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오랑캐의 침공에 골머리를 앓아온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은 이를 물리치고자 기마(騎馬)전투에 편리한 오랑캐옷(胡服)을 채택했었다. 이때 오랑캐 풍습을 따른다 하여 조정신하들이 모두 불복, 출사를 하지 않았으며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그 유명한 오월(吳越)의 싸움에 대해 89자만을 썼을 뿐인데 이 오랑캐옷의 채택에는 1천375자나 썼음만 미루어보아도 당시 중화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조나라에서 큰 사건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발목까지 덮는 이 북방형 오랑캐 신발은 고구려에도 들어와 사신총(四神塚)이나 쌍영총(雙楹塚) 등 고분 벽화들에서 볼 수 있다. 한데 신라 백제 고분들에서 출토된 금동제 신발들은 발목이 없고 발등만을 덮고 있다. 작년 초에 공개된 150여개 파편을 맞추어 복원시킨 6세기경 백제 신발도 발등만을 덮고 있다.
신발은 바닥만 있고 덮개가 없는 샌들 같은 남방형과 덮개에 발목까지 덮는 반장화 같은 북방형으로 나뉜다. 그렇다면 덮개만 있는 고분 출토 금동 구두들은 남북 완충형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오랑캐 신발이라는 외래문화가 6세기경에는 한국화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데 엊그제 발표된 공주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신발은 발등을 덮는 덮개마저 사라지고 바닥만으로 된 남방계 신발임이 눈길을 끌었다.
「당서(唐書)」나 「삼국사기」 백제항목에 가죽신이나 샌들 같은 끈신이 나오는데 가죽과 끈이 삭아 사라지고 바닥만 남은 것으로도 보인다. 이 고분 출토 금동 신발들은 상류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신었다기보다 죽어서 염을 할 때 신겼던 부장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그 구조나 형태로 당시 백제 사람들이 신었을 신발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발목까지 덮었던 북방형 신발로부터 발등이 조금씩 해방되어 갖신·짚신·나막신처럼 발가락이나 발 둘레만을 가리거나 걸치게 하는 한반도 기후 풍토에 알맞은 구조로 주체화하고 있음은 이번 출토된 백제신발에서 볼 수 있다.기후 풍토에 알맞지 않은 이질 문화가 들어와 서서히 주체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무차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구미(歐美)문화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백제 신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