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하시는 하나님
□ 본문 : 창세기 49장 22-26절
오늘 말씀은 야곱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에게 하는 유언이며, 또한 요셉지파를 향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유언을 읽으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1:2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도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유다에게 준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구원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준 축복은 구원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김서택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원에서 파생되는 많은 열매들, 즉 구원에 연결되는 많은 축복’입니다.(김서택, 열두 아들이 받은 축복, 홍성사, p,2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축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축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악인이든지 선인이든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비추시는 해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비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모든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일반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준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축복을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을 얻습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예언한 축복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예언한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핵심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무성한 가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샘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예수님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납니다. 밖에 있는 샘이 아니라 안에 있는 샘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샘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받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구원받습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구원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상황도, 어떤 문제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상황을 바꾸시고 문제를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것이 샘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자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상황이 역전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평안과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샘이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주는 축복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져버리는 축복입니다.
축복의 샘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를 만났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날마다 이 축복을 누리며 삽니다. 예수님이 축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축복이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축복이 되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밖에서 축복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꿔주셔야 하는데 자기가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축복이 되시는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밖에도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래성과 같은 것입니다.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더 견고한 모래성을 쌓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튼튼하게 쌓아도 모래성은 모래성입니다.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축복이 되시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일평생 모래성을 쌓습니다. 어느 모래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 든든해 보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파도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모래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만 모래성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밖에서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축복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엇을, 예수님을 통해서 누리는 그 무엇을 더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축복의 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세상에서, 사람들에게서 우리 영혼을 채워줄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목이 마를 것입니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축복하십니다. 예수님 그분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 되시는 예수님을 24시간 바라보며 축복 되시는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합니다. 그것을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그분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예수님을 주야로 바라보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3) 말씀을 통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이렇게 말씀을 사랑해서 말씀을 종일 읊조리는 시편기자는 이어서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말씀이 너무 단 것입니다. 꿀 보다 더 단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말씀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마치 자신의 인생의 결론처럼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시119:72)
여기에 나오는 말씀(법, 율법)을 예수님으로 바꾸어서 읽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예수님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예수님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이렇게 멋진 고백이, 이렇게 행복한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축복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 무엇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여전히 받은 복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그 분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면 축복이신 예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축복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샘 곁에 있으면 무성한 가지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무성한 가지가 됩니다.
2. 축복은 승리를 통해 누립니다.
23절, 24절 말씀입니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을 무성한 가지라고 유언한 야곱은 이어서 활쏘는 자가 요셉을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요셉을 쏘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성경은 25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원수들이 무섭게 그를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격하지만.” 요셉은 야곱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또 유다와 함께 야곱의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는 무섭게 요셉을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격하는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랬고, 보디발의 아내가 그랬고, 보디발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배후에는 요셉을 무너뜨리려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축복이신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아무 고난도 아무 시련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받은 인생이기에 마귀가 더욱 강하게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크면 클수록 고난도 시련도 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축복받았다고 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느냐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이런 아픔은 겪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 믿고 왜 더 힘드냐고 불평하고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당하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겪어야 하는 아픔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기 전에는 아무 시련도 고난도 없었습니까?
※ 어느 성도님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인생의 허무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가질 만큼 가졌고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 안에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허무함이 너무 커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신의 허무함이 채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었던 공허한 마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채워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믿지 않아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유익한 고난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겪는 고난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통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은 공허합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것이 육신의 고통보다 사람을 더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고난도 없고, 몸도 건강하고, 하는 일도 잘되고, 인간관계도 무난하고, 그래서 날마다 잔치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도 고민해보지 않고 살다가 그대로 지옥에 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의를 위해,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세상을 위해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당할 때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
고난을 이긴 요셉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고난 뒤에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감이 떨어질 때까지 감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섭게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격하는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는 자가 누리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 제자훈련 교제 ‘예수님의 사람1’에 나오는 유기성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언젠가 교회에 저에 대한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은 정말 근거도 없이 추측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서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집사님 중의 한 명이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속이 타는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 집사님을 당장 찾아가 헛소문을 퍼뜨린 연유를 따지고, 개인적인 사과는 물론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 ‘아, 바로 지금이 내가 죽어야 하는 때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 생각을 예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같은 고백을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 고백을 열 번째 반복하는 순간, 저에게 정말로 죽음이 실재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죽음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안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거짓 소문을 퍼뜨린 집사가 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쉬쉬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하였던 교인들에 대한 섭섭함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음의 격동이 사라지고 평온해졌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마음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이 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데도 억울하고 분하고 속이 타서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을 만납니다. 마귀가 무섭게 우리를 공격하며 활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아닌 그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말, 그 사람이 한 행동을 묵상하게 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전쟁터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싸워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도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지 않으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안만이 아닙니다. 기쁨도 감사도 은혜도 사랑도 싸워서 승리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전쟁터입니다. 교회가 전쟁터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가 무섭게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교회 성도님의 지난 수요일 동행일기입니다.
今日は人に期待を寄せて落胆した事を悔い改めた。
人を見ないで主だけを求めるなら、落胆する事はないのに。頭で分かっていても隠れている自我が主張し始めると怒りで心の平安がなくなる。
・ ありえない!怒っていいよ!
・ 愛しなさい!
2つの考えで行ったり来たりして、どっちが本当の自分なんだろう
どっちも自分の姿。主に従うか、悪魔に従うかの違いなんじゃないのか。
そう思うと、悪魔なんかに従いたくないと思った。
主よー!主よー!と悪魔が与えた考えが消えるまで呼び求める。
主は勝利者!勝利者のなまえを呼び求めれば勝利を下さいます!感謝します!
오늘은 사람에게 기대를 갖고 낙담한 일을 회개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을 구한다면 낙담할 일이 없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숨어있는 자아가 말하기 시작하면 분노로 마음의 평안이 없어진다.
· 말도 안 돼! 화내도 좋아!
· 사랑하라!
두 개의 생각으로 왔다갔다하고, 어느 쪽이 진정한 나일까
둘 다 나의 모습. 주님을 따르느냐 마귀를 따르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주님! 주님! 하고 마귀가 준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주님을 부른다.
주님은 승리자! 승리자의 이름을 부르면 승리를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이 성도님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싸웠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승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통해 축복을 마음껏 누립니다.
3. 축복은 사명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것은 요셉 지파의 축복이 다른 지파들에게도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누고 베풀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우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담 안에 있는 우리 인생과 가정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의 가지가 담을 넘도록 축복하십니다.
담을 넘은 것은 나를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담을 넘은 것도 자기가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 먹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쌓아놓습니다. 자기를 위해 쌓아놓고 자녀를 위해 쌓아놓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러면 부자가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가난하게 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4) 담을 넘은 것 까지도 자신이 가지려고 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담을 넘도록 축복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당장은 담을 넘은 것도 자신을 위해 쌓아놓는 자들이 잘 사는 것 같지만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축복은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담을 넘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가정과 기업을 무성한 가지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축복을 사명으로 연결시킬 때 하나님의 축복이 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담을 넘은 축복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물질은 그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담을 넘은 정말 중요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모든 담을 넘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고, 끝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미 담을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무성한 가지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우리 가정 안에만 계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은, 구원의 축복은 우리 가정을 넘어 치바에 미쳐야 합니다. 치바를 넘어 일본, 일본어 넘어 열방까지 미쳐야 합니다.
축복은 사명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사명을 감당함으로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과 기업에 하나님의 축복이 날마다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