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로버트 휴즈 '여름축제 전야': 숲의 생명력으로 열리는 이브의 시간
문명 반대편 숲은 여성의 땅…그 속 은밀한 요정과 마법 판타지
|
| 19세기 영국의 화가 에드워드 로버트 휴즈(1849~1914)가 그린 '여름축제 전야'. |
- 님프 축제와 마주친 소녀일까
- 마법 연금술로 빚은 여신일까
- 서양서 숲은 옛부터 감성 영토
- 여성 통해 생명력 불어넣어
- 경쟁사회 느림의 삶 곱씹게 해
한여름의 밤, 숲 속 빈터에 고즈넉이 서리는 달빛이거나,
비밀스러운 꿈, 한 열흘 열병을 앓고 난 뒤의 황홀한 몽환처럼,
그녀는 거기 그렇게 서 있다.
숲 속 요정들의 내밀하면서도 야단스러운 카니발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누구일까?
은밀하게 열리는 한여름 전야를 우리도 살짝 훔쳐보자.
쉿! 조심해야 한다.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이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로버트 휴즈(1849∼1914)는
라파엘전파 화가이다.
라파엘전파는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여기에는 상징으로 가득 찬 중세적 회화 양식과
근대 사실주의가 역설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휴즈는 이 그림에 'Midsummer's Eve'라고 제목을 붙였다.
■ '목신의 오후'를 떠올리다
'Midsummer'는 한여름의 뜻이면서
성 요한 축일의 여름축제를 가리킨다.
'Eve' 또한 전야의 뜻이지만 최초의 여자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그림 제목은 '여름축제의 전야'이면서 '한여름의 이브'이다.
이브는 머리에 화관을 두르고 허리에는 분홍 꽃을 꽂았다.
그리고 한 팔로 피리를 끼고 있다.
마술적이고 고대적인 숲과 피리는
우리의 상상계에 곧장 목신(牧神) 판(Pan)을 잠시 불러온다.
말라르메는 '목신의 오후'에서 판으로 하여금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든 물의 님프들을 호명한다.
시인의 언어는 그 물거품의 메아리를 좇는다.
아, 이 수정(水精)들의 모습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이네들 발그레한 살빛 하그리 연연하여
숲 속같이 깊은 잠에 싸여 조는 대기 속에
하늘하늘 떠오른다. (김화영 역)
이 투명하면서도 은밀한 메아리야말로 '여름축제의 전야'의 소녀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찬가다.
숲의 님프 같은 소녀는 목신의 그 연연한 열정의 대상이며 또한 피리를 불며
몽상에 젖는 목신 자신이기도 한 것일까?
축일 전야의 소녀는 숲속에서 달빛과 이슬에 젖은 채 놀다가 우연히 이 작은 요정들의 축제를 만난 것일까?
그리하여 살짝 허리를 굽힌 채 작은 요정들과 수줍게 눈을 맞추고 그들의 방언을 듣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원형으로 둘러싼 숲과 요정들의 마법적인 연금술에 의해 그녀가 막 황홀하게 탄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온통 비밀스러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성경의 구약은 가부장적 일신교를 정립하고자 하는 기획 아래에 써졌지만, 근동지역에 만개했던
모권적인 여신 시대의 흔적을 도처에 남기고 있다.
창세기에 신이 그 위를 떠돌았던 '흑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 '뱀'
그리고 여성적 목소리를 풍부하게 간직한 '시편'이 그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주변을 떠돌던 메아리들이다.
이브는 그 여신의 왜곡된 파편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숲의 생명력에 의해 다시 탄생하고 있다.
숲은 비밀스럽고 어둡다.
오랫동안 숲은 밝은 문명의 저편에 있는 두려운 곳, 그래서 신성한 곳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으로 가는 길은 어두운 숲에서 시작된다.
문화인류학의 대작인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역시 디아나 숲 속의 네미 호수 전설에서
그 신성한 왕의 드라마를 시작한다.
