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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스크랩 제주 4.3 항쟁- 제주 인구 10%가 죽은 대참사,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은하수비 추천 4 조회 504 14.04.04 08:13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 4.3 희생자 위패봉안소의 모습이다. 4.3 당시 희생자 14.000여 기가 봉안되어 있다. 

 

 

 

   하여간 그 엄청난 수의 위패의 모습에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제주 3.1 발포사건 - 제주 4.3항쟁의 시발점  

 

1947년 3월 1일 제주.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위에 3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행사를 마치고 난 뒤 군중은 가두시위를 했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했던 응원 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오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제주 4.3 연구소에서는 6명 사망, 8명 중경상이라 함)이 중경상을 입었다.  

 

힘없는 군중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발포를 하였는지.. 위협만 주었어도 흩어지는 군중들이었건만. 

 

더욱 놀랍게 한 건 병원의 검시 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났다고 한다.  

 

 

이에 민심이 들끓었고, 경찰은 그날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저녁 7시~다음날 오전 6시).  

 

3월 2일부터 3.1행사위원회 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하기 시작했다. 

 

2일 하루동안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구타와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경찰 책임자의 발포 정당성을 강변하는 담화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파업에는 제주소속 경찰도 동참했다고 한다(제주경찰의 20%정도). 

 

66명의 제주경찰관이 파면되었고, 

 

충원은 서북청년회(함북과 황해, 평북출신의 극우청년단체로 상당수가 친일 악질자본가와 지주와 친일부역자로 

 

이북에서 진행된 인민재판을 피해 월남한 청년들이었다.) 소속 단원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다음해(1948년)에 일어났던 너무나 비극적인 제주 4.3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경찰이 사과하고 수습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경찰들과 배후의 미군정은 사건을 더욱 더 키우고 말았던 것이었다.    

 

 

 

 

1947년 제주 3.1 발포 주요 일지 

 

* 3.1 - 제주민전 주최 제28주년 3·1절 기념식 개최. 

 

응원경찰의 발포로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주민 6명 사망, 8명 중경상을 당하는 ‘3·1사건’ 발생 

 

* 3.5 -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투쟁위원회’ 결성 

 

* 3.7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각 읍·면위원회에 ‘3·1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 지령서 하달 

 

* 3.8 - 3·1사건 조사를 위해 미군정청·주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 내도 

 

* 3.10 -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 돌입.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에서 파업에 가세 

 

* 3.12 - 경무부 최경진 차장, 제주파업 사태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 

 

* 3.14 -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파업진상 조사차 내도. 포고문 발표, 

 

우도 민청원들, 우도경찰관파견소 간판을 파괴하고 소각  

 

박경훈 제주도지사, 스타우드 제주도 군정장관에게 사직서 제출 

 

* 3.15 - 전남경찰 122명, 전북경찰 100명 등 응원경찰 222명 제주도 도착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 하달  

 

* 3.16 - 제주경찰감찰청내에 본토 출신 경관들을 중심으로 특별수사과(과장 이호) 설치. 

 

파업 직장의 간부급 연행하여 취조 

 

* 3.17 - 중문지서 응원경찰대,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발포해 주민 8명 부상 

 

* 3.18 - 경기경찰 99명 제주도 도착. 응원경찰 총 421명으로 증가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 “3·1사건으로 검속된 사람은 200명 가량”이라고 발표 

 

* 3.20 - 조병옥 경무부장, 3·1사건 진상조사 담화에서 

 

“제1구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도립병원 앞에서의 발포행위는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한다”고 발표 

 

미군정보팀, “제주의 총파업에는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민 70%가 좌익단체 동조자”라고 보고 

 

* 3.28 - 경무부, “파업선동자 전국에서 2,176명 검거, 제주는 230명”이라고 발표 

 

* 4.1 -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사건에 가담한 제주 경찰관 66명에 대해 징계파면했다고 발표 

 

* 4.10 - 제주도지사에 전북출신 유해진 발령 

 

제주경찰감찰청, 파업 검속자는 500명에 이르며 이중 260명을 군정재판에 회부했다고 발표 

 

* 5.6 - 제주검찰청, “경찰감찰청으로부터 송치된 3·1사건 피고는 328명”이라고 발표  

 

* 5.23 - 3·1사건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한 공판 완결. 

