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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교토 16 - 우지에서 윤동주 시비를 보고 우지신사를 거쳐 겐지모노가타리 박물관에!
교토 동부에 있는 케이한 전철 키요미즈고조에키 (京阪電鉄 淸水五条駅) 에서 케이한
혼센 (京阪 本線) 전철에 올라 9번째 역인 주소지마 中書島 (중서도) 에서
우지센 (京阪 宇治線) 으로 환승하여 7번째 케이한 우지역 (京阪 宇治駅) 에 도착합니다.
646년 우지강 (宇治江)에 만들다는 우지바시 宇治橋 다리를 건너 세계최초의 여류
소설 “겐지 이야기” 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석상을 보고는 골목길
을 따라 내려가서는 오래된 사원인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이라는 절에 도착합니다.
일본 화폐 10엔짜리 동전에 새겨진 우지의 명소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년 사찰 뵤도인을 보고
나와서 강변에서 "윤동주 시비" 를 찾다가.... 인포메이션 센터로 들어가서는 여직원에게 우지강변
에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윤동주 시비 위치 를 표시해 달래서는 지도를 들고 우지강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고 한참 내려왔는데 이쯤에서 윤동주와 도시샤 대학 동료 학생
들이 사진을 찍었던 그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인도교 그물다리(출렁다리)
가 나타나야 하는데..... 저 앞 멀리까지 보아도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20분가량 강을 따라 내려가니 길은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다리는 강변에 있어야 하는지라 왼쪽 강변에
난 작은 길로 접어들면서 생각하니 우리가 가진 지도는 관광지도라? 일반 지도는 축적을
실제대로 엄격하게 해서 정확하게 작성하지만 관광 지도는 중심부에 여러 관광명소와
호텔이 몰려있으니 실제보다 크게 자리잡고 그외 관광지가 아닌 지역은 작게 그리기 때문인가 봅니다?
10분쯤 더 걸으니 저만치 앞에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다리가 나타나는데 모두 20분을 걸은 것인데
다리에 도착해 보니 여긴 자동차는 지나다니지 못하는 그러니까 보행자 전용 다리 입니다.
나무 다리 천게빈교(天ケ瀕橋) 는 나무 문이 서 있고 다리는 케이블 까지 설치되어 있어 건너니
출렁거리는데..... 참으로 정겨우면서도 스릴 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관광용 인도교 가 아닌가 합니다?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인던 윤동주 는 귀국전인 1943년에 친구들과 함께 우지강을 찾아 다리
에서 마지막이된 사진 을 찍었는데 며칠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죽으니..... 최근
들어 마지막 사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지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움직임 이 생겼습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인데 그녀는 2002년 부터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 를 열었고...... 2009년 6,358명의 서명을
받아 교토부(府) 지사 에게 제출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비를 세울 곳을 찾아 동분서주 합니다.
곤타니 사무국장의 바람은 마침내 2016년 교토 남부 우지시 시즈가와(志津川)구 에서 우지 강변에 용지 제공
을 결정해 이뤄지게 됐는데 구청장은“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라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이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여기 우지강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1942년 3월 유학 을 떠나면서 의무적으로 창씨 개명 을해야 했으니‘윤(尹) 씨’는‘히라누마(平沼)
군(君)’ 이 됐는데 개명을 앞두고 ‘참회록’ 이라는 시를 썼다고 하며 유학시절을 관통한 감정은
‘부끄러움’ 이었으니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 였던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됐을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히라누마 군’이‘국민시인’이 된 사실을 몰랐던 기타지마 씨는 전후 50년을 맞아 KBS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NHK 제작진에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 윤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제공했는데..... 1943년 우지(宇治) 강의 다리에서 찍은 사진 이었습니다.
윤 시인은 중앙에 여학생들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수줍음이 많아 수업시간이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던 그였는데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한
그를 위해 학우들이 열어준 송별회 였던지라 당당하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네요?
