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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월 24일부터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이원복)과 부국문화재단(이사장 남상규) 공동으로 주최한 '빛을 그린 화가 오지호'전 도록에 실린 명지대 이태호(한국미술사)의 글이다. 아직 정확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바, 국립광주박물관측은 이 글이 실린 도록 대부분을 폐기처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전시에는 부국문화재단이 1억원의 협찬금을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만일 도록이 폐기처분 된다면, 글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도록제작진의 제작상 실수가 있었는지, 기관장의 월권인지, 국가재산을 이렇게 소모해도 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추이를 지켜보며 일단 긴 글이지만, 올려드린다. (이 글의 파일은 광주미술 gwangjuart.com 에서 확인, 다운받을 수 있다)
오지호의 예술과 사상
李泰浩(明知大學校 敎授, 美術史)
1. 시작하며
오지호(吳之湖 ; 1905-1982)는 광주·전남에 뿌리를 내리고 후진 양성을 통하여 양화(洋畵)의 구상(具像)계열 화단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전통회화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 1891-1977)과 더불어 20세기 중후반 지역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고, 두 작가와 함께 한 광주문화계는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오지호는 지역미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 화가이다.1)
미술교육자로서 혹은 화가로서 오지호의 문화사적 위상을 요약해 보자면, 먼저 봉건적 유가풍(儒家風)의 집안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동경미술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서 갖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그런 성향은 지역의 원로이면서도 '청자미술회'의 고문을 맡는 등 고등학교의 미술교육에도 신경을 쓴 점이나 청소년을 위한 한자혼용 교육운동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넓힌 그의 활동에 잘 나타난다. 또 미술이론가로서 피카소 이후의 추상미술에 반기를 들고, 국토의 청명한 자연과 총명한 민족성을 강조한 점이나 색채주의적 회화론에도 계몽주의적 성향이 묻어난다.
다음으로 인상주의 미학을 통해 한국의 자연에 합당한 빛과 색채의 회화로 민족미술을 정립하려는 논리 전개와 함께 자신의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정착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우뚝하다.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보여준 예술가의 지조와 사회적 역할도 당대의 지성으로서 오지호를 빼놓을 수 없게 한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외세의존의 파쇼정권이나 군사독재로 점철된 역사적 격동기를 살면서, 그 현실에 대한 자기판단 아래 올곧게 행동한 예술가로서 좋은 귀감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존심을 잃거나 권력에 타협하여 양심을 훼절하던 동시대 화가들의 세태와 비교할 때2), 오지호의 철학과 실천의지는 무엇보다 값진 일이다.
2. 색채주의 회화와 회화론
오지호는 전남 화순(和順)에서 구한말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오재영(吳在永)의 8남매 중 막내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3) 1919년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통한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아버지 밑에서 곧은 기개의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을 전수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어릴 적 이름은 점수(点壽)였고, 동복(同福)보통학교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전주고보(全州高普)에 진학하였다가 휘문고보로 편입한 오지호는 서울에서 신문화·신미술에 눈을 뜬다.
휘문고보(徽文高普)에는 한국인으로 맨 처음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고희동(高羲東)이 미술교사로 재직해 있었고, 1923년에 개설된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 다니며 동경미술학교에 함께 진학한 경성고보의 김주경(金周經)과 중앙고보의 김용준(金瑢俊) 등을 만난다. 당시 동경미술학교 졸업생 이제창(李濟昶)과 중앙고보 미술교사인 이종우(李鐘禹)의 지도 아래 목탄 데생과 유화의 기초를 배웠지만, 거의 독학하다시피 그림에 빠졌단다.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동경에 건너간 오지호는 기초과정인 가와바다(川端畵學校)를 거쳐 1926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 입학하였다. 1931년 졸업하기까지 학교생활을 통하여, 서양미술의 고전부터 신사조까지 섭렵하였다. 일본 근대회화의 거장이자 지도교수인 후지시마 타케지(藤島武二)에게서는 대상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데생의 중요성과 그 대상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애정 어린 눈, 그리고 대상을 '단순화한 사실(寫實)'로 표현하는 화풍을 익혔다.4)
당시 오지호는 일본 화단의 주류이던 인상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빛과 색채의 인상주의(Impressionism) 회화가 미술사적으로도 회화예술의 본질을 찾은 최선·최고의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된 것이다. 또한 인상주의 미학을 청정한 조선의 자연에 가장 합당한 예술론으로 확신하며, 민족미술의 방향을 잡는다. "맑고 밝은 조선의 자연, 조선의 새 그림을 그리자"는 각오를 세웠던 것이다.5) 이를 토대로 오지호는 일관되게 색채주의 중심의 회화론과 작품 세계를 펼쳐낸다.
