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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주셔도 받아야 내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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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셔도 받아야 내것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당신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율법 학자들과 권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님께서는
용서의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비단 주님만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뒤에 군중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신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본래는 하늘의 하느님께만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권한을 땅에까지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에게도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권한은 본래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오히려 용서받아야 할 주제지요.
그러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권한을 받은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이로써 인간인 우리가 신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광스러운 권한을 주심에 감사하지 않고,
이 권한을 포기하고 우리는 용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겸손과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하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하느님 사랑과 용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그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군중이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받는 존재들인데,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우리가 받지 않으면 그 무슨 소용입니까?
늘 그렇듯 하느님께서 주셔도 우리가 받아야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능력도,
용서의 권한도,
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넙죽 받아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의 아들들이 되기로 결심하고 용기를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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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1999년 1월 28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까지도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했을까요? 당연히 안 했습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신부는 독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처럼 신앙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 또 사회적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기에, 이제는 사제로 독신을 지킨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에 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이나 결혼했고, 세 번 모두 헤어졌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결혼하셨냐고 물으니, “다 다른 줄 알았어요.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살아보니 똑같더라고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아내가 문제라는 생각에 이혼하고 결혼했지만, 다음 아내도 또 다음 아내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결국 누가 문제일까요?
한 사람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제대로 지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따라서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좋은 관계인가요? 나쁜 관계인가요?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산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치유를 받습니다. 어쩌면 중풍 병자와 데리고 온 사람들의 관계를 본 것이 아닐까요? 중풍 병자인 자신을 데리고 올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면 주님 당신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더불어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하고, 또 죄의 용서라는 특별한 은총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나 역시 주님과 친밀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웃에 대해 계속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나 역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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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훌륭하게 해네세요(나폴레온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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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당시에 질병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고, 이 병자 역시 자신의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놀라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용서받았음을 누가 알 수 있을 까요?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마태 9,4) 전지하신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테 9,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용서권자요, 하느님이심을 직접 드러내시며, 당신의 권한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여주십니다. 곧 영적 표징의 증거로 육체적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시며,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한편, 오늘 복음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가셨듯이,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평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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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걸작품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 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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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먼저 성화 되어야 교회가 성화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예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거룩한 모습을 보이면 공동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 있을 때는 사제성화의 날을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교구는 사제성화의 날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이하는 사제들을 축하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도 8년 전인 2016년 사제성화의 날에 은경축 축하 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음을 알았지만 덤덤하게 지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가 속했던 브루클린 교구에서도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사제성화의 날에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10시 미사를 마치고,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5개월 전에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시는 할아버지를 위한 봉성체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두 분은 먼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5개월 동안 성당엘 못 오셨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도 참례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셔 드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왕은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파병을 결정하였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한산, 노량에서 일본의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가 유럽으로 수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먼저 조선이 근대활 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명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입니다. 율곡 이이는 일본의 힘이 강해질 것을 예측했습니다. 강해진 일본은 조선을 넘보리라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십만의 병사를 양성하자고 했습니다. 무너진 산성을 개축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조선은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살펴본 수신사들은 엇갈리게 보고했습니다. 한쪽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야욕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할 만큼 강인하지 않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부가 율곡 이이의 충정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수신사의 보고를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조선은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아모스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전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였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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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몸이 아프면 서로 걱정해 주고, 빨리 나으려고 병원에 갑니다. 그런데 정신이 아프거나 병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숨기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몸에 병이 생기듯이 마음에도 병이 생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마음에 병이 생기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입니다. 중풍은 분명 몸의 병인데 왜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죄를 용서해 주셨을까요? 그것은 중풍 병자가 원하던 것이 죄를 용서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가 몇 년이나 누워있었을까요? 그러면서 중풍 병자는 세상을 미워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자기 모습이 초라하고,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로 취급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죄가 있어서 병에 걸렸다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나병, 중풍, 정신병 등이 죄로 인해 하늘이 내를 병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거리에 쓰레기로 취급되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 매일 눈만 뜨면 하느님을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마음은 더 큰 병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병자의 마음을 용서해 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렇게 병자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나은 것입니다.