사진을 찍고 1개월후 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됐는데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본
남학우 들도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선으로 끌려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윤 시인을 만난후 인생이 바뀌었다는데 2002년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해 각계의 모금
을 받아 2007년 기념비를 만든후에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지방 자치단체 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에 여기 우지강변 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 을
새겼으며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 이라고 합니다.
이번 비석은 일본 내에서 3번째 인데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 와 교토 도시샤대학교 그리고 숨을 거둔 후쿠오카 (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는데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시인의 무덤 을 찾아낸 학자도 있으며 30년넘게 일본 내 행적
을 추적한 전직 언론인 도 있다는데..... 모두 시인의 ‘부끄러움’ 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 입니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교 에 편입
했다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자퇴 하고는 돌아와 광명중 을 거쳐 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 에 진학해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내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2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 합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중 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니 갖은 악형 속에서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는데 죄명은 독립 운동 이었고,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는 일본의 징병제에 대한 생각이 옥살이 중요한 원인 이었습니다.
1년후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을 수습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몸도 이 꼴이다" 라 말하고는 한달뒤 숨을 거두었으니 생체 실험의 대상 이 된 것입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교토(京都)부 우지(宇治) 시에 기념비 가 세워진다는데 일본인
학우들과 우지강변에서 송별회를 하면서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찍었으니 진이 1990년
대에 공개되면서 2005년 일본시민단체‘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가 만들어 집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작‘쉽게 씌어진 시’에 나오는 싯귀 입니다.)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동아일보에 연재중인 “동주의 길”에서....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일본 와세다대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달뜬 표정이 낯설었으니 윤동주를 과대평가된작가로 폄훼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다음해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 ‘문예상식’ 3개 면에 윤동주 시 ‘서시 ’‘슬픈 족속’ ‘쉽게
쓰여진 시’ 에 대한 분석이 실렸 는데..... 북한에서 윤동주를 평가 하기 시작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간도 용정 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지라 9월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윤동주는
결국 3학년에 편입하니 큰 좌절이었지만 10월에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 에 ‘공상’ 을 발표했다.
이어년 12월에는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을 썼으니 이 시끝에는 평양의 ‘봉수리 에서’ 썼다고 쓰여 있는데...
하지만 더 큰 좌절이 닥치니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 하자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하교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하고 파면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 을 시작
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등과 숭실중학교를 떠나는데 이 무렵 3월 24일에 ‘모란봉에서’ 란 시를 씁니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 일까. ‘얼음 섞인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으니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일본말) 로 노래 부르며 ‘재질대며 ’뜀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니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 을 생각하게 하는데...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나라의 언어와 생활 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동시 ‘창구멍’ 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니 여긴 벼랑 이라 어디 시비를 세울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한지라 저 아래쪽에 댐 옆에 또 다른 자동차가 다니는 백홍교(白虹橋) 다리 가 보이는지라
내려가서는 다리 앞에 이르러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더 이상 내려갈수 없으니 비는 어디가서 찾아야 한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냥 찾을수도 없어 벼랑길 바위를 더듬어 다시 올라오는 데.... 아???
오른쪽 모퉁이에 비가 보이는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처음 여기 도착 했을 때의 자세를
취해 보니 당연히 보이건만..... 비가 저 아래쪽 어디에 있을거라 여긴 선입견 때문에 놓친 것입니다.
되돌아 서서 마눌을 불러 함께 비 앞에 서니 누가 다녀갔는지 꽃이 한송이 보이기로 우린
꽃은 준비하지 못한지라... 풀 잎을 따서 바치고는 함께 묵념 을 하고는
비 주변 을 살피니... 비를 세운 유래며 몇가지 글들 이 보이기로 가슴에 담고 돌아 섭니다.
이제 강 동쪽에 오솔길을 걸어서 아사히 야끼 (朝日燒 조일소)와 우지 진자 宇治神社
(우지신사) 신사 보고는 세계 최초의 여류 소설가 인 무라사키 시키부를
만나러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원씨물어 박물관) 을 찾아 갑니다.