1928년부터 1931년 졸업 때까지 7회∼10회 조선미술전(朝鮮美術展)에 <풍경>과 <나부> 등의 유화를 출품하여 작가로의 등단에 열정을 보였으며, 김주경, 박광진 등이 '조선적인 조선의 풍광과 조선인의 삶'을 표방하면서 구성한 녹향회(綠鄕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의 선전출품작인 풍경화와 인물작품들은 넓적하고 굵은 터치를 즐겨 썼으며, 어두운 색조를 완연히 벗지 못한 채 대담한 터치의 화면들이 세잔느 풍을 느끼게 한다. 특히 <처의 상>(1936)이 그러하다. 학창시절 오지호는 '색채가 풍부할 때 형태가 충실해진다' 는 세잔느의 회화론에 감화되었으며, '동미(동경미술학교)의 세잔느' 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지호가 반한 회화 사조는 마네나 모네의 인상주의라기보다는 세잔느와 반 고흐의 후기인상주의이다.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는 곧 탈(脫) 인상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빛의 변화에만 매몰되었던 인상주의를 딛고 형과 색의 회화적 본질을 구축하려 했던 세잔느, 반 고흐, 고갱 등의 작가들을 지칭하는 사조이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이후 오지호는 본격적으로 그 인상주의의 빛에 후기인상주의 색과 형을 강조한 화풍을 조선적으로 재해석하여 맑고 밝은 그림을 그린다. 이를 일차적으로 집대성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화집으로 1938년에 발간하여 주목을 끈『김주경·오지호 2인화집(金周經·吳之湖 二人畵集)』이다. 화집에 게재된 <사과밭> <도원풍경(桃園風景)>(1937) 등은 김주경과 나란히 1930년대 중반부터 시도한 '인상주의'풍을 잘 보여준다.6) 더불어 개성시절 자기 집을 그린 <남향집>(1939)에서는 고목이 드리운 연한 남보라의 봄 그림자를 통해 인상주의적 빛과 색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오지호식 인상주의 화풍의 브랜드처럼 꼽히는 대표작이자, 그 자신의 애장품이기도 하다. 이때의 그림에는 반 고흐풍의 터치나 구도, 그리고 보나르풍의 색감이 두드러져 있다.
