복 장소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오전 10시에 비상 출동하여 점심과 저녁, 두 끼를 거르고 적에게 쫓겨 다녔다.
월맹군은 후퇴하는 아군 상공에 조명탄을 계속 쏘아대며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1중대 기지에서도 4.2인치 조명탄을 계속 발사하며 아군의 퇴로를 인도했다.
수색중대는 그날 밤 자정이 지나 1중대 기지에 도착했다. 월맹군 특공대가 공격해 왔던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미군이 주둔했는데, 한국군이 대신 진주하여 완벽하게 구축한 지하기지였다.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공격해오더라도 1개 소대 병력만으로 며칠 동안 사수할 수 있는 그런 요새였다.
수색중대 병사들은 1중대 OP 지하벙커 안에서 군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3중대 병사들은 638고지 일대에 출동했다가, 몇 명의 사상자를 내고 역시 1중대 OP로 대피했다.
수색중대원들은 옹기종기 모여 그 날 벌어졌던 숨 가빴던 전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투지원중대에서 배속 나온 박창욱 하사가 그들과 어울렸다.
박 하사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귀국특명을 받았는데, 이번 작전으로 귀국이 지연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난 석 달 동안 600고지 OP 경계근무를 하면서 심상치 않은 일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1월부터 밤만 되면 기지 주변과 계곡에서 사람소리가 들리고 무엇인가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안케 지역은 민간인이 살지 않는 한국군 작전지역으로,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게 실책이라고 그는 말했다.
경계병의 모호한 관측보고는 매번 묵살당했고, 상급부대에 보고되지도 않았다고 분개했다.
사단장은 기지 주변 반경 2km 이내를 매일 반복 수색하여 보고하라 했는데,
1중대는 일일 수색정찰 계획만 보고하고, 이마저 시행하지 않았으며 허위보고만 일삼았다.
시기적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철수를 준비하는 때여서 그런 허점이 노출된 것 같다고 박 하사는 해석했다.
여하튼 지휘관들의 수동적인 전투태세가 화를 부른 것이었다.
그날 밤도 OP의 4.2인치 박격포 포구에서는 포열이 발갛게 달도록 지원사격이 이루어졌다.
*
월맹군은 춘계 대공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각종 무기와 3천여 명에 이르는 정규군 1개 연대를 극비리에 안케패스 일대에 투입하고 절호의 시기를 노렸다.
이 끔찍한 사실을 미군은 물론 한국군의 정보망은 감지하지 못했다.
월남군 44연대에서 연대급 병력이 안케패스로 들어오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첩보를 전했지만, 이것마저 신뢰하지 않았다.
4월 12일 밤 1중대 기지에서 1개 분대가 차출되어 638고지 부근으로 야간정찰을 나갔다.
앞에서 정찰을 하고 나가던 첨병 부영호 상병이 월맹군의 총격을 받아 쓰러졌다.
이로써 1중대 OP에서 270m 북쪽에 위치한 638고지에 월맹 정규군이 벙커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 일병은 1중대에 전입해온 지 두 달 만에 목숨을 잃었다.
부산항을 떠나올 때 눈물을 흘리던 그의 가족 모습이 떠오른다며 동기들은 가슴 아파했다.
안케 지역 638고지는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지하 벙커가 구축된 맹호사단의 전초기지였다.
이곳은 19번 도로와 주변상황을 쉽게 감제할 수 있는 전략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파견부대를 철수시키고 몇 달 동안 방치한 게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4월 13일 아침, 안케 계곡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동쪽 바다에서는 태양이 붉게 솟아올랐다.
퀴논 방향에서 헬기 한 대가 날아와 OP 아래 헬기장에 착륙했다.
적군은 헬기를 향해 곡사포 수십 발을 쏘아댔다.
작전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단 지휘부 요원들이 찾아왔는데, 몇 사람은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이때부터 OP와 헬기장에 적의 조준 포사격이 계속되면서 헬기에 의한 병력 이동과 보급이 끊겼다.
맹호사단장 조만득 소장은 5시간 동안 OP와 계곡에서 장병들과 함께 주둔하면서
병사들을 격려하고 고지 사수를 당부했다.
