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6월 현충일과 6.25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달. 나라를 위해 몸바치 호국영령들의 희생, 공헌을 온 국민이 되새겨 보자는 참된 취지에서 제정된 호국보훈의 달이다.
오늘(6월22일) 성서포럼 남녀(40명)회원들은 1박2일로 호국보훈의달을 기념, 안보강화 수련교육및 전적지(전방부대:육군1개소 해병대1개소 장병위문) 유적,견학을 목적으로 새벽 5시 일어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많은회원들과 같이 가는 전방부대및 격전지.유적지 견학길이라 기대에 부푼 채 동부전선으로 여정의 장도에 올랐다.
첫째,우리 일행은 짜여진 일정표에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일찍 제1땅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소재 제1땅굴을 안내자의 인솔로 둘러 보고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민회관에서 마련한 점심은 정말 꿀맛 같았다
* 제1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연천군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방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나비(넓이) 0.95m, 높이 1.2m, 깊이 지하 0.65m의 콘크리트 슬래브 구조로 되어 있고, 길이는 약 3.6km에 달한다. 유사시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을 통과시킬수 있으며, 궤도차를 이용할 경우 포신(砲身)과 중화기 운반에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북한이 기습전을 목적으로 남한 근방의 휴전선 비무장지대 지하에 굴착 시설한 남침용 군사통로.북한의 땅굴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써 전면적 기습전과 방위선 후방공략의 전술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만들었고, 이미 확인된 것이 4개인 것으로 보아 휴전선 전역에 걸쳐 20여 개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북한의 땅굴사업은 1971년 9월 25일 공산당의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속전속결법을 통한 대남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이른바 김일성의 <9.25교시>가 내려진 데서 개시되었다.
땅굴과 관련하여 숨겨진 북한의 전략적 기도는 다음과 같다고 필자는 생각된다.
1, 전면전을 전개할 때 대규모병력의 신속한 이동으로 대한민국의 중요전략지역 및 수도 서울을 강타. 점령
2, 남한에서 각종 사회혼란이나 무장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게릴라부대인 특수8군단과 경보병부대를 침투시켜 국가전복을 획책
3, 대남간첩 침투와 불순세력에 대한 무기공급
둘째, 일행은 경의선 철도연결(도라선역:문산-장단간 12킬로미터 단선 철도,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는 경의선(京義線)의 최북단역)
*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京義線) 철도의 역 중 하나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다. 해발 156m의 도라산(都羅山)에서 역이름을 따왔다. 2000년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에 의해 2002년 2월 초 도라산역이 들어서 남쪽의 임진강역까지 4㎞ 구간을 연결하는 공사가 완료되었다.
2002년 2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2월 20일 도라산역을 방문, 연설(연설의 요지:도라선역에서 남쪽을보니 훤한데 북쪽을 바라보니 검정이더라 김대중대통령이 북쪽도 훤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하고 철도 침목에 서명하는 행사를 갖음으로써 한반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각광을 받게 된 곳이다.
그런데 도라선역의 규모나 시설은 넒고 장대했으나 졸작으로 설계되고 건물의 관리 미숙으로 지하통로와 계단은 조그마한 비에도 지하가 빗물이 스며들어 어린이 미끄럼 장소로 변한 느낌이 들어 못네 아쉬움으로 남았다.
일반인들은 비무장지대의 안보관광지를 여행하는 것은 일반 여행과는 조금 다르다. 휴전선과 인접하거나 민통선내에 위치,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 기차를 타고 오면 도라산역에 버스가 기다리고있다. 이 버스로 제3땅굴, 도라산전망대, 통일촌마을, 도라산역을 관람할수 있다. 소요시간 2시간40분. 요금은 8,700원. 임진강에서 도라선역 구간열차표는 별도로 구입해야 한다.
셋째, 도라오피(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는 군 전망대)
* 도라산 도라전망대는 1986년에 사업비 약 3억원을 들여 국방부에서 설치한 통일안보관광지로 유명하다. 도라전망대에서는 남측에서는 유일하게 북한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개성시가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다.
