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0.28.
"얼른 나와 봐. 준비 다 됐나?"
"예."
"얼른 싣자. 얼마 안되는 걸 가지고 종일 꾸물거리네."
"알았어요."
남편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연신 말자를 채근했다. 작년같으면 남이 포기한 것 까지 백여가마가 넘었던 것이 올해는 반별로 마지기수로 나누니 열두마지기 농사에 40Kg 매상 가마로 겨우 서른 여섯가마.
쌀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예전같으면 몇가마니정도는 포기하던 사람들도 다들 벼수매를 신청하느라 양이 더 줄어들어 버렸다. 집집마다 작게는 몇십가마부터 많게는 몇백가마를 담느라 벼 수확이후 날씨만 좋으면 모여 담아주고 하던 일을 건조기를 들여온 다음부터는 말린 후 무게를 달아 담고 지퍼만 닫으면 되니 일 같지도 않고 또, 양이 줄어 다들 제집 일을 끝내면 그저 기웃거리기만 할뿐 신명이 없어져 버렸다.
쌀값이 내린다하니 정미소에서 쌀을 찧는 것도 수월치 않아 다들 정미소에서 정해주는 날을 기다리기는 하나 그것도 값이 얼마되지 않으니 이래저래 나락농사가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몇일전 말려 놓은 나락을 이미 수매자루에 담아 놓은 후라 다른 일은 없지만 남편도 말자도 힘이 빠져 예전 같으면 새벽부터 온 식구가 부산하게 움직여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서느라 골목이 시끄러웠을 것을 오후까지 미적거리며 실어 놓지도 않았던 터였다.
"한 돈 백만원 될까?"
"선도자금을 써서......... 한 칠팔십정도밖에 안될걸?"
"농약값이 조금 모자라겠는걸요?"
"그렇지?"
"능금조합엔 어쩌나?"
"우선 이자 붙은 거나 갚고 나머지는 내년으로 미루던지, 아니면........."
"이제 사과만 나가면 그만인데 농약값하고 다 될지 모르겠네요."
"글쎄."
매상자루를 들어 트럭에 실으며 남편은 맥빠진 목소리로 글쎄만 반복했다.
"올해는 우박까지 맞았으니 사과값도 할수 없는데........"
"글쎄. 일단 실어내고나 보자."
매상자루를 싣고 나서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수매장소로 떠나고 말자는 빗자루로 마당을 휙휙 쓸어내었다.
"아이고. 살살 좀 해라. 먼지좀 봐라."
"얼른 와. 수매하고 오셨나?"
"왠걸. 하도 안와서 전화했더니 매점에서 술 한잔 한다누만. 빨리 오라켔더니 성질만 팩하고 내는걸?"
"왜?"
"왜는? 성질도 나지. 매상해서 농협 이자 주고 나니 좀 모자란다고 나머진 언제 줄라는지 묻더라며 속을 내는 구만. 누가 돈을 쓰랬나. 농사 지으랬나."
옆집 석이네가 종알거리며 남편흉을 보았다. 말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빗자루를 놓고 수건을 벗어 옷의 먼지를 털었다.
"들어가. 차나 한잔 마시자."
"안그래도 나도 속이 상해 맥주나 한잔 하자고 왔구만."
"그래. 마침 아래께 사과 따던날 먹던게 좀 남았네. 들어와요."
말자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엌에서 찐 고구마를 꺼내던 시어머니가 돌아본다.
"갔나?"
"예."
"옛날 수매하던 날은 잔칫집 같더니만 애비는 우예 종일 찌푸렸네. 맨 그러냐?"
"예."
"그러니 우야노. 배운 도둑질인걸. 큰일이다. 새끼는 커가고."
"할매는. 할매 돈 많이 벌어 놨으니 그걸로 손자들 시켜주소."
"내가 뭔 돈이 있는가? 하기사 그거라도 저 필요하면 써야지만서도......고구마 먹어라."
"예."