왼쪽에 우지강을 끼고 한적한 흙길을 한 20여분 정도 걸으니 인가가 나타나는데..... 오른쪽에 동선원
(東禪院) 절 이고 강 아래에 특이한 바위는 귀석(龜石) 인데 드디어 관광객 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속 걸으니 오른쪽에 혜심원 절 이 보이고 왼쪽에는 우지코엔(宇治公園) 의 조무교
(朝霧橋) 다리 가 보이니 지도에 朝日燒(조일소) 라고 나오는 朝日燒窯藝資料館
(조일소요예자료관) 을 찾는데 이건 내 선입견 탓으로 오해를 해서 빚어진 촌극 이니...
처음엔 지료를 조사하면서 朝日燒窯藝資料館(조일소요예자료관) 라는 이름을 보고는
규슈 가고시마의 심수관가 나 아리타의 도조 이삼평 등 조선과 관련된
가마로 알았는데.... 그러니까 朝日(조일)을 조선과 일본 으로 읽었더니 아니올씨다?
朝日燒(조일소) 에 가서 둘러보니 朝(조) 자는 아침 조 자요, 日(일)자는 해(태양) 일 자이니 아사히야끼
(朝日燒조일소) 라고 읽습니다. 아사히(朝日 조일) 는 일본의 3대 신문중 하나인 아사히신문 같은!
그래도 여기 아사히야끼(朝日燒) 는 시시한 도자기 가마가 아니고 이 땅 우지에서 오래전 옛날인
400년 전에 세워져서는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도자기 공방 이니 역사와 유래 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사히 야끼는 원래 공방과 가게 가 같은 공간에 있다가 1년전쯤 분리 해서 따로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웃에
있으니 두곳을 다 볼수 있는데 가마가 있는 공방은 숍에 얘기해서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흙을 반죽하는 장소 가 나오고 다음은 성형실 이며 무늬까지 새긴 다음 가마에 넣고 불을
지피는데 가마 위에 신당을 꾸며놓았으니 도자기를 굽기 전에 불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고 하는데... 가마에서 도자기가 나오기 전 까지는 어느 누구도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아 여겨지니.....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순답니다?
아니면 도자기 체험 행사 등에 쓴다는데.... 아사히야끼(朝日燒) 는 차의 고장 우지 답게 대부분
다기 세트 로 일본에서는 찻잔을 '사카즈키' 라고 부르는데, 찻잔과 술잔의
구분이 크게 나뉘어져 있지 않으니 사케를 마실라 치면 술잔으로 써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
그러고는 언덕길을 올라가서는 우지 진자 宇治神社(우지신사) 를 보는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게 일본의 동네에서 흔히 보는 그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평범한 신사 입니다.
그러고는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10분가량 언덕길 을 올라가니 우지신사뒤편 언덕에 자리한 우지가미
진자 宇治上神社(우지상신사) 에 도착하는데.... 도리이에는 새끼줄과 종이 등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 신사의 본당 은 근처 뵤도인과 동시대인 1,060년대에 지어진 일본 최초의 신사 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으며 신사는 작고 수수하지만 토끼 모양
의 오미쿠지 가 재미있으며 금년이 돼지해 이다 보니 맷돼지 도자기 도 팔고 있습니다.
연대 측정 결과 106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사라고 하며
국보인 혼덴 (本殿 본전) 앞에는 짚으로 만든 '지혜의 륜(輪· 바퀴)' 이 있으니.....
이른바 포토존 인데 통과해서 왼쪽으로 세번 돌고 다시 오른쪽으로 세 번 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신사는 보통은 본전이 배전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별도 담으로 둘러싸여서 가려지게 하는데 여긴
배전과 본전 사이가 트여서 바로 다닐 수 있는게 특이한데.... 토끼를 숭배 하는게 또 별스럽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을 찾으면 593년에 성덕태자에 의해 창건된 오사카의 시텐노지
(四天王寺 사천왕사) 라고 나오지만 나라현 아스카 에 소가씨가 창건한
아스카사(飛鳥寺 비조사) 에 가면 596년에 창건된 이 절이 최초 이고 시텐노지는
593년에 착공했다고 주장하며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도 최초의 절 논쟁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신사의 경우에도 여기 우지가미신사 가 1060년 뵤도인이 창건될 무렵 같이지어 최초라지만 나라현 덴리
(天理 천리)시에 칠지도를 간직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석상신궁) 과 역시 나라현 사쿠라이시
미와(三輪)산 아래에 5세기에 조성됐다는 오미와 신사(大神) 도 자기 신사가 일본 최초 라고 주장합니다.