몸을 돌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마음도 잘 살피고, 이웃의 마음도 잘 살펴야 합니다. 마음에 병이 생기지 않도록, 아픔으로 상처 난 곳이 있다면 빨리 예수님께 치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의 상처도 덧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덧나면 미움이나, 슬픔, 우울함, 과격한 말, 행동 등으로 그 상처가 외부로 나타나고, 그것은 몸의 병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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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과자
어느 날 이곳을 방문하신 분께서 호두과자를 주셨습니다.
제가 아는 호두과자는 이렇습니다.
우선 풀빵 같은 빵 안에
달달한 팥앙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표면에는
호두과자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처럼
호두 조각이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알던 호두과자가 완전한 변신을 한 것입니다.
기존의 명맥을 유지하는 팥앙금도 있었지만
슈크림 호두과자도 있고 치즈 호두과자도 있었습니다.
호두과자도 열심히 발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호두과자에 힘입어
저도 열심히 발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체되지 않고 생동적인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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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
치유의 기적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이런저런 예화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다산 어록집은 도반 사제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제가 아끼는 평전중 하나가 다산 정약용 평전입니다. 아마 5000년 한국 역사중 최고의 학자가 백성을 참으로 사랑했던 다산이며 평전의 제목도 ‘백성을 사랑한 지성’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어른이란 먼저 등을 보여주고 길을 여는 존재다. 막혔던 길이 뚫릴 때 비로소 즐거워한다.”<다산>
“선비는 세상의 근심에 앞서 근심해야 하고, 세상이 다 즐거운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주희朱熹의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이런 어른이나 선비가 진짜 어른입니다. 참으로 보고 배울 참 어른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저절로 나이 먹어 어른이 되어 가는 게 아니라, 삶의 지혜와 모범이 축적됐을 때 큰 그늘과 큰 배경과 같은 어른이겠습니다. 어제 이민자들이 바티칸의 교황님을 만나 느낌을 말한 한마디가 평범하나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다.”
아마도 종파를 초월 금세기 최고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어른이 프란치스코 교황일 것입니다. 날마다 그분의 일정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말씀을 주시는지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대로 주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요즘 세인들 대부분의 관심은 건강일 것입니다. 얼마전 받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잘 지내시는지요? 매일 보내주는 강론이 없으면 아프신가 걱정이 되요.”
“미안합니다. 착각했네요. 보낸줄 알았습니다.”
“건강만 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미사봉헌의 대부분도 건강을 기원하는 생미사입니다. 자주 회자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인생 초년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 싸운다는 말마디입니다. 정말 노년을 맞이한 많은 분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병마와의 싸움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말하는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 순서가 있으니,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 믿음 다음에 건강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중의 어른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 주인공인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주님처럼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고 희망과 꿈을 주는 빛같은 이들이 정말 어른입니다. 오늘 본기도 말씀대로 오류의 어둠속을 걷지 않고 진리의 빛속에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이 진정 어른입니다. 새벽 산책때 마다 예수 성심상 앞에서 바치는 기도도 생각납니다.
“주님,
슬픔과 좌절이 있는 곳에 위로를 주시고,
전쟁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주시고,
아픔과 질병이 있는 곳에 치유를 주소서!”
예수님을 닮아 위로와 평화, 치유를 주는 이들이 진정 참 어른입니다.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복음서의 내용도 대부분이 고쳐주시고 살려주시고 먹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 후에 주님은 온전히 하느님 나라 선포와 더불어 민초들의 심신의 치유에 온힘을 다하십니다.