시어머니가 나가고 난 후 말자는 맥주를 꺼내다 말고 되 넣고는 주전자를 가스렌지위에 올려 놓았다.
"술 안줘?"
"차나 한잔 먹자. 수매하러 가서 기분이 안좋을텐데 집에와서 술먹은 마누라보면 기분이 좋을것 같지 않어. 차나 마시자."
"저러니 맨날 요조 숙녀지. 나나 마실텨. 어서 주셔."
"그래. 그럼."
맥주와 오징어를 꺼내 찻반에 받쳐주고 말자는 커피를 타서 마주 앉았다. 따라주지 않아도 어지간히 속이 상한지 혼자 성큼성큼 잘도 마신다.
"천천히 마셔요. 뭘 그리 급해? 석이아빠도 오실텐데......."
"지만 속상하나? 나도 속상하지. 해마다 이때만 되면 더해. 아주."
"그러게. 올해는 더 하네. 우박에다 수해에다......."
"내가 눈깔이 삐었지. 뭐 하느라 시골로 들어와서 이 고생하는지 몰라."
"그러게. 그러니 어쩌냐?"
"아휴. 속상해 죽겠어."
혼자 맥주 한병을 다 비우고서야 석이엄마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래도 집에는 덜하지?"
"뭐가?"
"그나마 재산도 많고 쓰는 사람도 적고, 또 공주 아빠가 좀 부지런하냐?"
"석아."
"왜?"
"작년 이맘때에도 똑 같은 소릴 한것 같어? 알어?"
"그랬나?"
피식 웃는 얼굴에 힘이 없다. 말자는 고구마를 들어 석이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힘내. 그래도 석이엄마 들어오니 집안 형편이 쫙 펴졌잖어? 시동생 장가도 가고, 어른들도 얼굴이 환해지시고. 뭣보다도 나도 옆에 사람이 사는 것 같어 좋아."
"남만 좋으면 뭐 하노? 내가 좋아야지. 정말 속 상한다. 올해도 빚은 빚대로 남고. 돈은 다 어데로 갔는지........"
"맞아. 그래도 힘 좀 내라. 옆에서 우그리고 있으면 내까지 찡그려진다."
"웃기지 말어. 그래도 집에는 늘상 웃는 소리가 나대."
"갓난 애가 있으니 그렇지. 맨날 울고 지지고 볶는 소리 안들리나?"
"그게 사는 재미지. 내가 석이 동생하나 더 낳는다 그러니 뭐라는지 아나?"
"뭐래? 어른들은 대 환영일걸?"
"그렇지. 그렇지만 어른이 좋으믄 뭐 하노. 정작 신랑이란 작자는 짐스럽다네. 벌써 중학교 삼학년인데 언제 또 키우냐고."
"그것도 그렇지."
"그래도 어떤땐 하나 더 낳고 싶어. 고물거리는 걸 보면 절로 손이 가고 입이 벌어지는 걸."
"그럼 하나 더 낳아. 아직 안늦었잖아?"
"됐다. 고마. 여기서 하나 더 낳으믄 정말 빚더미에 올라 앉을거다. 아이고 답답다."
옷자락을 펼쳐 와락와락 부쳐대며 석이엄마는 벌개진 얼굴로 밖을 내다 보았다.
"신랑 왔네?"
"그러게. 벌써 왔네."
어느새 남편이 돌아왔다. 불안한 마음에 말자가 내다보자 어느새 남편은 마루위에 올라 서 있다.
"우리 신랑은 못봤니껴?"
"예. 아직 안왔어요? 거긴 없던데."
"매점에 계시다면서?"
"매점엔 안가봤지. 바로 왔어."
"왜? 술이라도 한잔하고 오지요."
"기분이 영 별로네. 벌써 파장이라서 사람도 없고."
남편이 영수증과 돈을 꺼내 말자에게 건넸다.
"팔십칠만원?"
"몇천원 더 있는데 공주 줄려고 야쿠르트 사왔어. 엄마도 하나 드리고."
"알았어요. 수고 했어요."