망원렌즈 안으로 보이는 북측의 "금안골"이라는 농촌마을에는 북측 주민의 움직임과 초등학교에서 어린소년들이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 관측되기도 한다
네째, 판문점(경기 파주시 진서면(津西面)의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취락)
캠프 보니파스(미루나무 도끼만행시 현장에서 전사한 미군측 중대장의 이름)에서 간단한 견학 안내교육.스라이드상영,브리핑 설명후 자유의집.팔각정.회담장소.제1.2.3.4.초소.돌아오지 않는다리.매점.유엔군 막사 등을 둘러보았다.특히 회담장 내.외부의 우리 경계병은 마네킹형 전진배치 자세로 미동도 않고 철통같이 무장된 군인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약 50km, 개성 동쪽 10km 지점으로 수리적(數理的) 위치는 북위 37°57"20″, 동경 126°40 "40″. 널문리라고도 한다. 6.25전쟁 전만 해도 지난날의 의주가도(義州街道)와 사천(砂川)내가 만나는 지점의 이름없는 한촌(寒村)으로 초가집 몇 채뿐이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세계적 뉴스의 초점으로 부상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고 그로부터 이곳 명칭은 UN측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 초까지의 전쟁 포로교환도 이곳 판문점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현재,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하여 유엔측의 ‘자유의 집’ 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71년 8월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의 7.4공동성명 등으로 판문점은 7,000만 민족의 가슴을 한때 뜨겁게 한 바 있고, 1973년 6월 남북조절위원회가 결렬된 지 6년 반만인 1980년 8월부터는 남북총리회담의 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려 8차까지 거듭한 끝에 북한측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공전(空轉)된 일도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공동경비구역의 서쪽 사천내에 걸려 있는‘돌아오지 않는 다리(옛이름:널문다리)’ 부근에는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병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의 발단이 된 미류나무(지금은 표지석으로 그날의 흔적을 대신) 제3초소-제4초소 중간지점에 위치 경계병의 시야를 가림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미군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 현장이었다.
다섯째: 남한의(대성동)과 북한의(기정동)
우리 일행은 태운 버스는 하루 일정의 하일라이트인 국가 안보교육 요람인 강화도 안보교육 수련원을 향하던 길목 버스에서 차창 밖을 통해 바라본 남쪽의 자유의마을(대성동)과 북쪽의 선전마을(기정동)을 안내자의 설명으로 코앞의 전경을 바라만 볼뿐가 볼수 없어 못내 섭섭했다.바라본 두마을의 구조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으나 외관상전형적인 우리 시골의 풍요롭고 정겨운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좋았다
* 휴전선 남쪽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마을.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군내면 조산리(造山里). 휴전성립 후 대성동이 군사분계선 남쪽에 속하게 되자 정부는 6·25전쟁 때 피난가지 못한 주민들을 그곳에 그대로 살게 하여 이 마을은<자유의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휴전성립 후 대성동이 군사분계선 남쪽에 속하게 되자 정부는 6.25전쟁 때 피난가지 못한 주민들을 그곳에 그대로 살게 하여 이 마을은 <자유의 마을 대성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자유의 다리까지 약 12.6㎞, 개성까지 약 11.5㎞, 판문점은 1㎞, 군사분계선까지 약 400m 거리에 있다.이곳 주민들은 유엔사의 ‘대성동 민사규정’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이 마을 거주요건으로 ‘1년 중 최소한 8개월 이상 마을에서 거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 외부 체류자에 해당돼 주민권 회복을 요구할 수 없다.’ 이밖에 통행금지를 위반하면 1차 경고를 받고 2번 위반하면 7일간 마을에서 추방당한다. 5번 위반하면 4개월간 추방으로 주민권을 박탈당한다. 논에 일하러 가거나 돌아올 때 유엔사 민정반에 신고해야 하는데 5번 어기거나 유엔사 소속 군인들에게 폭언이나 불순한 행동을 해도 4개월간 추방령을 받는다. 53가구 230여 명이 살고 있다. 북한의 <기정동>과 함께 남북한 분단의 민족적 비극을 상징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정부의 많은 혜택(모든 세금면제)과 기름진 논(소유권무. 경작권만 인정) 가구당 3만평이상의 부농들로 이곳에서 제배된 청정 쌀은 고가로 판매되여 가구당 년 소득이 6-8.000만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섯째: 수련원에서의 생활과 안보교육
*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은 고속주행으로 안보강화 교육장(폐교를 이용해 마련한 안보 교육장 1칸. 식당 1칸.관리실 1칸.강사 휴게실 1칸.남.녀 세면장과 화장실 2칸,숙소방 10칸으로 준비된 깨끗한 전원형 별장 같았다)숙소인 인천광역시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 소재의 강화도 안보 수련원에 18:00경에 도착 여행의 장도를 풀었다.