이처럼 빛과 색을 소화한 회화적 자신감은 피카소의 입체파와 추상미술에 대한 반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게 했고, 추상(抽象)-구상(具象)의 논쟁을 공론화 시켜내기도 한다.7) 차후 오지호가 피카소를 미워한 이유를 보면,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축적하는데 이용했을 뿐이었다는데 있다. 피카소는 '괴기한 형식적 변모'로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며, 민중의 생존이나 혁명을 위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사실조차 없다는 것이다.8)
인상주의적 양식을 민족미술로 정립하려 했던 의지는 바로 오지호의 예술론이 되었고, 회화세계를 형성시켰다. 그 요체는 미의 본질을 자연 속의 '빛과 색채'로 보았으며, 회화적 구현을 통해 생명의 본성을 찾고 예술이 지닌 감성론에 따라 순수주의를 주장하였다.9) 이는 조선의 자연을 통한 민족미술의 창조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또 회화는 자연에서 감각되는 '생명의 근원'인 빛을 '회화의 본질'인 색채로 표현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형상변형의 '데포름(deform)'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1960년대 이후에는 야수파적 색채주의로 흐른다.10) 오지호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마음 안으로 들어올 때 대상은 벌써 현실의 자연과 다른, 곧 변개(變改)된 자연이고, (그런) 인간 심경(心境)의 작용이 창조의 본능이다"라는 「데포르메론」을 정립한 것이다.11) 오지호 회화의 분방한 붓질 감각과 간결한 구성미는 바로 그 '데포르메'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이 오지호 회화가 서구 인상주의의 틀을 벗고 1960∼70년대 독창적인 유화풍(油畵風)을 이룩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오지호는 우리 색을 재발견한 분명 색채주의자이다. <남향집>(1939) 이후 1950년대 후반 <칸나>(1956)나 <수련>(1957) 등에서 채도 높은 순색(純色)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부산 동래 우장춘 박사의 '중앙원예시험장' 온실에서 그린 <창가의 꽃>이나 <카토리아>(1958) 등에서는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투명한 순광(純光)의 온화함을 구현한다. 또 형상의 '데포르메'에 우리의 자연이 내뿜는 빛과 색을 실어낸 작품이 4·19 직후의 자유와 해방감을 가득 담은 듯한 <추광>(1960)일 것이다.
오지호의 회화는 1960년대 초반 정치적 시련을 겪은 뒤, 화풍의 변화가 일었다. 암울함이 청회색조의 분위기로 표출되었다. 그 대신에 1960년대 후반 여수나 목포바다와 항구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구도는 단순해지고 속도감 넘치는 붓터치로 흥신(興神)과 격정을 실어내었다. 툭 터진 쪽색바다와 해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유선형의 배를 응시하며 한 때의 시름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항구>(1967)는 너른 붓질과 감정에 맡긴 필력에 오지호 화풍의 새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거친 포말의 <해경>(1965)이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수평선을 중앙에 둔 바다 풍경화들의 시원함도 그런 인상을 던져준다.
한편으로 광주천에서 본 <무등산>(1969)에서는 청명한 빛의 파스텔톤 색감을 회복하고, <추경>과 <만추>(1969) <아마릴리스>(1973)등을 통해 <칸나>(1956)나 <열대어>(1964)의 적황(赤黃)의 색조를 되찾은 듯이 보인다. 또 <푸른 산> <신록>(1970) 등의 두터운 녹색조(綠色調) 바림에는 남도 풍광의 맑고 투명한 색채감각이 분출된 듯하다. 또 가을풍광을 '데포르메' 하여 분방한 필치로 소화한 <만추>(1969) <가로수>(1972) 등을 보면, 한국의 계절색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녹적(綠赤)의 보색대비를 비롯해서 장식적인 화면의 화사해진 색채감각은 1950년대 중반 원효사 탱화 <아미타후불탱>(1954) 등을 유화로 제작하면서 전통 채색화풍에도 감화를 받은 것 같다.12)
원색조의 색감은 1974년 첫 번째 유럽여행을 통해서 마음껏 되찾지 않았나 여겨진다. <노르웨이 풍경>(1974) <로테르담항>(1975) <녹음>(1975) <북구의 조춘>(1975) <북구의 전원>(1976) 등과 1980년 두 번째 유럽을 여행하고 그린 <피카델리 풍경> <항구> <북구의 봄> <두 소녀> 등을 대하면, 대담한 붓질의 '데포르메'가 색채의 리듬과 그렇게 어울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붓끝에 묻힌 두터운 안료가 화면을 출렁이게 한다. 1980년 해외여행 때는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그 원시의 강렬함에 취했으나 <세네갈 소년들>(1982)이 미완으로 그치고 만다.