무장 헬기 여러 대가 적의 근거지인 638고지를 타격하고,
다른 한 대가 1중대 기지 주위를 선회하면서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사이,
사단장을 태우고 나갈 헬기가 낮게 비행하여 늪지대에 착륙했다.
사단장 이하 참모들은 무사히 귀환했다.
사단 지휘부 수송 작전을 수행하고 OP에 귀환하던 3소대원들은
정글 늪지대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40대 민간인과 조우했다.
거동이 수상하여 불렀더니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어떻게 처리할까?”
소대 선임하사관 박일만 중사가 병사들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첩자 냄새가 납니다. 갈겨버리지요.”
1분대장 김성두 하사가 거침없이 내뱉었다.
“순박한 민간인 같은데, 살려 보내야 합니다.”
베트남에 온지 한 달 남짓 되는 오정일 상병이 안타까운 듯, 선임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박 중사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민간인은 돌려보내고 개인거리를 유지하며 OP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오 상병은 사람의 목숨이 한 사람의 입에 달렸다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야간근무를 하던 1소대 최일훈 상병이 자신의 왼쪽 손바닥에 M16 소총을 쏘아 자해했다.
기혼자로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었지만, 소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월맹군은 불규칙적으로 한 시간 간격이 멀다 하게 OP에 포격을 가해왔다.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공포의 시간을 견뎠다.
1중대 OP에는 몇 개의 중대 병력이 한꺼번에 집결하게 되어, 비축했던 전투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이 났다.
특히 물 부족은 심각했다.
우기 때 허드렛물로 쓰기 위해 받아놓은 물마저 식수로 사용했다.
보급품을 수송하던 미군 헬기가 적의 포격으로 OP 근처에 오지 못하고,
탄약통에 물을 넣어 공중에서 떨어뜨리고 돌아갔다.
정보경 대위가 인솔한 기갑6중대 병력이 638고지에서 가까운 곳에 랜딩하다 적의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적군의 벙커 앞에 병사들을 내려놓았으니, 호랑이 아가리를 찾아간 꼴이었다.
미군 헬기에 대한 월맹군의 대공사격으로 조종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6중대는 적과 대치하며 공방전을 전개하다 중대장 정 대위가 중상을 입었으나, 병사들이 바듯이 구출하여 후송시켰다.
1중대 OP는 안케고지 일대의 전망대로서 이를 발판으로 적의 요새인 638고지를 탈환해야 하므로,
병력이 집결되는 곳이다. 적은 600고지를 표적으로 하여 기지에 병사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예외 없이 포탄을 날렸다.
병사들은 끝없는 포격을 받으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우쳤다. 어디선가 바람결에 쇠붙이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3∽4초 뒤에 포탄이 떨어졌다.
소낙비가 내릴 때 번갯불이 번쩍하고 잠시 뒤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지는 이치와도 같았다.
관망대의 초소근무자가 그 소리를 들으면 기관총을 세 번 쏘아 포탄낙하 신호를 보내고,
이를 전달하여 벙커 안으로 대피하면서 피해가 줄었다.
무조건 포사격을 두려워하던 심리가 사라지고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수색중대 3소대 어느 병사는 벙커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적의 포탄 발사를 유인하며 즐기기도 했다.
병사들은 적의 곡사포가 45°의 각도로 폭발하므로
낙하지점으로부터 7∽8m 떨어진 곳에 머리를 땅에 대고 자세를 낮추면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4월 13일 밤, 수색중대는 638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적의 관측을 피하여 OP 정문으로 기지를 나섰다.
3소대장 양종태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어 OP 허리를 타고 정글을 헤치며 몇 시간 동안을 전진했다.
638고지에서 동쪽으로 200m 떨어진 500고지에 도착하여 전투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파고 흙을 마대에 담아 교전에 대비케 했다. 참호 전방에 클레모아를 설치하고 나서야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수색중대와 3중대에서 특공대원 10명을 선발하여 638고지를 공격하라는 대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수색중대에선 분대장 회의를 거쳐 특공조 5명이 선발되었다. 박영식 하사와 4명의 사병이었다.