1. 18-17:00까지 수련원에서 준비한 모듬회와 차림표따른 저녁은 정말 맛 있고 정갈해 조금 과식을 할 정도로 잘 먹었다.
2. 18-19:00까지는 북한 탈북주민(여.42세.2002년 입국)의 한국과 북한의 실 생활비교에 관한 강연과 질의 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3. 19-20:00까지는 우리 남한과 북한의 정치.경제에관한 비디오 영상물 방영으로 시청각 교육을 실시했다.
4. 20:30-23:30분까지는 6명을 분임조로한 6개의 분임조가 열띤 공방의 토의를 거처 전체 대 포럼의 시간으로 회원 서로간의 의견을 좁히는 가시적 성과 있는 산 안보교육의 장이 되었다는 자평에 내일을위해 전체 수면과 휴식에 들어가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무리 했다.
2일차 동부전선 최전방 강화도의 24시
첫째: 덕진진
* 우리일행은 6시에 기상 7시부터 안내자의 안내로 강화도 해병대방문.격전지.유적지를 고루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강화 대교쪽에서 초지진 쪽으로 약 1Km 정도 사거리에서 해안 쪽으로 조금가면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지로서 명인양요,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포격 전을 전개하였던 덕진진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인 것이 성문인 "공조루(拱潮樓)" 이며 현판은 흘려 쓴 글씨체로 잘 읽을 수 없다. 이 공조루를 지나가면 남장포대와 덕진돈대 그리고 경고비가 있었다.
강화도에는 진과보 이외에 8개 정도의 포대가 있었는데 그 가운에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곳이 바로 이 남장포대로 자연적인 지형을 잘 이용해서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해상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선조들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천방면에서 오시는 방문객들은 새로 개통된 " 강화초지대교를 이용 하시면 더 빨리 덕진진에 오실 수 있다는 안내자의 자상한 설명도 있었다.
덕진진에는 덕진진에서 관할하던 사각형의 덕진돈대가 있었다. 덕진돈대를 뒤로 한 바퀴 둘러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대원군이 세운 " 경고비 " 가 있었다.비문의 내용은 "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라고 씌여져 있죠, 어떠한 외국 선박도 함부로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쇄국(자주 국방)의 의지를 잘 나타낸 것이다
이 비를 자세히 보면 포를 맞은 탄흔이 있었다.역사적으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 전을 벌였으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하여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포대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돈대들은 숙종 5년(1679)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의 승군 8천명과 어영군 4천3백명을 동원하여 40일 동안에 걸쳐 49개의 돈대를 축성할 때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12진보(鎭堡) 중의 하나.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留守)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미국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포대에서 물리쳤으나, 미군이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과 병사들은 분전하였으나 몇 명을 제외하고 전원 순직하였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정비하였다. 사적 제227호.
어재연장군을 비롯한 약53위의 시신을 모신 별중의 별 북두칠성묘는 국방의 의무를 양심적 거부로 생각하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관람시키고 안보교육 시키는 산 현장 교육으로 귀감이 될만한 장소였다.