그런데 이들보다 오지호 후기 회화의 백미는 <설경>(1971) <내장산설경>(1972) <설원>(1973), 그리고 눈 내린 <산>(1977) <설경>(1978) 등에서 찾고 싶다. 겨울 풍경이 그렇듯이 눈 덮힌 공간의 하얀 여백과 단순한 구도의 공간 운영, 그리고 겨울 햇살에 눈부신 황갈색조나 담자색(淡紫色) 그림자의 도타운 질료감이 오히려 한국풍경의 맛을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오지호의 겨울 풍경화는 갈색 숲의 리드미컬한 필흔이 무르익어 있으면서도 절제된 탄력을 느끼게 해주어 좋다. 이들과 함께 <과수원 풍경>(1972) <바위섬>(1973) <과수원>(1976) <해경>(1979) <춘경>(1981) <가을풍경>(1981) 등도 단순한 수평구도에 너울대는 붓질에서 오지호 후기의 회화미를 한껏 맛볼 수 있다.
이같이 오지호는 물컹한 '색채의 환희'와 형상의 '데포르메'를 마음의 움직임에 맡기고, 손의 리듬에 따라 재빠르고 흥겹게 실현한다. 그야말로 '심화(心畵)'라 이를 만하다. 특히 '화상(畵想)과 형색(形色), 곧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회화예술의 근간'으로 여긴 오지호의 후기회화론은 그대로 동양화론의 사의(寫意) 혹은 형신론(形神論)에 맞닿아 있다. 대상의 사실묘사보다 마음으로 느낀 감성을 중시하고 데포르메의 변형미를 추구한 점은 형으로 정신을 표출해야 한다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에 근사하기 때문이다.13)
오지호는 프랑스 후기인상주의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밝은 태양아래 명랑하고 찬란한 색채를 구했다. 나아가 그는 조선의 풍광을 '인류 감각이 고도로 발달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많지 않은 땅'이라 여겼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을 '그 생명의 원천인 빛과 색'을 좋은 회화로 환원해낼 수 있도록 '생리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아래 오지호는 한국 근현대미술을 통틀어서 최고의 색채화가가 되었고 , 오지호 회화를 당당하게 '민족회화'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또한 오지호는 '색채 환희는 자연이 주는 기쁨' 이기 때문에 '회화의 원리를 밝고 고운 색채'에서 찾는다.14) 이와 함께 오지호는 '만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회화의 영원한 자태'를 가장 '자연스러움'에서 찾는다.15) 따라서 「미의 원리」를 '미적 감정의 육체 생리적 근거'라고 보았고, 예술의 본질을 '감각'적인 데 있다고 인식했다.16) 오지호는 때론 회화를 남녀의 사랑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과 과정을 성행위에 비유하곤 하였다고 한다. 오지호 후기회화의 물감을 짓이긴 다이나믹한 붓질과 노년에 말을 즐겨 탄 점에서도 그 '생래적(生來的) 감각'의 결이 충분히 유추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오지호의 회화는 '심화(心畵)'이자 '몸 그림', 곧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의 감명을 전신으로 표출한 '체화(體畵)'이다. 또 그 자신이 자연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자연에서 삶을 구했다. 반평생을 지산동 초가집에서 살면서 터밭에서 기른 채식위주의 단촐한 생활방식이 그러하고, 양의학을 거부하고 단식으로 몸을 치유했던 생활습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오지호는 자신을 자연과 일체화 시키려했다. 작은 단신이 품어 안은 조선의 자연이 바로 오지호의 신체이자, 에너지가 넘치는 큰 그림을 만든 셈이다.
오지호의 생애와 인생 역정 역시 몸과 마음에 따라 행동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자신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화가다'라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시기마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했고, 곤욕을 치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일 터이다. 정치적 야욕이나 이념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를 굽힐 줄 모르는 생래(生來)의 성격'과 '이 땅에서 생(生)을 받았다는 이유'로 양심에 따라 실천한 것이다.17) 그야말로 순수한 '조선의 자연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점이 곧 인간 오지호의 철학이자 사상이랄 수 있다.