 

체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형 56명,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 

 

 

 

 

 

 

 

 

제주 4.3 항쟁 - 1.제주 인구의 10%가 죽은 대참사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제주 4.3항쟁은 30여만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 심지어 '8만명 희생설'까지 나왔다. 

 

3만명이라고 해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골수 빨갱이라 하더라도, 어이하여 3만명이 희생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아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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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으로 인해 희생된 제주시민의 유골들

 

 

이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1년간 일어난 일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47년 3.1사건 이후 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동안 2천500명이 검속되었다.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가로 3미터 세로 3.6미터의 감방 하나에 35명이 갇혀 있어야 했다. 

 

3.1사건 이후 지역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하였는데, 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47년 9월부터 우익 청년단체의 조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서청) 제주 조직이 발족되었으며,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 단부도 창립되었다.

 

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되었다. 

 

 

죽은 청년들과 같이 수감되었던 청년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에서는 매질부터 시작했다. 주로 몽둥이로 때리거나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워 위에서 밟기도 하고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이 더욱 울분을 느꼈던 것은 

 

경찰관들이 심심하면 한 사람씩 불러내 장난삼아 고문을 했던 일이다..... 

 

경찰관들이 형님의 머리카락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결국 불알이 상해 숨지게 됐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6~108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2.평화협상을 깬 '오라리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미 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공격 대상은 경비대나 미군이 아닌, 경찰과 우익단체였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 등 

 

우익 청년단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원성(怨聲)을 산 서청(서북청년단)이 주요 공격 목표였다. 

 

그리하여 유격대를 결성하였는데, 3월 28일 현재 8개 읍면에 걸쳐 모두 320명이 편성되었다. 

 

이들이 확보한 무기는 겨우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에 대한 도문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 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출동에 주저하였다. 

 

경찰은 경비대가 사태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자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스스로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후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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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공식기록 문서들이다.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부터였다.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4월 28일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두 사람은 네 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과 같은 3개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둘째,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셋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 

 

또한 귀순자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평하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총격을 가한 자들은 경찰로 드러났다. 

 

경비대의 취조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오라리 사건에 대해선 미국이 그 배후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국 촬영반에 의해 공중과 땅에서 모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 기록영화는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 편집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8~110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6.미군이 제안한 '초토화 작전'

 

앞서 지적했듯이, 4.3항쟁에 대한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하면서 민중을 '사냥' 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 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 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였다. 

 

이 기간 중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8월 24일 한미(韓美) 사이에 맺어진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 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큰 변화가 있었으니 그 이전에 벌어진 학살극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달라지긴 했다. 학살은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핵심은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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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토벌대는 이 또래의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 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군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4.3 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 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 수행 후 미국행 알선과 10만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 고 밝혔다.

 

 

김익렬의 밑에서 9연대 정보참모로 일했던 이윤락도 

 

"CIC(방첩대)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바로 이 초토화 작전이 5개월 만에 실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10월 19일에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5여단장으로서 제주도 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대령 김상겸이 

 

5여단 예하부대인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파면되었다. 

 

그래서 송요찬이 제주도 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12월 31일에 해제되지만, 선포부터가 불법이었다. 

 

이 당시 군내엔 계엄법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제주는 법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초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아니 '인간 사냥' 이었다. 무슨 항거를 해야 '진압' 이 아닌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5~197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8.토벌대의 집단 광기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도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김종민은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G-2 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 주둔 9연대는 12월 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 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12월 말 제주 주둔 토벌대가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열세 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의 48년 9월 15일자 중앙 신문들에 보도된 이후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으며,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정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는데, 

 

누가 감히 목숨 걸고 제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에 상세히 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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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4.3사건지원사업소가 발굴한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3구

 

 

사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뺨 때리게 하기'는 오라리 방화사건 때 벌어진 일이었는데, 

 

고은은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 담배꽁초를 던졌다 / 침 뱉었다 / 오라리 마을 

 

/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 할아버지 때귀 갈겨봐 

 

/ 손자는 불응했다 /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 세게 때려 이 새끼야/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세게 찼다 

 

/ 영감 손자 때려봐 /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 세게 쳐 / 세게 쳤다 /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 빨갱이 할아버지가 / 빨갱이 손자를 치고 /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 그 뒤 총소리가 났다 / 할아버지 임차순과 / 손자 임경표 / 더 이상 

 

/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 총소리 뒤 /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0~202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10.사살연습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도 끔찍했다.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북촌리를 통과하다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30~300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300여채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든 사건이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쳔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 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사격으로 30대 임산부와 두 살짜리 젖먹이를 안은 40대 여인들이 쓰러졌다. 