박 하사는 파월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고, 나머지 병사도 부적격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공조는 신임 한규섭 중대장에게 신고를 했다.
중대장은 적정에 대해 무지한 탓으로, 적 벙커를 찾아 수류탄을 투척하여 박살을 내라는 원칙적인 명령을 내렸다.
특공조는 소총과 수류탄 몇 발, 그리고 대전차포를 한 문씩 걸머졌다.
수색중대 특공조는 3중대 특공조와 합류하기로 한 지점에까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새벽 5시쯤 적의 AK 소총소리가 638고지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3중대 소대장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수색중대 특공조를 기다리던 3중대 특공조가 날이 밝아오면서 고지를 공격했다가 전원이 전사했다고 했다.
오전 8시에 1대대장에게 특공대의 피해상황을 보고하자,
수색중대 3소대와 3중대 전 병력이 연합하여 고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대대 지휘관들은 상급부대장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공격 독촉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차분한 판단과 선택을 할 형편이 못되었다.
얼마 뒤 3중대는 638고지 북쪽에, 수색중대 3소대는 동쪽에 진을 쳤다.
3소대는 양 중위의 지시를 받아 일렬횡대로 전개하여 낮은 자세로 고지 정상을 향해 소총을 난사하며 진격했다.
적의 반격은 완강했다.
박영식 하사가 적의 총격으로 쓰러졌다.
“소대장님! 박 하사님이 총을 맞았습니다.”
“소대원, 공격대기선으로 후퇴하라.”
소대장은 신속하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2∽3m 앞을 분간키 어려운 짙은 안개가 고지 정상에서 몰려왔고,
안개 때문에 3소대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동료들은 박 하사의 총상 자리에 압박붕대를 묶고 안전지대로 신속하게 이송했다. 갑자기 박세욱 상병이 빈혈로 쓰러져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그를 나무그늘에 눕히고 기다리니 의식이 회복되었으나, 80kg 거구를 업고 갈 수 없었다.
7∽8명이 교대로 박 하사와 박 상병을 들것에 태워 힘든 행군을 계속했다.
적의 포사격은 3소대가 1중대 OP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직선거리 겨우 400m를 이동하는데 7시간이나 소요되었다.
한두 명이 부상을 당해도 소대 작전상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몸소 깨달았다.
4월 14일 오전 적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1중대 탄약고가 피격되어 4명의 전우가 부상을 입었다.
3중대가 오전 638고지를 공격하여 9부 능선까지 올라갔으나,
부대원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은 채 철수했다.
4월 15일과 16일은 연대 포병과 사단 포병,
그리고 미 제7공군의 지원을 받아 638고지에 대한 대대적인 포격이 이루어졌다.
*
월맹군은 7년에 걸친 주월 한국군의 전투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이에 대비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들은 안케고지 전역의 랜딩 예상지점에 벙커를 구축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즉각 공격해왔다.
638고지는 한국군의 벙커가 있던 곳인데, 철수하면서 벙커 시설을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에
아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월맹군은 638기지에 땅굴을 파고 식량과 무기를 쌓아두었다.
이 기지와 연결된 땅굴은 서쪽 정글지역과 긴밀하게 연락이 가능했다.
19번 도로를 병참선으로 북쪽 프레이크 콘듐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월남군 2군단은 월맹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이 수세에 몰리면서 19번 도로를 개통하여 무기와 식량을 보급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박 동로 하사는 4월 16일 OP 포진지에서 포 사격을 지휘하던 중, 적의 포탄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적 박격포 탄이 탄약고 옆 교통호에 떨어지면서 아군 다섯 명이 희생되었다.
포탄의 화염으로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시신을 거두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헬기가 출동했으나 적의 대공화력이 OP에 집중되어 영현을 후송하지 못하고 귀대했다.
며칠 동안 전우들이 매복 근무를 서며 시신을 지켰다.
4월 18일 오후 1연대 8중대 100여 명이 시누크 헬기 네 대에 분승하여 OP 인근에 착륙했다.
중대는 은밀하게 이동하여 OP에 속속 도착했다.
이미 안케고지 전투는 기갑연대를 벗어나 맹호사단 범위로 확대되었다.