3. 예술가적 지조와 사회실천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 후 귀국하여 고향에 잠시 머물렀던 오지호는 1933년에 상경하여 동아백화점 광고부에 근무하다가 김주경의 천거로 송도(松都)고보 미술교사로 자리를 잡는다. 개성에서 그는 <남향집>의 화풍과 같이 자신이 추구하던 조선의 전형적인 빛과 색을 찾을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생과 그림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김주경의 러브·콜에 타향살이를 하게 된 셈이다. 한편 '개성상인'의 전통으로 유명했던 만큼 일본인의 행세가 적었으므로 도시가 오지호의 취향에 맞아떨어진 듯하다. 개성에서 그는 1940년대 초반에 창씨개명 반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기록화 제작의뢰의 거부 등으로 일제에 맞선다. 일본 군국주의 마지막 횡포가 기승을 부리며 압박을 가해오자, 오지호는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피신하였다가 고향 동복에서 해방을 맞는다. 이때 큰아들이 개성에 남는 바람에, 분단 이후에도 합류하지 못한 채 이산가족마저 생긴다.18)
이러한 오지호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당시 대부분의 명망 있던 작가들이 크든 적든 반민족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거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역했던 것과는 다르게, 민족미술인의 양심적 태도를 보여준 자랑스런 모습이다.19)
해방 직후에는 1945∼46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위원, 독립미술협회 결성에 이어 조선 프로레타리아 미술동맹과 연합한 '조선미술가동맹'의 미술평론부 위원장, '조선미술동맹'의 부위원장 등 간부직을 두루 맡는다. 그러면서 이론적 선두주자로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함께 진보적 미술계를 만들려는 실천에 앞장선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없이는 바른 민족예술이 바로 설 수 없다며, 때에 따라 붓 대신 총을 들어 민주사회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가의 비타협적 자존심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오지호의 지조는 일제 때 창씨개명 거부와 총독부의 군국주의적 전쟁기록화 제작 불응에 이어, 해방 후 반제·반독재운동에 앞장선 민족주의적 자세로 표출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이 새로운 민족미술의 수립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미술인들도 민족전선의 일익으로 문화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면서, '예술의 사회성' 과 '인민예술' 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20) 오지호는 그 모범적인 사례로 '1870년 프러시아의 침공 때 프랑스 화가 코로가 군대에 자원했던 일이나 쿠르베가 1871년 파리코뮌 때 민중의 대열에 끼어 인민위원으로 참여한 일'을 들고 있다.21) 이와 동시에 봉건성과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해 조선적인 '명랑성'이 반영된 민족미술의 추구를 내세우며, 예술의 특질을 '타협을 불허하는 세계'로 보고 '예술에 순(殉)한 반 고흐'를 예술가적 지조의 전형으로 꼽는다.22)
해방 공간의 사회와 문예계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민족해방에 따른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나 민족문화의 정립이 요원해 보인다. 그보다 좌우의 이념대립으로 전개되고, 미군정의 압력에 따른 분열과 이합집산이 지속되는데 대하여, 오지호는 크게 실망감에 빠진다. 결국 분단을 고착화시킨 남한 단독의 이승만 친미정권이 1948년에 들어서자 오지호는 낙향하여 광주에 둥지를 튼다.
광주에서 오지호는 1949년에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창설하였고, 여전히 '광주지구 미술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는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방 후 부안에 칩거해 있던 김철수 선생과도 평생지기로 교분을 계속한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고향 동복에서 '농민위원회 위원'으로 지내다 무등산의 동북쪽 백아산에 입산하여 이른바 남부군(南部軍)인 '전남지구총사령부 출판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1월 중순경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에서 군경합동작전시에 검거되었고,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석방된 뒤 조선대에 복직하였다.23) 남부군 시절에 오지호를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전물 제작에 관여하면서 스케치를 꾸준히 하였다고 한다. 또 그림전시를 통해 미술교육도 했는데 그때 작품들은 산에 뭍어 두고 내려왔으며, 40대 중반의 어른으로 소년들에게 논어와 맹자 같은 한자교육도 시켰다고 한다.24) 석방 뒤 복직과 함께 지금의 광주 지산동 초가집에 정착한 해는 1953년이다.