 

많은 마을 주민들은 젖먹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숨진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민들 가운데는 군경 가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 여겨 

 

필사적으로 달려나가다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지거나 총상을 입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2연대 3대대의 대대장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대대장 차량은 임시로 앰뷸런스를 사용하고 있었어. 

 

날씨가 추워서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6, 7명의 장교들이 앰뷸런스 뒤에서 참모회의를 가졌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어. 

 

'학교 담 위에 대대 병력을 모아놓고 기총사살을 해야 한다', '대대 화기인 박격포를 이용해야 한다' 등 

 

의견이 분분했지. 

 

그때 한 장교가 '군대 들어와서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태반이다. 

 

분대별로 길 건너 옴팡밭(길 아래쪽에 푹 꺼진 밭)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모두 좋다고 했지. 

 

동쪽 줄부터 끌고 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나도 혼이 다 나갔던 것 같애. 

 

고향이 함덕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인척관계도 있을 거고 동창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났어."

 

 

60년 4.19 후 『조선일보』 60년 12월 22일자가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이 기사는 <끔찍한 악몽, 과부(寡婦)의 마을...... 해마다 이맘 땐 집단제사> 라는 제목 아래 

 

"남녀 유권자 비율을 따져보면 거의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진상은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4~205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12."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는다"

 

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있는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때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7~208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13. 4.3의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48년 5.10선거에서 꼭 1년이 지난 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49년 5.10재선거를 치르고 돌아온 경찰대에게 국무총리 이범석은 환영사에서 

 

"제주도의 완전 진압은 비단 대한민국에 대한 큰 충성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방어하는 데 큰 공적이 있는 것"이라고 치하했다.

 

 

『조선중앙일보』 49년 9월 1일자는 

 

"외국 기자들은 이 사태를 가리켜 가장 흥미롭기나 한 듯이 '마셜'과 '몰로토프'의 시험장이니, 미소 각축장이니, 

 

38선의 축쇄판이니 하고 이곳 제주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을 

 

붓끝으로만 이리 왈 저리 왈 한 사실도 있었다"면서, 

 

제주도는 "극동의 반공보루로써 새로운 시험장이 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썼다. 

 

 

미국은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에 어느 정도 개입했던 것일까? 

 

훗날 4.3 진압을 미군 장교가 직접 지휘했다는 미국 측 인사들의 증언도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인간 사냥'을 방조 내지 부추켰다는 점이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박명림은 '상황론'과 '음모론'을 제시했다. 

 

상황론은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 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 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로론은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 기지로써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주도의 군사적 기지로써의 가치에도 주목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말기는 45년에 약 7만명의 병력을 제주도내에 주둔시켰다는 것, 

 

46년 10월 AP통신이 제주도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에 비유했던 것, 

 

47년 이승만의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방언, 49년 대만 총통 장개석의 공군기지 설치 제안, 

 

49년 10월 주한 미대사관 보고서에서 

 

"전략상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제주도"라고 거론한 점이 

 

바로 제주도의 그런 군사전략적인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제주항쟁에 대해 초토작전을 강행한 건 본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유엔에서 겪고 있던 곤경, 즉 한반도 문제 해결을 둘러싼 소련의 비난을 의식했다. 

 

소련은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 폭동사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관계자를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까지 하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을 앞두고 정통성 문제로 번질까 봐 초강경 대응을 원했으니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8~210쪽 그대로 인용

 

 

 

제주 4.3 항쟁 - 14.날조된 딱지와의 투쟁, 기억의 타살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뜻이 어떠했건, 그들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하는 그 순간에도 

 

제주 도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정권이 덧씌운 '빨갱이 섬' 이라는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한수영이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잡는 해병' 이라는 별명을 낳게 만든 것도 '빨갱이 섬' 혹은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 이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 사람들의 생존의지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학살극이 완료된 이후에도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현기영은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 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다."  