8중대는 전년도 맹호부대 내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중대였다.
안케고지 전투는 처음엔 베트콩들이 보급품을 약탈하기 위해 19번 도로를 차단한 단순 사건으로 판단하였다.
기갑연대는 예비대인 수색중대를 투입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복귀한 뒤 연대작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타 중대는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작전지역의 방어병력을 제외하고는 출동할 여력이 없었다.
맹호사단장은 독립중대로 작전 중인 1연대 8중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8중대는 50km 떨어진 지역에서 시누크를 타고 30분 만에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시누크에 매단 보급품이 OP 서북쪽 70m 지점 헬기장에 투하되었다.
사역병이 차출되어 몇 시간 동안 탄약과 C-레이션을 OP로 옮겼다.
기갑연대 1대대장 김창호 중령이 1중대 벙커에서 무전기로 작전을 지휘하였다.
1차공격에서 8명이 전사하자, 중대장 김용수 대위는 대대장에게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무조건 올라가 638고지를 탈취하라고 거듭 명령했다.
총각 중대장은 알겠다며 교신을 마쳤다.
그는 ‘저놈의 새끼들이 저기 있다.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며, 앞장서 올라갔다.
병사 겨우 네 명이 9부 능선까지 중대장을 따랐으나, 더 이상 올라오는 병사는 없었다.
김 대위는 적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무전병 김현진 병장이 중대장 전령을 급히 불렀다.
전령 이익환 병장이 중대장을 업고 큰 바위 뒤로 후퇴했다.
수색중대와 8중대는 그날 밤 늦게까지 교전했다.
조만득 맹호사단장은 L-19을 전장에 띄워 격려방송을 하며 작전을 독려했다.
이세호 주월사령관은 미군사령관을 만나 미군 폭격기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군은 폭격기를 출동시켜 적의 근거지를 맹타했다.
8중대는 졸지에 장교 중 3소대장만 살아남았고,
100여 명의 병사 중 전사상자를 제외한 17명만 제 발로 부대에 복귀했다.
*
19일 오전 9시 1연대 8중대와 수색중대는 638고지를 향하여 출발했다.
아군 쪽에서는 638고지에 곡사포를 쏘아 엄호해주었고, OP 관망대에선 기관총 2정으로 엄호사격을 가했다.
수색중대는 며칠 전 공격했던 동북쪽에, 8중대는 3중대가 공격했던 북쪽 8부 능선에 바짝 붙어 참호를 팠다.
적의 관측과 사격으로부터 은폐, 엄폐된 곳이며 장비를 숨겨둘 작전 대기선이었다.
오후 3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200여 명의 아군이 위협사격을 가하며 조별 약진을 감행했다.
피아간 거리가 불과 20∽30m로 좁혀지면서 적의 반격이 맹렬해졌다.
적은 고지 벙커 안에서 내려다보며 조준사격을 가하는데 비해,
아군은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적에게 노출된 채 전방을 향해 사격을 가했으니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다.
전우들이 쓰러져 갔다.
적진 3m 앞까지 진격한 8중대 어느 병사는 갈대숲에 몸을 숨기고서 전우들이 전해주는 수류탄을 받아 계속 투척했다.
전투가 얼마쯤 소강상태가 계속되자 3소대장 양종태 중위는 유탄발사기 사수 이남수 일병에게 발사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이 일병이 소대장 쪽으로 올라가면서 자세를 높이는 순간, 적의 사격을 받고 쓰러져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자세를 더 낮추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이 일병 대신 유탄발사기를 쏘아댔다.
얼마 뒤 최용만 하사의 팔에서 피가 흘렀다.
옆의 전우가 이를 알려주자 최 하사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팔을 잡았다,
그 짧은 순간 적의 총탄이 그의 허리를 관통했다.
동료가 재빨리 최 하사를 아래로 몇m 구르게 한 뒤 위생병을 불러 지혈 조치했다.
이 날 국군은 작전지역에서 전투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638고지 정상에 밤새도록 포격을 감행했다.
수색중대 1, 2소대장이 새로 부임했다.
이들은 연대에서 보충교육을 받을 여유도 없이 헬기로 600고지에 투입되었다.