'네미'라는 지명은 숲 속 빈터를 뜻하는 라틴어 'nemus'와 어원이 같으며, '신전'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도
숲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 숲의 원형을 보존한 서양
| |
| 에드워드 로버트 휴즈의 '발키리의 경야'. |
서양은 광활한 원시림을 끝없이 개간해 왔지만 일정한 지역 내에
한 부분의 숲은 반드시 원시 그대로 남겨두었다.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그 숲에 마법과 요정의 판타지가 산다.
요정이야기는 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들이 '피터팬' '해리포터' 그리고 '여름축제 전야'를 가능하게 한
밑천이다.
삶은 언제나 계산 너머에 있는 두렵고 신비스러운 영역을
어느 정도 요구한다.
그곳이 없다면 삶은 더는 꿈 꿀 수가 없다.
숲은 이성의 지대가 아니라 감성의 영토다.
달빛과 마녀와 요정이 춤추는 여성성의 장소다.
이브의 나라이다.
휴즈는 초상화가로 유명했지만, 감성적 여성성의 판타지를
곧잘 형상화했다.
저 황홀한 '발키리(Valkyrie)의 경야(經夜)'를 보라, 푸른 북극광이
가득 서린 이 두렵고도 신비스러운 여신의 매혹을(발키리는 북유럽
신화에서 전쟁의 여신이다).
북유럽 요정의 기본 캐릭터는 난쟁이(소인)이다.
스칸디나비아 민간전승에서 난쟁이(드베르그르)라는 말은 깊은 산 속이나 광산 밑바닥에 사는 요정을 뜻한다.
'여름축제 전야'의 요정들도 장난꾸러기 같은 아기요정(소인)들이다.
이들은 혹시 버섯의 정령들일까?
화면 아래에는 버섯이 보인다.
버섯과 같은 균류는 움직임을 멈춘 물질을 다시금 순환시킴으로써 생명과 생명을 이어준다.
그리고 몇몇 버섯의 성분이 자주 환각작용과 깊은 관련을 갖기도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가 훔쳐보는 이 황홀한 장면도 버섯의 환각작용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기요정들은 날개를 달고 하나씩 등불을 밝히고 있는데 그 모양이 무척 다양하고 이채롭다.
나선형, 고깔모자 모양, 등잔불, 폭발하는 불꽃 같은 모양, 조개 형태 등등.
그리고 아예 신이 나서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불빛.
오른쪽 한 요정은 깨진 알과 같이 된 등불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이 불빛들은 숲이 가진 신령한 생명력이다.
왼쪽 하단에는 이 요정들 집의 문이 보인다.
그 집은 아마 나무의 밑둥치이며 대지의 심연과 닿는 나무의 내부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숲의 생명력은 나무의 내부에서 나온다.
나무의 내부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그 불이 수십 미터 가지 끝으로 물을 상승시키고, 겨울을 이겨내고 여름 숲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낸다.
■ 작은 생명체가 꼬물거리는 숲
요정의 불꽃은 숲 속 생명에너지가 가진 다양한 울림의 시각화이다.
이 고요한 소란, 다양한 울림의 생명력이 모여 여성을 탄생시킨다.
숲과 달빛, 젖은 풀과 꽃, 버섯, 그리고 숱한 숲의 생명체, 피리의 선율, 물과 불의 내밀한 몽상이 모여서
이브를 이룬다.
여성은 근원적으로 다성체(多聲體)이다.
이브는 죄의 기원이 아니라 생명의 합창이요 축제다.
경쟁을 위한 일과표와 효율성에 사로잡힌 남성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숲으로 가는 길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도심의 작은 화단이나 가로수 밑을 조용히 느리게
바라본다면, 숨 가쁜 시간 사이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숲과 그 숲의 시간이 증발되지 않은 채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공벌레, 진딧물, 개미, 작은 생명체가 다양한 생명의 등을 켜고 꼬물거리는 것을
경이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여름축제의 전야', 이브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