오지호의 사회적 실천에 따른 좌절은 1960년 4. 19 ·1961년 5. 16 정국에서 다시 맛본다. 입산에 이어 1961년 2월 초에 결성되는 '전남 민자통(全南民自統)' 결성대회에 준비위원과 의장단 총무위원장으로 참여한 것이다. 민자통은 1960년 9월 결성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로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천도교, 유교회,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4월혁명학생연합 등 혁신계 사회단체의 전국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용공친북단체로 지목되었기에, 오지호는 5·16 다음날 검거되어 상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10개월 가량 옥살이까지 경험했다.
4·19로 이승만 파쇼정권이 무너지자 오지호는 '자유'에 환호하였다. 그 자유스런 민주주의 사회아래서 마음껏 빛과 색, 나아가 '자유로운 대지아래 원시(原始)'를 그리고자 했고,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될 것으로 믿었다.25) 미술과 교수직을 임직순에게 후임으로 물려주고 작업에만 전념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이다. 1960년 가을에 그린 <추광(秋光)> 같은 작품에는 형상을 풀어헤친 화사한 색채에 당시 희망의 감정이 그득하게 담겨 있다. 그런 오지호가 장면정권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민족·자주·통일을 주장하던 진보적 인사들의 혁신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오지호는 1961년 5월 17일 검거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원심에서 7년형이,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일에 대하여 오지호는 '뜻하지 않은 한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으로만 말해왔지 그 전말을 밝힌 적이 없다. 1950년 입산 행적과 마찬가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삼엄한 군사독재 시절이기도 했고, 두 번씩 당한 상처가 깊었던 때문에도 그랬을 법하다. 재판과정과 그 이후 오지호는 줄곧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두 건의 혁명재판소 판결서(判決書)를 찾게 되어, 앞서 밝힌 입산 행적과 5·16 직후 사건의 일부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공개되는 자료여서, 참고로 그 판결서의 내용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함께 구금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은 오지호를 포함하여 셋이다. 호남신문 편집국장·전남도의회 의장·남도일보(南都日報) 이사장을 역임한 김창선(金昌善)이 전남 민자통 의장단 및 선전위원장이었고,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임금택(林錦澤)은 전남 민자통 총무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1961년 2월 19일 광주 YMCA에서 가진 전남 민자통 준비위원회 결성식에서 김창선은 개회사를, 오지호는 의장단 대표를 맡았고, 임금택은 서기로 회의록을 작성하였다. 4·19 직후에 결성된 민자통은 김창숙 선생이 수석의장으로 민족·자주·통일을 내세운 전국적인 혁신계의 협의체로 꼽힌다. '외세의존을 배격하자' '통일만이 살길이다'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이다' 등의 통일선언문을 채택한 단체다. 이를 실천하고자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을 조국통일에 저해되는 양대 악법으로 단정하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군사 쿠데타 세력은 이 단체를 '북한괴뢰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도' '반 국가단체의 활동을 고무동조'한 것으로 찍어 5·16 다음날 어느 정당 사회단체보다 가장 먼저 핵심 인사들을 검거했다. 검거 230일 만에 원심 재판에서 '특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와 형법 제30조에 따라, 오지호는 입산 경력이 부가되어 7년형을, 김창선과 임금택은 5년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1962년 1월 16일 선고 판결에는 재판장 김홍규, 배석 심판관 유원?·이회창·차영조, 법무사 강현채가 참여하였다. 이들 가운데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였던 이회창(李會昌)씨가 배석 판사격인 심판관으로 들어 있어 관심을 끈다. 검찰관은 권영민, 오지호의 변호사는 전성환이었다.26)
결국 두 달 뒤인 3월 15일 항소심에서 '북괴활동에 고무 동조하는 행위에 대한 증거의 결여로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증거 불충분으로 오지호와 임금택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김창선만이 기각되었다. 이때 재판장은 최경(?)표, 배석 심판관은 이두일·민경중·노(?)순형·정태원·박성대, 법무사는 이운기였다. 검찰관은 장상희였고, 오지호의 변호사는 원심 때와 동일한 전성환이었다.27)
오지호는 공판에서 민자통 참여에 대하여 "기성준이라는 청년이 집에 찾아와 민자통은 국민운동으로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자 하는 단체이니 조직에 협력해달라"는 권유를 받아 참여하였고, "혁신계통 단체의 행사나 활동이 너무 난잡, 무질서하고 과격한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진술하였다. 여기에 오지호가 "국전초대작가와 조선대 교수의 지위에 있는 예술인으로 부득이한 행위였고 그것이 용공은 아니다"는 변호사의 변론이 받아들여져 그 살벌했을 혁명재판을 빠져 나온다.28) 민자통의 통일운동은 그 이후 유사한 내용으로 근래까지 40년 이상 지속되었고,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 과제이다. 이를 염두에 둘 때, 화가 이전에 당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으로서 자신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요구를 물리치지 않은 오지호를 당당하게 선구적 민주 인사로 재평가해야 할 일이다.