말자는 남편이 건네준 비닐봉지와 돈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보았다. 봄에 모심기하고 여름내 약치고, 피 뽑고, 물보고, 비오면 비걱정에, 가뭄이면 가뭄걱정에 노심초사하면서 번 돈이라 말자는 금액이 많고 적어서가 아니라 남편의 수고에 가슴이 저렸다.
팔십칠만원.
"뭘 그리 들다보노?"
"아무리 선도자금을 썼다해도 너무 작은 것 같아서. 차라리 선도자금을 쓰지말까?"
"그렇제? 죽자고 해봤자. 차포 다 띠고 농약값도 달랑달랑이니 어쩌냐?"
"그러게. 우리가 썼으니 어쩔수야 있나 뭐. 아직 정미소에 보낸게 그냥 있으니 찧어 봐야겠지."
"찧어봐도 맨 똑 같애. 한가마에 십육만원도 안줄라카는데 돈이 되나 어데. 거기다 도정료도 너되나 된다는데. 거기다 논 도지까지 주면 우리는 비료값도 안될것 같애. "
"그래도 해봐야지. 가지 말고 앉아. 저이도 참 먹어야지."
"둘 내외 오순도순 먹지. 내가 어디 끼어 앉아 욕먹을라고."
"됐다. 고마. 얼른 앉아. 당신 맥주 해요?"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씻고 나오려나보다. 말자는 앉다 말고 일어나 냄비를 가스렌지위에 올려 놓고 불을 켰다.
"뭐 맛있는 것 할려고?"
"먹다남은 국수 있다. 데워 주지 뭐."
"나도 좀 주라. 종일 찡그리고 다녔더니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네."
"그렇지? 화를 내니 먹는게 시답잖더라. 김치하고 먹지 뭐."
말자는 김치를 꺼내고 국수를 데웠다. 씻고 나온 남편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국수가 남았나?"
"예. 좋지요?"
"그럼. 자다가도 좋지. 엄마는?"
"고구마 들고 들어가셨어요. 애는 자고."
"그래? 야쿠르트 가져다 드리지 왜?"
"알았어요. 국수 떠놓고 가져다 드릴께요."
"앉으소. 이리. 나는 국수가 왜 이리 좋을까?"
석이엄마에게 국수를 권하며 남편은 국수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촌놈이니까 그렇지. 고기도 제대로 못먹으니 그저 콩냄새 나는 국시라도 먹어야 단백질 보충을 하지."
석이엄마가 제가 말해놓고 우스운듯 허허 웃었다. 말자와 남편도 따라 웃었다.
"커피 한잔 줘. 그래도 먹고 나니 훨씬 기운이 나네."
"그래도 마누라 밥이 최고지요? 이런 마누라랑 사니 좋지 뭐. 내 같은 거야 덤벙대기나 하니 우리 신랑도 참 복이 없어. 그지요?"
"뭔 소리를요. 그래도 친구는 마누라 덕에 집에서 편케 산다고 자랑이 대단하던걸요?
정말 석이엄마가 대단해. 도시에서 들어와서 그 험한 밭일 다 해내고...... 도시 생활하다가 농촌으로 귀향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저 아랫 동네도 마누라가 귀향하면 이혼한다고 해서 머스마 혼자 아 하나 데리고 와 있는 집도 있다던데."
"그래요? 그 여자도 어지간 하다. 남편 하나 좋으믄 되지. 뭐 큰 덕을 본다고 지 혼자 시내 산다는고?"
"글쎄요. 사람 생각이 다 다르니 어쩔수야 없지요. 참, 근데 친구는 몇일째 기분이 별로 인것 같던데요?"
"수매 땜에 그렇지요."
"말고. 어제도 기분이 영 안좋아 보이던데?"
"아아. 어제는 석이 때문이지요."
"석이가 왜? 공부도 잘하고 야무진데."
"공부야 그렇지만 아래께 저녁에 난리가 났지요."
"왜?"