새삼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감동시키는 것이 믿음이요 오늘 복음에서도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이 빛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은 중풍 병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요! 예수님 자주 쓰시는 말마디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라”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세상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하지만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중 한 대목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하셨으니, 저희 죄를 보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새삼 교회의 믿음에 날로 깊이 뿌리내릴 때 성장, 성숙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믿음에는 이미 회개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동료들의 믿음에 감동하신, 죄를 용서받기에 충분한 이들의 믿음을 본 주님의 과감한 용서 선언에 이어 치유 선언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으니, 주님을 만나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중풍병자입니다. 이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게 된 치유받은 중풍병자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만나 죄를 용서받고 치유받아 파견되는 우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죄로 병들면 몸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심신의 치유, 영육의 치유에 참된 회개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몸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으로 튼튼하고 건강해야할 정신이요 마음이요 영혼입니다. 이래서 영육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고백성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와 하느님의 예언자 아모스와의 대결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참 어른이자 예언자인 아모스의 권위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다음 대목이 보여줍니다.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에 이런 솔직하고 과감하고 통쾌한 고백입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는 이제 주님을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아모츠입니다.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사명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죄를 용서 받고 치유의 구원을 받아 이제 이렇게 온전한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금보다 순금보다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시편19;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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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믿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희망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사랑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보듬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나누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일으켜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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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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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9,6)
관구 봉사자 소임을 끝내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성요셉 병원에서, 현재는 안성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저는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중풍병, 편마비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어려움과 힘듦을 익히 알고 있기에 오늘 복음의 내용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인생은 홀로 걷는 것이 아니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길에서 함께 걸어갈 동반자나 도반이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전우신’이란 분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분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간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길의 동반자와 도반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사실 중풍병을 앓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그는, 몸은 비록 불편하였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자신의 불행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으며, 그래서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을 앓는 그 사람을 동네 이웃들은 오래도록 지켜보아 왔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고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자비로운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중풍병을 앓고 있는 이의 믿음이나 간청이 아니라 순전히 그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2)하고 말씀하신 것은 당대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질병이나 불행은 죄의 결과하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풍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해 주었기에, 죄의 결과인 중풍병도 치유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고서 율법 학자들은,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9,3)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과 중풍 병자의 치유를 목격하면서 시비를 거는 율법 학자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사람을 보는 시선의 차이이며, 이는 자비와 거룩함의 차이라고 봅니다. 율법 학자들은 몸은 비록 건강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결코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그러진 마음에서 세상을, 이웃을 바라보는 ‘악한 생각’(9,4참조)으로 넘쳐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6)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부디 그가 치유와 치료받고 난 뒤에 율법 학자들처럼 혼자 걷지 않고, 치유 받기 이전의 자신처럼 혼자서는 걷지 못한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에게 향한 바램입니다. 전우신은 말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함께 잘 살아야지. 그게 재미난 삶인겨.”라고, 그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군가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치유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떠나온 삶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들 곁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동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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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4.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하느님 권능으로 죄의 용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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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2024-07-03 ㅣNo.173903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것을 알게 해 주겠다.” 그리고는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대부분 병이 들면 ‘내가 평소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가?’라며 자책한다. 믿는 이는 때로는 자신이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도 할게다. 그리고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세월도 보내리라.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당신 앞으로 데려오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용서받았다는 건 하느님과 끊어진 끈이 다시 연결되었다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집으로 가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 모독하셨다는 율법 학자들의 비난이 근거가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죄의식으로 ‘족쇄에 묶여 있던 병자’를 자유롭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로 완전한 자유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중풍 병자의 육체적인 치유보다 죄의 용서에 더 관심이셨다. 그에게 생명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건 육체적 질병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예수님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이다. 중풍 병자가 걷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된 걸 드러낸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건강함과 편안함을 그분께 청하면서도 정작 예수님께서 가장 큰 관심으로 바라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는지? 우리는 삶속에서 회개로 죄를 용서받아 그분의 구원을 얻어야 할 게다. ‘사람의 아들이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새기면서. 사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불편한 것은 없다.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하려는 것은 건강과 더불어 마음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병이 죄의 결과라고 여겼던 그들에게 치유는 하느님 자비임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예수님 권능을 무시하는 위선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의당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자신들의 생각의 틀에 가두어 두려던 그들 앞에서, 죄를 용서하는 행위가 삶 전체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는 예수님의 치유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능력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고통만을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화해하여,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담기기도 하지만, 악의 권세를 퍼뜨리는 쓸모없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자. 참된 치유는 육체적 치유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까지 바꿀 수 있는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일 게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려할 때, 그를 살리시는 하느님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임을 늘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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