오미와 신사가 5세기 그리고 이소노카미신궁이 6세기 에 만들어졌다면 최초 논쟁에 여기
우지가미 신사는 끼이지도 못하는데.... 어느분 이야기는 창립 연대가 아니라 "현존
하는 신사 건물" 자체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연대의 신사 건물 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골목길로 해서 마을을 통과해서 10여분을 걸으니 우리가 기차에서 내려 건넜던
우지교(宇治橋) 다리가 보이는데 행인에게 물어 다시 우회전을 언덕길을 5분가량
올라가니 오른쪽에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원씨물어박물관) 이 보입니다.
여기는 일본 문학사상 최고의 찬사를 받고있는 11세기 에 씌어진 고전 소설 “겐지 이야기”
를 테마로 한 뮤지엄으로 헤이안 시대의 왕조 문화 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데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 는 일본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최초의 여류 소설가 라고 합니다.
최초 여류 시인 은 BC 7세기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 라고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처용가등
향가(鄕歌) 는 1,075년 균여전에 11수와 1,281년 삼국유사에 14수등 25수가
전하는데, 반면에 일본은 759년에 편찬된 만요슈 에 노래가 4,516수 가 실려있으니...
누카다 오키미 額田王(액전왕) 가 빼어난 시인이고 소설가는 11세기에 무라카키 시키부 라!
일본은 794년에 나라에서 도읍이 헤이안경(교토) 으로 옮겨진 100년 후인 894년 에 중국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과 한반도에서 후삼국 시절 혼란이 지속되자 문물의
수입 창구로 수십차례 대륙에 파견해 왔던 견당사를 폐지 하고 국내로 눈을 돌려
국풍 이 일어나니... 그중에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원씨물어) 같은 소설 이 출현합니다.
11세기초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에 의해 성립한 세계 최고(最古)의 근대 소설로
당대의 이상적 남성상인 히카루겐지(光源氏)의 출생과 시련, 그리고 영화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으니 중국으로 치면 홍루몽(紅樓夢) 에 비길만 합니다.
무라사키 시키부 는 하급 관료 인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메토키의 딸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소설 중 하나인
『원씨물어(源氏物語)』의 저자 인데 어머니는 하급 관료인 후지와라노 타메노부의 딸이라고 합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지방관이었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동하며 생활했는데, 학자
이기도 한 아버지에게 한학 을 배웠으며... 생몰연도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970년에서 973년 사이에 태어나서 1014년에서 1025년 사이에 사망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집안이 대 귀족 후지와라 가문 이고 아버지가 관직 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토우노 시키부(藤式部)
라고 불렸을 것으로 보이며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이름은 그녀 사후에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무라사키’는 『원씨물어』의 여주인공 무라사키노 우에 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그리고 ‘시키부’
는 아버지 의 관직명, 즉 대학료를 통괄하는 식무성의 식무대승 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귀족의 자녀일지라도 여자일 경우 가나(문자) 와 와카(일본 고유 형식의 시)정도만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러나 딸의 재능 을 알아본 아버지는 무라사키에게 한문 까지도 가르쳤으며
그녀는 998년에 나이차가 상당한 지방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결혼 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혼한지 3년 만인 1001년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인해 남편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여러 이유로 그녀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으니 남편과의 부부 싸움을 노래로 읊은 것이 지금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후 무라사키는 『원씨물어』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높아서