말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이야 영글고 착해서 말자도 늘상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고놈이 아래께 공부하기 싫다고 아빠처럼 농사나 지으면 되지뭐 하고 대답했다가 정말 난리가 났구만요."
"석이가? 정말?"
"그래. 밥 먹다가 농약값이며, 이런 저런 걱정을 하니까 가만히 듣다가 과외비 얘기가 나왔지. 한달에 십만원도 작은게 아니라서 걱정을 하니 저도 첨엔 가만히 듣다가는 그럼 과외 안한다고 하대?"
"그래서?"
"과외 안해도 되냐고 했더니 정색을 하고는 공부도 힘이 들어 하기 싫은데 과외 그만둘테니 걱정 그만하라고 하대. 온 식구가 제 입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왠걸,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는 구만."
"정말?"
"응. 정말. 어른이 계시니 아이 아빠는 소리도 못 지르고 가만히 있더니 어른이 겨우 식사를 마치고 나가신 뒤에 난리가 났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데 공부를 안한다고 하냐고. 농사가 그렇게 앙고롬하게 보이냐고. 이 놈의 자식이 머리속에 뭐가 들었는지 농사를 어떻게 보고 그러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아휴. 정말 난리가 아니었어."
"아래께 잠시 들썩 하더니 그거였어?"
"그래. 밖에선 잘 안들리지만 우리 부엌에서는 난리가 났어. 정말. 아이가 뭐래도 말이 없더니 얼마나 화를 내는지. 제풀에 지쳐 방에 들어가 버린후 석이가 뭐래는 줄 알어?"
"뭐래?"
"과외 하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든데 고등학교를 어떻게 나가서 하며, 대학은 어떻게 하느냐고. 암만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먹고 자는 것은 엄마 아빠가 줘야하는데 어떻게 해 줄거냐고........."
석이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자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콧등이 찡해졌다. 남편이 말없이 수건을 들어 석이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듣다보니 할말이 없대. 자식하나 겨우 키우는 것을 그런 것 까지 걱정을 시키니. 부모랄 수도 없지뭐. 저도 울고, 나도 울고. 한참을 그러고 나더니 그러더라고. 걱정말라고. 암만해도 농사야 짓겠냐고. 이렇게 힘들어서야 차라리 나가서 노가다를 하더라도 농사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친구가 그래서 내내 풀이 죽어 있었네요."
"예. 아들 하나 달랑 있는 걸 그런 소릴 들어 놨으니......... 그날 밤새도록 잠을 못자는 것 같더니 내내 그러네요."
"답답하네요. 참, 아이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니 참."
남편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속이 많이 상했겠네. 석이아빠 아들자랑 뿐인데 어쩌냐. 애를 잘 달래야지."
"그러게. 저도 그래놓고 나서 아빠가 하도 실망을 하고 풀이 죽으니 영 마음이 좋지 않은가봐."
"좀 달래서 얘길 해봐. 저도 답답해서 그랬겠지. 그래도 아들 자라는 걸 보는게 유일한 낙인데 석이아빠 맘 상하면 내내 힘들어 하시잖아. "
"그러게. 오늘은 오면 얘기를 해 봐야지. 그래놓고 이때까지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시간이 나야지."
"그러지 말고. 집에 돼지 고기 있나? 저녁에 같이 고기나 구워 먹지요. 친구에게는 내가 전화를 할테니 어른들께도 오시라고 하소. 고기 있나? 배추 뽑아올까?"
남편이 서두른다. 말자는 냉동실속에 두었던 돼지고기봉지를 꺼내놓았다. 조금 모자란듯 보인다.
"우리집에도 좀 있어 가져올께. 양념은 공주엄마가 해라. 내 금방 갔다올께."
석이엄마가 그새 얼굴이 밝아져 집으로 돌아갔다.
"고기가 모자라면 좀 사올까?"
"좀 모자를것 같은데 석이엄마가 가져온대요. 배추나 뽑아와요."
"그럴까? 두 포기만 하면 될까?"
"예. 오다가 파도 좀 뽑고."
"알았어요."