4월 20일 밤 수색중대는 638고지 8부 능선에 참호를 팠다.
흙은 마대에 담아 거총을 할 방벽으로 이용했다. 병사들은 교대로 눈을 붙이며 아침을 맞았다.
모든 지원은 원활해졌지만, 물이 문제였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라도 받아 마셔야만 했다.
눈앞에는 수거하지 못한 아군의 시신이 널려있어 지켜보는 것도 크나큰 고통이었다.
자칫 자신도 저런 운명으로 바뀔지 몰랐다.
적의 박격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준비된 참호에 포개어 들어가 공포의 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밤 1시경, 적의 포격으로 OP 기지 안 탄약고에 불이 붙어 폭발했다.
보초를 섰던 여러 명의 병사들이 화상을 입었다.
기갑연대 2중대장 박무웅 대위는 638고지 탈환을 위한 출동명령이 내려질 것으로 예견하여,
소대별로 638고지 주변 일대의 사판을 만들어놓고 지형 숙지훈련을 강화했다.
3소대장 임동춘 중위는 분대장들과 더불어 며칠 동안 사판에 축소된 638고지 일대의 능선과 계곡,
그리고 밀림지대와 정글을 표시하여 이를 숙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최종적으로는 유사한 곳을 찾아 분대별 공격훈련을 실시했다.
4월 20일 제2중대에 작전명령이 하달되자, 중대장은 소대장들에게 준비명령을 내렸다.
“우리 중대는 638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명일 14시 당 기지를 출발, 제1중대 기지로 이동한다.
각 소대장들은 이번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필요한 탄약과 장비, 전투식량, 기타 휴대품을 병사에게 지급하고 소대장들이 직접 확인토록 하라.”
임 중위는 제반 장비와 전투식량을 확인하며 출동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임동춘 중위는 갑종 간부로 임관하여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임무를 마쳤다.
그 뒤 하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파월한 장교로 책임감이 강하고 부대를 잘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다.
4월 21일 2중대는 군장검사를 완료하고 14시에 헬기 5대로 목표지점에 공수되었다.
장교 5명과 사병 86명이 참가했다.
4월 22일에도 638고지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아군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기갑연대에서는 여러 가지 공격 방법을 동원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첫 번째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심야에 공격을 가했지만, 아군의 피해가 컸다.
두 번째가 분·소대 전술로 조별 약진을 병행하며 공격했으나, 이도 상공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완전무장을 한 몇 개의 중대 병력이 한꺼번에 돌격을 감행하는 무모한 인해전술이었는데,
엄청난 손실만을 초래했다. 고지 9부 능선에까지 올라갔어도 은폐할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네 번째 방식이 조금 특이했다. 경사가 완만한 지역에서 드럼통 3개에 흙을 가득 채워 굴리면서 접근했다.
드럼통을 방패로 활용한 것이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 굴러가지 않고 적의 표적이 되어 이도 실패했다.
이 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한 무기는 M72 대전차포였다.
전기발화식으로 300m까지 날아가는 1회용 무기인데, PVC로 제작되어 가벼웠다.
수색중대 3소대 선임하사관 박일만 중사는 고목나무에 몸을 숨기고 대전차포를 적 토치카에
세 발이나 명중시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강력하게 대응하던 월맹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2일 오전 8시 임동춘 중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638고지 우측방 하단부 능선에 배치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23일 14시 2중대와 수색중대, 1연대 8중대가 병진공격을 시작했다. 2중대장은 2소대를 좌, 3소대를 우,
화기소대를 예비로 하여 공격명령을 내렸다. 적의 저항은 완강했고 포화는 빗발쳤다.
임 중위는 소대원들에게 자신과 함께 특공대 임무를 자원할 병사는 없느냐고 물었다.
유영복 병장 등 8명이 지원했다.
임 중위는 전령인 박 병장을 따로 불러 시계를 끌러주며 이번 작전에는 참가하지 말라 달래고,
자신이 죽거들랑 부모님께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임 중위는 지원사격이 끝나자 특공대 7명과 함께 9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소대장이 돌격신호를 보내자, 비호같이 적진에 접근했다.