1005년 이치조왕(천황)의 부인 후지와라노 쇼시의 가정교사 일을 시작하여
대체로 1018년까지 지속했다고 하며 무라사키의 남편은 노부타카라고 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이론도 존재하니 예를 들어 『권기(権記)』의 기록에 의거하여 노부타카와결혼하기 전에 키노 토키부미
와 결혼 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며 또한 가마쿠라 시대 공가(조정의 귀족) 의 계보를 집대성한
『존비분맥(尊卑分脈)』에 의하면..... 그녀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첩 이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많은 여성과의 다채로운 연애 와 겐지 사후에 후세들이 경험하는 삶의 갈등 을 그리고
있는 모노가타리 문학 으로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니
‘아와레’ 문학의 백미 라고 불리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덴노의 치세였던가. 뇨고· 고이가 시중들고 계신 분 중에 그다지 고귀한 신분은 아니지만
아름다워 특별히 총애 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이야
말로 사랑받을 만한 여자’라고 자부하고 계신 분들은 어이가 없다 하여 멸시하고 질투 하신다"
"같은 정도의 고이나 그보다 낮은 신분의 고이들은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아침저녁 미카도를 시중들 때
마다 그녀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원망을 받는일이 쌓이고 쌓인 탓인가. 매우 병이 깊어져
가엾게 친정에 돌아가는 일이 잦아진 것을, 미카도 는 점점 더할 나위 없이 그리운 사람으로 생각하셔...."
"여류 문인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는 973년생으로 『겐지모노가타리』 외에 『무라사키시키부닛키』와
가집 『무라사키시키부슈』 등 작품을 남겼으니 어릴 때부터 한문 서적과 불전, 음악 등을 배웠는
데, 997년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결혼하여 1녀를 얻지만 남편과 사별하고는 겐지모노가타리 를 썼다."
"겐지 모노가타리 는 54권으로 구성 되어 있으니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출생 에서연애, 영화, 만년에
이르는 일생 을 다루는 「기리쓰보(桐壷)」에서 「구모가쿠레」까지를 정편이라 하며 겐지
사후의 이야기를 속편 이라고 한다.특히 속편 중에서 무대를 우지(宇治) 로 옮겨 그의 자식
대인 가오루 와 손자인 니오우미야 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는 부분을 ‘우지 쥬죠(宇治十帖)’ 라고 한다."
• 제1부 : 히카루 겐지 가 고마노 소닌(高麗の相人)의 예언대로 쥰다이죠덴노(准太上天皇)
에 올라 최고의 영화를 누리는 약 40년간의 시기로.... 후지쓰보(藤壷)
중궁 과 무라시키노 우에(紫の上) 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과의 교섭 이 그려지고 있다.
• 제2부 : 부나 지위와는 관계없이 인간 내면의 고뇌 를 중심으로 히카루겐지의
만년 이 그려지고 있다. 「구모가쿠레」권은 권 명만 존재한다.
• 제3부 : 교토를 떠나 우지를 무대 로 히카루겐지의 후대 인 가오루와 니오우미야, 우지의 하치노미야
의 딸인 오이키미(大君)· 나카노키미(中の君)· 우키후네 (浮舟) 의 남녀 관계 가 그려지고 있다.
"4백자 원고지 2,600장 에 이르는 장편으로 인생의 무상함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을 접하여
생기는 절절한 감동이나 정취를 말하는 모노노아와레 (もののあはれ)’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으며 가나 문장의 모범적인 문체를 완성시킨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헤이안 시대의 미의식에는 ‘오카시(をかし)’ 와 ‘아와레(あはれ)’ 가 있으니 ‘아와레’ 는 깊은
공감과 우미한 정감 을 말하며 『겐지모노가타리』가 대표적 작품이다. ‘오카시’ 는
강한 흥미 를 일으키는 미적 감각으로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가 대표적 이다."
대 귀족 후지와라씨(藤原) 집안(아버지, 어머니에 남편이 후지와라) 의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는 당시 일본
의 독특한 취미 이던 "40가지 향의 냄새" 를 맡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니 茶道(다도) 와 더불어 香道(향도)
가 성행했다는데..... 오늘 그 향을 보고 여주인공이 강에 몸을 던지는등 결말이 슬픈 영상물 까지 시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