셌째: 강화 역사박물관
* 강화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참성단 등 우리나라의 개국과 함께 하는 역사의 고장이며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39년간의 도읍지로서 팔만대장경판각,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 등 민속문화의 황금기를 꽃 피워 온 산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시 인조임금의 피난수도 이기도 했으며 조선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사건인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등 외세 열강의 침입에 의연히 맞서 싸웠던 국난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이어받은 강화는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억 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년 9월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하였다.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40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관은 지하1층, 지상2층으로 총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옥외에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해선망 어선, 비석군 (강화도 비석의 총 집합장소)등을 볼 수 있었다.
1. 제1전시실
제1전시실에는 석기시대부터 선조들 생활흔적인 돌도끼, 돌칼, 환석, 유문토기 등을 전시했으며 지석묘, 청동기 시대 생활상등이 펼쳐진다.
2. 제2전시실
제2전시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전시실로 고종 19년(1232년)에 강화 천도시부터 불심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던 팔만대장경 제작 외에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3. 제3전시실
제 3전시실은 몽고침입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북방민족의 침략사 전시실로 병자호란 당시 유품등이 전시되어 있다.
4. 제4전시실
제 4전시실은 1866년 병인 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시 전투의 생생한 모습,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말미암은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1910년 한일합방과 강화의 3.1운동사가 펼쳐진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매우 안타깝고 애석한 것은 세계기록 문화유산인 조선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가 포함된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가 반환을 미루고 때재배 전동열차는 달리고 있건만 아직도 우리의 외교,국방이 열세라는 느낌이 들었다. 외규장각은 국왕의 문장과 친필 등을 보관된 생생한 역사로 정부는 반환에 최선을 다해 돌려 받아야 할것이다.
네째: 낙조 드라이브 코스 "동막-장화리 해안도로"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의 동막해수욕장에서 여차리, 장화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달리면 누구나 낭만에 젖는다. 끝없이 펼쳐진 시꺼먼 갯벌과 그위에 듬성듬성 드러누워 있는 고깃배들. 멀리 밀물때를 기다리며 찰랑거리고 있는 바다물위로 날아드는 철새떼. 도로변 곳곳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 놓은 돈대(포대)에 오르면 사방이 확트인 `끝내 주는 풍경과" 전망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저녁때 해가 바다속으로 떨어질무렵이면 환상적인 낙조 드라이브를 즐길 전망좋은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석양을 바라보거나 도로변 전망좋은 카페를 찾아 이곳에 칠흑같은 어둠이 깔리면 또다른 낭만이 바닷가를 따라 가로등 같은 불빛이 40∼50m 간격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어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탄성이 절로 나 올만하다.
야간 간첩 침투를 막기위해 바다쪽을 향해 불빛을 비추는 일종의 감시등 이지만 관광객들에겐 낭만의 해변 가로등으로 보인다. 봄이 되면 이곳 갯벌은 조개나 낙지를 잡으려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다. 갯벌에 이어 낙조 감상 명소로 유명세를 타면서 해안 주변으로 바다등 전망을 강조한 카페 5∼6곳이 들어섰다. 장화리 해안도로 끝지점인 선수포구(후포항)에는 해수탕도 있다.
낙조 포인트는 장화리. 마치 바다를 양팔로 껴안듯 양쪽으로 아담한 산이 있고 앞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해가 바다속으로 내려갈 채비를 할 즈음, 잘 익은 홍시같은 붉은빛이 찰랑이는 물결과 갯벌위를 달려오는 모습은 서정미 넘치는 한폭의 동양화.
다섯째: 제적봉의 드라이브 "해안도로 따라 북녘 山河 즐기기"
* “북한의 아름다운 산하를 강화도 북쪽 민간인통제구역 해안도로 드라이브코스에서 만끽하세요”인천 강화군 해병대 청룡부대의 책임지역인 민간인통제구역내 해안도로를 전격 개방,관광객들이 왕복 2차로 규모의 해안도로를 따라 북한의 산하를 즐길 수 있도록 검문소 출입절차를 대폭 개선했습니다.