임 중위는 두 개의 수류탄을 연이어 벙커에 투척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벙커가 파괴되었다.
순간 적탄이 임 중위의 좌측 대퇴부를 관통했다.
그는 급히 지혈을 하고 다른 벙커로 이동했고, 특공대원들은 뒤를 따랐다.
개인당 2∽3개의 벙커를 목표로 정하고 전력투구했다.
임 중위는 혼자 힘으로 5개의 벙커를 폭파시켰다.
적의 예봉이 꺾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적의 발악적인 반격은 임 중위의 최후를 불렀다.
2소대 송기우 하사는 제주 출신으로 교전 상황이 엄중한 데도 대열에서 벗어나 638고지 정상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여, 직접 교통호와 벙커 안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소대원들은 그를 엄호했다.
고지 쟁탈전이 몇 시간 동안 벌어지고 있을 때 3소대 박일만 중사가 적탄을 맞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은 아군의 공격방향으로 수개의 수류탄을 던졌다.
굴러오던 수류탄이 김영수 병장의 발목에 걸려 폭발하면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3소대는 다른 부대 병사들과 9부 능선에서 50m 쯤 내려와 작전 대기선에서 야간 경계에 임했다.
*
조만득 사단장은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4월 24일 여명을 기해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도록 결정했다.
이창렬 연대장은 2중대와 수색중대를 638고지 좌우에서 견제토록 하고,
새로 4중대를 우측 능선으로, 9중대를 좌측 계곡으로 우회시켜 고지 후사면에서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4월 24일 새벽 6시 4중대 3소대장 이무표 중위는 소대원 27명을 이끌고 638고지 7부 능선에 도착했다.
전방의 능선이 가파러 우측으로 70m를 이동, 완만한 능선을 따라 8부 능선에까지 진출했다.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선두 병사가 쓰러졌다.
이 중위는 사격 량으로 보아 적군이 소수일 것으로 판단하여 계속 공격하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7시 경 돌격선에 도달한 3소대는 고지 정상에서 여러 명의 적이 후사면으로 도주하는 것을 목격하고
신속하게 정상으로 돌진했다. 7시 30분 드디어 3소데가 638고지를 점령했다.
“개나리 제로, 개나리 제로. 여기는 개나리 셋이다. 감 잡았으면 응답하라. 이상.”
이 중위는 직접 무전병의 PRC-25 수화기를 들고 중대장에게 목표점령을 보고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으며,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희생되었는가. 이 중위는 기쁨에 앞서 가슴이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한 충격을 받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성급한 병사들이 철모를 벗고 “대한민국 만세! 맹호부대 만세!”를 외쳤다.
이 중위는 즉시 경계병을 배치하고 적의 역습에 대비하며 전과를 확인했다. 이후 4중대 3소대는 고지 8부 능선 참호 속에서 경계자세를 취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아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수색중대 3소대장 양종태 중위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고지 점령이라는 영광이 돌아오지 않은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수색중대 3소대는 적의 저항 없이 정상에 올랐고, AK 소총 몇 정과 적의 시체 몇 구를 확인했다.
안케패스 일대 19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서 완강한 저항을 하던 월맹군은 정글 루트를 따라 사라졌고 19번 도로는 개통되었다.
*
이 전투에서 맹호부대 장병 75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한 소대장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
적은 705명이 사살된 것으로 추계하였지만, 확인되지 않은 전과였다.
638고지를 처음 점령한 것은 이무표 중위의 4중대 3소대였다.
이 중위는 사단장의 약속에 따라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렸다.
제3사관학교 1기생 선두주자로서 승승장구하다 대령으로 예편했다.
2중대 1소대장 임동춘 중위는 공격의 선두에서 5개의 벙커를 폭파하며 고지 점령의 돌파구를 마련했으나 전사했다.
그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1계급이 특진되었다.
그 외에 연대장 등 4명에게 을지무공훈장, 6명은 충무무공훈장, 13명에게 화랑무공훈장,
20여 명에겐 인헌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수색중대 3소대 박일만 선임하사는 양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퇴역했다.
8중대장 전령이었던 이익환 병장은 국군묘지를 찾아 김용수 대위의 묘소에서 자결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힘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