오지호의 기개와 지조는 인생의 끝물에 다시 한번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 그는 유럽여행중이었고, 그 곳에서 텔레비전 화면으로 광주를 대하며 그 아픔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귀국하여 절친한 제자들에게 '그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며 질책하였다고 한다.
오지호는 자신의 예술과 사상을 온전히 펴지 못하였다. 분단과 비민주적 사회여건 아래라는 시대적 한계뿐만 아니라, 그 회화 이념에도 모순이 없지 않다. 오지호는 직접 민족전선에 참여했고 문화투쟁을 정치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행동과 무관하게 예술 자체의 순수주의적 태도를 표방한 것이다.29) 그 괴리감으로 결국 오지호는 예술의 순수한 미를 통하여 세계를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관념적 태도로 기운다. 정치와 예술이 무관할 수 있음을 주장하다보니, 예술의 시대 양식을 '취기(臭氣)'로 치부하기도 했던 지론이 더욱 그러하다. 이 한계는 물론 민자통 등 당시 민족운동에 참여했다가 5·16 군사정부에 곤욕을 치른 이후 좌절을 맛본 민주 인사들에게 대체로 보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지호는 마지막까지 민족주의 사상을 펼쳤다. 문화재 보존운동과 이희승과 함께 한 한자부흥운동에 전념하였던 점이 그것이다. 기금마련전이나 한글한자병행 교과서 제작 등 한자혼용운동에 그림보다 오히려 최선의 열의를 보이는데, 영어문화권으로 흐르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과 민족문화의 전통을 중시한 민족주의 의식의 소산이랄 수 있다.30)『알파벳 문명의 종언』같은 저서를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요즈음 청소년의 서구화로 치닫는 문화풍조나 한자문맹이 되다시피 한 세태를 감안할 때, 역시 오지호의 주장은 그대로 지금 우리사회에 유효한 측면도 없지 않다.
4. 마치며
1949년 이후, 오지호는 조선대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배양성으로 호남화파를 형성시켰다. 또 그의 두 아들에 이어 손자손녀들까지 3대에 걸친 미술인 명문가정을 이루고 있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오지호를 배운 후배화가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광주화단은 그의 예술인의 지조와 진보적 민족미술인의 실천자세를 배우기보다는, 인상주의적 색채와 대담하게 밀어 제낀 필법 등 형식만을 계승한 지역주의에 머문 아쉬움도 없지 않다. 오지호 일파는 도리어 광주의 보수적 파벌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하였다. 민족주의를 지향했던 오지호 자신도 사회적 실천의 진보성에 비하여, 화가로서 회화 자체의 순수성만을 고집한 점이 남는다. 작품활동과 정치적 실천관계를 통합시키지 못한 민족미술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기 한국현대회화사에서 오지호가 차지하는 위치는 당대의 누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서구 인상주의를 체득하여 대담한 터치의 화사한 색채감으로 한국의 자연과 풍광을 신명나게 녹여내면서, 한국적 구상화풍의 한 거목으로 자신의 개성적 회화세계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제잔재 청산과 조선적 색채에 기반한 민족미술의 창조, 그리고 사회적 실천으로 그처럼 시대적 성과와 긍지를 뚜렷이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기에 오지호의 인생역정은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이런 예술가로서의 지조와 정치적 행동은 1980년대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성장한 민족민중미술운동과도 그 맥이 닿아 있어 주목된다. 또 오지호가 뿌리내린 구상회화의 장점은 광주·전남에서 어느 지역보다 기량 있는 1980년대 민족미술계열의 청년작가층을 형성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주)
1) 정규,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신태양』, 1957 ; 오광수,「오지호와 인상파 미술」,『공간』, 1986. 4 ; 김윤수,「오지호의 인상주의 회화 및 민족미술의 성격」,『한국근대회화전집』 3권 '오지호', 금성출판사, 1990 ; 이구열,「오지호 예술의 역사성과 광채」,『근대 한국미술사의 연구』, 미진사, 1992.