설겆이를 하고 고기를 양념하고 야채를 씻고 하느라 말자도, 석이엄마도 찌뿌둥했던 기분들이 금새 환해졌다.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수다를 떨며 야채를 씻고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남자들도 기분이 나아졌다. 어느새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도 마당에 지펴 놓은 불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신이 났다.
"얼른 굽자. 어두워 진다. 석인 언제 오나?"
"요즘은 일찍와. 그러고는 과외를 안간다니까."
"내가 가서 데려 올까?"
"보자. 올 시간 됐네. 다섯시 사십분차로 오지 싶은데?"
"그래? 그럼 얼른 구워 먹자. 어른들은 집안에서 드시라고 할까?"
"그래도 불가에 함께 먹어야 맛있지. 아부지요."
석이 아빠가 불가에서 집을 향해 소릴 지르자 남편이 말렸다.
"고기를 좀 구워 놔야지."
"불 좋은데 금방 익지 뭐. 야 모처럼 고기 구우니 좋은데? 이제야 수매하는 날 같네."
석이아빠도 한결 밝아진 얼굴로 불가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른들도 건너 오시고 아이들도 고기굽는 냄새에 끌려 다들 불가에 둘러 앉아 고기를 굽고 집어주며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아이들은 실컷 먹었는지 뛰어다니며 장난들을 치고 어른들도 흡족한 식사에 마음이 넉넉해져 다들 푸근한 기분으로 불가에 앉아 내어놓은 고구마를 굽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 석이형이다. 형아야. 이리와."
말자의 큰놈이 집에 들어서는 석이를 소리쳐 불렀다. 석이는 가방을 마루에 올려 놓더니 낮은 담으로 성큼 넘어 들어왔다.
"야. 임마. 너 무단 침입이여. 남의 집에 올때는 떳떳이 대문으로 들어와야지. 임마."
"아저씬. 대문도 없으면서."
"그러냐? 하긴 그거야 그렇지만 야. 담 사이로 문이 있으니 대문아니냐."
말자의 남편이 사정하듯 설명하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다음부터 그럴께요. 배고파요. 밥주세요."
밝은 분위기에 저도 기분이 나아졌는지 불가에 앉아 연신 고기를 집어 먹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에미야. 물좀 줘라."
석이 할아버지가 대견한듯 손자를 보며 연신 당부를 한다.
"맛있니?"
"예. 정말 맛있어요."
"맥주 한잔 주랴?"
"아니요. 저 술은 안마셔요."
"담배는 피고?"
"그런 거 아직 안해요. 그저 오락을 좀 즐기지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너 소문에 과외 안 한다며?"
"네."
"밥 먹어. 더 먹고 얘기하자."
제풀에 기가 죽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고 어른들은 따로 불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석이는 혼자서 남은 것을 다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말자의 아이들과 어울렸다.
말자의 남편이 석이를 불렀다.
"석아. 이리와봐."
"조용. 조용히 말해요. 안그래도 저도 걱정하고 있을텐데."
"괜찮어. 다 컸는데 뭐."
남편이 쭈뼛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아 어른들 사이에 앉혔다.
"너 과외 안해?"
"네."
"왜?"
"그냥요."
아이가 제 부모의 얼굴을 눈치보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엄마아빠 돈 없다고?"
"............"
"공부 하는 거 좋지?"
".........."
"싫어?"
"..........."
다들 조용히 아이와 말자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너 엄마 아빠 돈없다고 공부 안하면 엄마 아빠 기죽이는 거다. 아니?"
"왜요?"
"야. 임마 자식이 열이라 해도 공부하는 자식을 못 밀어준다면 부모가 아닌거여. 아무리 못나도 자식에게 잘나보이고 싶은게 부모이고. 니가 보기에 엄마, 아빠가 암만 힘들어 보여도 니 부모가 힘을 낼 수 있는 원천이 바로 너인거야. 너를 키우고 시키고 하는 것이 니 부모가 힘을 낼수 있는 영양제란 말이야. 힘들어도 니가 잘한다면 그걸로 엄마아빠는 힘이 나고 또, 농사 지을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야. 맞어? 아니야?"
