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술로 팔자를 고친 허임
허임은 강원도 양양의 관노인 아버지와 어느 양반댁 사노(私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가 병이 들었는데, 돈이 없어 침쟁이 집에서 노역하는 조건으로 치료를 받고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눈썰미가 좋은 허임은 일하는 틈틈이 침구법을 익혀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팔도에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경지에 오른 허임은 75세 때 「침구경험방」을 펴내 침구법 보존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허임은 허준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까지 올랐지만, 관노의 아들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대를 잇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침구법을 익힌 허임은 약관으로 접어들자 세상으로 나가 침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광해군의 분조(分朝. 임시 조정)에 합류하여 강원도와 함경도를 돌며 백성들을 치료했다.
그 인연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은 허임은 천민신분에다 정식으로 의술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종6품 의학교수에 제수되었다.
조선왕조 27왕 가운데 까다롭기로 소문난 선조도 병이 깊어지자 허준과 함께 허임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1604년 9월 23일 조에 보면, 선조가 밤중에 편두통이 심해지자 허준을 불러 침을 놓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50대 허준은 30대 허임을 추천하여 선조의 편두통을 깨끗이 치료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한 달 뒤, 선조는 종6품인 허임을 정3품 부제조에 제수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신분의 벽은 견고했다.
광해임금 9년 2월, 임금이 허임을 양평현감에서 양주목사로 발령하자 허임이 관노의 아들임을 내세워 사헌부가 결사반대했다.
광해임금은 간관(諫官)들의 등살에 떠밀려 허임을 부평부사로 보내고 말았다.
내의원 제조(종2품) 이경석은 허임이 지은 「침구경험방」 발문에서 ‘평생 구하고 살린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썼는데,
광해임금도 허임의 치료로 목숨을 건진 환자 가운데 하나였다.
허임의 침술은 사후에도 효과가 인정되어 효종 2년(1651) 내의원 산하에 침의청(鍼醫廳)을 설치하는 데 이른다.
18세기 초 의학 선진국 조선으로 유학을 온 왜인 야마카와는 「침구경험방」을 번역하여 왜국에 침술을 전파했다.
김희선보다 먼저 신의(神醫)로 불린 백광현
침의청에서 일하는 침의가 200명을 넘어서면서 침으로 수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초 마의(馬醫)로 입문한 백광현(1625~1697)은 침술의 대가로 성장하여 수술분야에서도 신의라는 평가를 받았다.
항생제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생활환경도 비위생적이라 종기 환자도 많았고 문종과 수양대군처럼 종기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백광현은 침으로 종기를 수술하여 완치시키는 탁월한 재주를 개발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가 종기 치료분야의 대가가 된 것은 말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험을 쌓은 덕분이었다.
침을 이용한 백광현의 종기 수술법은 이후 여러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널리 퍼졌다.
숙종 10년(1684) 5월, 백광현은 종6품 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어의들은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병을 고치면 승차를 하다가 더 오를 데가 없으면 지방수령으로 나가는 게 관례였다.
백광현은 현종의 목에 난 종기, 효종비의 머리에 난 종기, 숙종의 목과 배에 난 종기 등을 고친 업적이 있었다.
더욱이 이 시기는 효종이 종기로 붕어한 직후라 종기 치료 업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이 평가되었다.
어쨌든 문과는커녕 의과에도 합격하지 않고 내의원으로 가좌되었던 백광현으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백광현은 이후에도 눈부신 치료실적을 업고 1691년 지중추부사, 1692년 숭록대부 등 승차를 거듭했다.
백광현은 말년까지 인술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숙종 21년(1695) 영돈녕부사 윤지완이 각기병으로 고생을 하자 임금이 백광현을 보내 치료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1세로 죽기 2년 전이었다.
백광현의 전기를 집필한 정내교는 안타까운 사연 하나를 소개한다.
효종 10년(1659) 5월, 효종의 종기가 심해지자 여러 의원들을 불러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도록 했다.
모두 신통찮은 가운데 내의 신가귀가 침을 놓았다가 혈락(血絡)을 범하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효종은 죽고 신가귀는 처형되었다.
이때 백광현은 아직 내의원에 들어오기 전이었는데, 정내교는 그가 있었더라면 효종의 종기를 고쳤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백광현이 세상을 뜨자 종기로 명이 경각에 달한 사람들은 ‘아아, 백광현이 없으니 나도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며 숨을 거두었다.
고약의 달인 피재길
피재길은 어머니로부터 종기를 잘 고치는 침술을 배운 위에 스스로 고약을 개발하여 종기를 잘 고치게 되었다.
의원인 아버지가 피재길이 어려서 죽자 남편의 어깨너머로 침술을 익힌 어머니가 아들에게 침술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고약을 팔러 다니는 동안 피재길은 의원들로부터 여러 차례 핍박을 당했으나 일체 대항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시나브로 약효가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양반 댁에서도 그의 고약을 찾게 되었다.
1793년 정조의 머리에 종기가 생겼다.
침과 약재 등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낫기는커녕 종기가 얼굴에까지 번졌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정조는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의들도 대책이 없어 안절부절못했고, 대신들도 연일 논의를 거듭했지만 입씨름뿐이었다.
이때 사관 가운데 한 사람이 피재길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정조에게 직접 추천했다.
어전에 불려온 피재길은 사대부들의 냉소 속에 절절맸으나 정조의 격려를 받고서야 임금의 종기를 찬찬히 검진했다.
진단을 마친 피재길은 처방을 내린 뒤 손수 고약을 조제하여 환부에 붙였다.
피재길의 정성어린 손길을 지켜보던 정조가 물었다.
“며칠이면 낫겠느냐?”
“예, 전하. 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 뒤에는 완치될 것입니다.”
어의들이 한결같이 비웃었지만 정조의 종기는 사흘 뒤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정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피재길을 종6품 내침의에 제수한 뒤 나주 감목관(監牧官)으로 내려보냈다.
감목관은 지방수령이 겸직하던 왕실 목장 감독관이었다.
이 일로 피재길의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처방으로 조제된 고약도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특허권으로 떼돈을 벌 기회였던 셈이다.
「정조실록」 24년 6월 조에 보면 정조가 임종하는 순간의 고비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정조는 전신에 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종기가 돋았다.
내의원으로도 모자라 지방에 있는 유명한 의원들까지 총동원되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이에 정조가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피재길을 들도록 명했다.
김한주와 백동규의 진단이 다르자 정조는 밖에 나가 처방을 논하라고 명했다.
이후 피재길을 포함한 모든 어의들이 치료에 매달렸지만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정조에 이어 즉위한 순조는 즉각 어의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으며, 피재길은 역의(逆醫)라는 선고와 함께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첫댓글 좋은 내용 고맙게 잘 본다네
몸 상태는 어떤가?
'고약'이라
참 오래간만에 들어봤네
어릴때
참 많이도 붙이고 다녔는데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