2) 이태호,「1940년대 초반 친일미술의 군국주의 경향성」,『근대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
3) 생애에 대하여는 손정연,「전남 양화 50년 - 오지호」, 전남매일신문 1977. 1.11~ 9.19 연재 및「오지호의 예술과 생애」,『오지호 작품집』, 전남매일 신문사, 1978.
4) 島武二,「雜感」,『塔影』, 1939. 2. ; 橋富博喜,「 島武二の作品につぃこ - イタリア 體驗と 裝飾性」,『三彩』503, 1989. 8.
5) 오지호,「내가 인상파에 심취했던 시절」,『공간』, 1976. 4 ; 손정연 앞의 연재 제22화「인상파 발견」및 제23화「인상철학 대화」: 이상『吳之湖 · 팔렛트 위의 철학』(도서출판 죽림, 1999)에 재수록.
6) 이 글에서는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명칭을 총괄하여 '인상주의'로 쓴 것이다.
7) 오지호,「피카소와 현대회화」, 동아일보, 1939. 5 ;「현대회화의 근본문제」, 동아일보, 1940. 3 : 이상『현대회화의 근본문제』 (예술춘추사, 1986)에 재수록.
8) 오지호,「피카소와 현대회화」, 1982. 2. : 『오지호 · 팔렛트 위의 철학』 앞 책에 재수록.
9) 오지호, 「순수회화론」, 동아일보, 1938 :「자연과 예술」,『신세대』, 1945 등.
10) 오지호,「구상회화선언」,『자유문학』, 1959.
11) 오지호,『현대회화의 근본 문제』앞의 책.
12) 오지호의 탱화는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 김인진,「오지호의 회화론 연구」,『미술사 논단』13호, 2001.
14) 오지호,「내가 인상파에 심취했던 시절」, 앞의 책.
15) 오지호,「회화의 영원한 자태, 가장 자연한 모습」,『공간』, 1977. 11.
16) 오지호,「미의 원리 - 미적 감정의 육체 생리적 근거」,『예술논문집』16집, 대한민국 예술원, 1977.
17) 손정연, 앞의 연재 :『오지호 · 팔렛트 위의 철학』 앞의 책에 재수록.
18) 이 사실은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조규일 선생과의 대담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오승윤 선생에게 확인한 것이다.
19) 이태호, 앞의 글.
20) 오지호,「조선혁명의 현 단계와 미술인의 임무」,『신세대』, 1947. 2.
21) 오지호, 앞의 글.
22) 오지호,「예술가의 지조」,『예술통신』, 1946.
23) 입산 활동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혁명재판소의 원심 판결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4) 『민족경제론』저자 고 박현채 선생 등을 통해 듣은 내용이다.
25) 손정연, 앞의 연재 : 『오지호 · 팔렛트 위의 철학』앞의 책에 재수록.
26) 이상 혁명재판소 제1심2부 판결서 (1962. 1.16. 서기1962년革公 제139호) 참조.
27) 이상 혁명재판소 상소심판부 제2부 판결서 (1962. 3.15. 서기1962년革上 제12호) 참조.
28) 앞의 상소심 판결문.
29) 원동석,「한국 자연주의와 인상파 미학의 한계」,『가나아트』, 1990. 3. 4.
30) 오지호,『알파벳 文明의 終焉』, 삼연사,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