 

 

또 현기영은 "역대 독재정권들은 공포정치를 통하여 4.3을 금기의 영역에 묶어놓고, 

 

그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폭력적으로 말살하려고 했었다"며, 

 

"비참한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말살하는 정치를 '망각의 정치'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억의 타살행위는 반세기 동안 도민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도민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 없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기억을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간의 내통이 철저히 봉쇄되고 말았으니, 

 

살아남은 자 역시 살아 있되 기억이 타살당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제민일보』 기자 김종민이 1988년 봄 생존자의 증언 채록에 나섰을 때의 경험담이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막았다. 

 

'이 하르방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 고. ...... 

 

 

반발심도 '적당하게'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렸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0~212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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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4.04 08:15

    첫댓글 작년에 스크립해서 올렸던 글을 다시한번 올립니다 .

  • 작성자 14.04.04 08:16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시고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희생자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

  • 작성자 14.04.04 19:53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저리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해서 죽일수 있는지 ...
    치가 떨리는 사건입니다 .

    학살의 원흉
    미 제국주의와 이승만과 서북청년단 ...!
    잊어서는 안돨것입니다 .

  • 14.04.04 08:22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막기 위한 4.3제주폭동사건의 주동자는 남로당 소속의 김달삼이였다. 김달삼은 4.3폭동이 실패로 돌아 가자 월북하여 김일성으로부터 국가훈장을 받고 6.25남침전쟁 때도 게릴라전을 지휘하다 사망하여 현재 북한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 김일성.박헌영의 허수아비 김달삼의 무장폭동으로 인하여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하였다. 헛수고와 토사구팽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종북좌익세력의 날조선동과 무장폭동을 사전에 진압해야 하는 이유다.한반도의 이념대결의 해소는 간단하다. 세습독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다. 8천만 민족은 마땅히 인류보편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편에 선다.

  • 작성자 14.04.04 08:32

    나는 나였다님...아니 늘 닉네임 바꾸는 윤ㅇㅇ님
    이건 좀 아닌것 같네요 .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가 된 나라입니다 .
    작통권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자주독립국일까요 ?!

    말 그대로 아무리 종북이라고 할찌라도
    무고한 양민을 저리도 잔혹하게 학살한 범죄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



  • 14.04.04 08:47

    김달삼? 남로당의 제주도당은 대대적인 작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모조리 제주도에 피해고 애꿋은 양민들만 희생 되어다 11세9세7세의 어린이가 빵갱 이라서 죽이고 또 처녀들은 진압대에게 몸 안 주면 빨갱 이라고 죽이고 몸 주면 살려 주고 그것이 사건의 진실이다

  • 작성자 14.04.04 08:30

    우리는 이 카페에서 늘 부르짓는것이 홍익인간의 이념입니다 .
    그런데 자신과 이념이 다르면
    임산부도
    어린아이도
    연로하신 어르신들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죽이면 되는가요 ?!

    자신의 친척이나 가족이 죽지 않았다고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요 .

  • 작성자 14.04.04 08:31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

    그 어떠한
    사상보다
    이념보다
    종교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 귀하디 귀한 것입니다 .

  • 작성자 14.04.04 09:25

    @서울사나이 님...!

    저 화상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 치면
    제주도 앞바다에서 석고대죄를 천번을 해도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인생이 불쌍하잖아요 .

    바다에 던지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 14.04.04 13:49

    처음보는 글 입니다. 참 서글픈 일 입니다. 남로당은 박정희가 지휘했던 것이 아닌가요? 후에 자기부하를 밀고하고 살아남은....! 그리고 한국에서 쿠테타 일으키고 유신인가 뭔가하는 종신 왕이 되려했던....!하긴 죽을때 자기 심복에게 총맞으며 버러지 같은놈 이라고 욕얻어 처먹은 일이 생각 나네요! 그런데도 숭배하는 놈들이 있는것이 우리나라 아닌가요? 뽀켜니가 개소리하며 숭상하는자지요! 사람은 죽을때가 가장 그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있다고 하지요!!

  • 작성자 14.04.04 23:36

    은하 2님~
    4.3 의 진실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이 되지않고 억울하게 매장되어 버렸습니다 .
    언젠가 이 나라에 자주통일이 온다면
    그때는 모든 왜곡되었던 진실이 규명될것입니다 .

    진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바치신 많은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그 주변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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