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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왜 요즘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저를 알아서가 아니라 가톨릭 전체를 좌파 편향으로 보고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은 시각으로 편을 가르는 시각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혹은 넬슨 만델라처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소위 ‘어른’이 요즘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까요? 이는 유명한 예화가 떠오르게 합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이 주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의’(큰 뜻)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깔린 안 좋은 프로그램을 제거하면 좋은 것들까지 함께 제거되어 결국엔 윈도우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은 뽑아내지 말고 함께 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위해서.
19세기 초, 미국 예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축업자들은 늑대가 가축을 해치는 주범이라 생각하여 늑대를 몰살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사슴과 엘크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원이 황폐해지었습니다. 초목이 사라지자 가축들도 먹이를 구하지 못했고, 강물의 흐름까지 변하는 등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였습니다.
큰 뜻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가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대의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포용력이 전혀 없는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진 어른이 꼭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임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훔쳐먹은 신하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당에도 그렇게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이라는 뜻에 집중할 때만 그런 능력을 갖춘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스마트폰에 소변이 튀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1)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2)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둔다. 3)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아마 기겁하면서 3번을 대부분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방금 만들어진 소변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표면에서는 7,000여 종이 넘는 세균이 득실거립니다. 스마트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500배 더럽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 만지는 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2,000번 이상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으면 당연히 변기보다 스마트폰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판단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이 먼 훗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요한은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어디에서 나오든 그 궁극적인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 밖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영적 체험을 한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진리 안에서 참 기쁨에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부당한 이득을 얻지 말라. 그것은 손해와 같은 것이다(헤시오도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집회 4,17)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할 때까지
지혜가 우리를
가시밭길과 공포로 내몰 수도 있다네.
지혜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규칙을 가르쳐 주고
진리와 함께하는 이들에게는
비밀스런 신비를
열어 보여준다네.
지혜로운 이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가
우리를 지지하는 이임을
알고 있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제 2의 그리스도로 불리워지는 사제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자기 비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비움이 조금 덜 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내 기준으로만 바라보는
못된 악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또한 자기 비움이 덜 되어 있다는 반증이기에
자기 수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서운함을 토로해도 좋고
불평불만을 해도 좋고
심지어 믿음에 불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체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임을 알게 된
바로 그 체험의 기억만 내가 가슴에 품고 산다면
우리는 언제든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관심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나와 함께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실 것을 저는 오늘도 믿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4,11-19
11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12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13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14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5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16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17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18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19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