"예."
"오늘 고기는 내가 냈으니 내 고기값 할려면 니가 공부를 잘 해. 아저씨도 친구가 힘빠져 다니는 것 힘들어서 보기 싫다. 함께 사는데 힘이 함께 나야지. 너도 알다시피 아빠랑 아저씨는 쉬워서 농사 짓는 것 아니야. 이일을 직업으로 선택한것 뿐이지. 그러니 농사짓는 아빠 힘든다고 엉뚱한 소리말고 열심히 공부해. 공부해서 니가 직업으로 농업을 선택하는 것은 니 자유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농사나 짓는다는 둥 그런 소리하면 농사짓는 사람들 열받지. 알았어?"
"예."
"너도 걱정 많이 했을 줄로 알고 묻는다. 공부 할거지?"
"............"
"왜? 싫어?"
"아니요. 아빠한테 죄송해요. 다시 그런 소리 하지 않겠습니다."
"공부할거여?"
"예. 공부하고 과외 다시 다닐께요."
"그래. 됐다. 맘 단단히 먹고 공부 열심히 하기다."
"예. 오늘은 조금만 놀고요"
"그래. 형아야. 우리 저기 놀이터 가자. 귀신찾기 하고."
"그래."
떠들썩하니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다들 마음이 편안해져 절로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고맙다."
석이 아빠가 말자의 남편에게 술잔을 건네며 고마워했다.
"별 소리를. 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더니 훨씬 나아졌네. 그래도 착한 아이들이야."
"고마워요. 덕택에 우리식구 다 잘먹고 기분이 좋아졌네요."
마당에 고구마 굽는 냄새가 달콤하게 퍼져 나갔다.
"야야. 너들은 뭔 얘기가 그렇게 많으냐? 춥지도 않어? 들어와 놀던지.....에미, 에비가 노는 걸 좋아하니 애들도 밤인지 낮인줄 모르네. 얼른 들어와 공주 젖 줘라."
"예."
시어머니가 문도 열지 않고 소리를 지르신다.
"들어가자. 얼른 치우고 들어와. 공주 맘마는 내가 타줄께. 커피한잔 먹고 가라. 자자. 들어가자."
남편이 주위를 치우며 그릇을 들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석이아빠가 나물그릇을 들고 따라 들어가고 말자와 석이엄마는 사이좋게 마당을 치웠다. 멀리서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잘 노네? 놀라지 않을까?"
"맨날 가는 곳인데 뭐. 오늘은 석이가 있으니 더 든든하네. 날이 차니 별이 더 또록또록 하네.정말 별 바다네. 아휴. 좋아라."
"겨우 팔십칠만원 받아다 놓고 실컷 고기 먹고, 거기다 별구경까지 하냐?"
"그럼. 어차피 밤하늘 별구경은 덤이잖아? 어디가서 이렇게 좋은데 구경을 또 하겠어? 이런 이웃을 또 만나고."
"고맙네. 덕택에 온 식구 정말 기분 좋게 밥먹었어. 담엔 내가 낼께."
"됐어. 어차피 김장하자면 또 몇일이고 모여 다닐텐데 뭐. 함께 있으니 좀 좋아? 의논도 하고 걱정도 하고 뭐든 수월하잖아? 그지?"
말자가 석이네의 팔장을 꼈다. 둘다 별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야들아. 너는 암만 젊다해도 춥도 않나? 얼른 들어가라. 밖에서 떠드니 아들꺼정 안자고 돌아다니잖나. 얼른 들어가든지. 에구. 그저 젊은 것들은 저 기분만 생각하는구만. 어쩌구 저쩌구........"
문을 닫고도 한참을 이야기 하는 시어머니덕에 둘다 웃으며 주방으로 뛰듯이 들어갔다. 아직도 골목 끝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첫댓글 김옥랑님 오셨군요. 도와주셔서 감사!
몇군데 손을 보았습니다. 수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