검문소 개방구간은 강화대교 인근 용정리검문소에서 제적봉을 거쳐 인화돈대간 28㎞구간이며.특히 강화도 주민들에게도 접근이 제한되어온 양사면 철산리 제적봉이 북한 황해도를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자리잡아 관광객들에게 인기로 기대됩니다.
군당국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출입할 수 있도록 검문소 출입절차를 간소화했으나 낮시간에만 적용할 방침이란다.군 관계자는“민통선 북방지역인 양사면 철산·북성·교산·인화리,송해면 숭뢰·당산리,강화읍 월곶·대산리 등에서 바라보는 북한의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며 “이번 남북한 고위급 회담으로 강화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 했다.
여섯째:격전지 견학의 종합편
* 그외 강화도 면적 302.14㎢, 남북길이 30㎞, 동서길이 12㎞, 해안선길이 99㎞이다.2002년 12월 현재 2만 96세대에 7만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최고점은 마니산(摩尼山:468m)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던 400년경에는 혈구(穴口)·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였고, 신라에 귀속된 뒤에는 해구군(海口郡)·혈구진(穴口鎭) 등으로 개칭되었다. 939년 강화현, 1895년 강화군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 교동면과 통합되었다. 1973년 강화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 고려시대 몽골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구릉성 섬으로 분리되었다가, 한강·임진강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다. 그후 염하(鹽河)가 한강에서 분류하여 김포와 강화 사이에 해협을 이루면서 다시 섬으로 독립되었다. 기후가 온화하여 남서부에 동백나무·초피나무·비목나무(보얀목)·탕나무 등의 난대림 자생한다.
지질은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니산·고려산·낙조봉·혈구산 등 산지가 있으나 험준하지는 않으며, 간척사업으로 인해 곳곳에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다. 연근해에서는 민어·밴댕이·새우류·꽃게·어패류 등의 해산물이 많이 잡히고, 지역 특산물로 인삼·2차대전 영웅 맥아더 원수에게 선물한 화문석·순무 등이 유명하다.
보물 제10호인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수십 점이 넘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지방지정문화재들이 있으며,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80)·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79)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마니산과 신선놀음·손돌풍·성토닦기노래 등 많은 설화와 민요가 전해지며, 시선뱃놀이·용두레질놀이·씨름굿·안택굿·별신굿 등의 민속놀이와 의례가 행해진다. 1998년 옛 강화교 북쪽 100m 지점에 4차로의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차량들이 운행되고 있다
아픈 상처는 아직도 이 나라 곳곳에 남아 있는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6.25 전쟁은 점점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현충일과 6.25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그 때의 상처와 아픔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곱째: 안보 강화교육과 격전.유적지 견학의 결론
* 거창한 호국정신을 앞세우기보다는 눈앞에 보인 민족 전체의 위급함을 내일처럼 생각피땀흘려 조국을 지키신 분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6월 6일에 긴 사이렌이 울리면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하도록 배워 왔다. 이는 참상과 손실이 너무컸던 6.25전쟁에서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너무나 값지고 귀한 것이기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또한 이 기간동안 민족이 걸어온 수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거울삼아 다시는 이러한 아픔이 없는나라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 선열들의 희생의 댓가를 많이 받은 우리들은 이제 그분들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자세로 생활하는 일 역시 후손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며 의무라 생각한다. 우리의 국가의식이 튼튼할 때 국가의 힘과 안보도 서게 되는 것이면 안보강화,보훈은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아픔을 대신한 순국선열과 보훈가족을 어루만져주는 미덕이 빛나는 6월이 되었으면 좋겠다.끝으로 이 행사를 주관한 국가정보원 대구지원.주최.후원.협찬사 달서신문 정판규사장님께 전체 방문 회원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강문/대구경제복지연구소장(011.813.4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