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미소
- 문하 정영인 수필
오늘 친구와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평소에 그를 영혼이 맑은 친구라고 늘 생각 했다. 벌써 70줄의 늘그막이지만 친구의 말과 행동은 나를 포근하고 따뜻한 심연(深淵) 속으로 빠지게 한다.
친구는 막걸리가 두어 순배 돌아가자 생게망게 나에게 묻는다. ‘황소의 미소’를 본 일이 있냐고. 그것도 암소의 미소가 아니라 황소의 미소란다. 시골구석에서 자란 나도 암소의 미소가 아닌 황소의 미소를 본 일이 있었는지 아스라한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뒤척이게 한다. 정지용의 ‘향수’ 한 자락을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읊조린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웃는 풍경을 상상해 보란다. 그것도 저쪽에는 암소 한 마리가 유유히 풀을 뜯고, 암소를 바라보는 황소의 가볍게 추켜올린 웃 입술과 살짝 보인 이빨이 보이는 소리 없는 황소의 웃음을 본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주인이 엉덩짝을 지겟작대기로 후려쳐도,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도 바윗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머리를 하늘 향해 살짝 든 그런 황소를 말이다. 거기다가 요지부동의 자세로 은은하게 울려 퍼진지는 워낭소리와 파란 하늘이 잠긴 커다란 눈망울 속을 들여다보면 마치 자기의 영혼이 깊은 바다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한다.
그 친구는 뭐라고 딱 잡아 표현할 수 없는 황소의 미소에서 미륵반가야상, 마애불, 하회탈의 원천이라고 비상(飛翔)을 한다. 확실히 그런 미소들은 뭐라고 딱 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영혼들을 행복으로 잦아들게 하는 맑은 영혼의 미소이다. 금세기 최고의 미소라는 일본의 미륵반가야상의 미소, 해거름의 가을 석양 벌판에서 한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쭈굴쭈굴한 촌로(村老)의 미소, 석양의 어느 산속 마애불의 오묘한 미소와 견주고, 그 미소의 원천이 황소의 미소라 한다.
이 친구는 자연을 참따랗게 좋아하고 사랑한다. 서서히 갈마드는 계절의 변화를 잔잔하게 빠뜨리지 않고 눈여겨본다. 특히 동물 중에서 개를 미치도록 좋아한다.
이 친구의 위대한 어록 중에 “동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착한 사람만 있지 악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을 한다. 친구가 애지중지 기르는 미니츄어 슈나우드라는 개의 이름은 ‘몽실이’이다. 그저 말끝마다 ‘우리 몽실이 우리 몽실이’ 한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몽실이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몽실아, 잘 잤어?” 하면서 정이 담뿍 담긴 대화를 한다.
이 친구를 몽실이를 데리고 거의 날마다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순전히 몽실이 운동을 시키기 위해서 나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친구가 몽실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는 3가지를 준비해서 나간다. 차곡차곡 접은 휴지 세 뭉치, 비닐봉지, 그리고 부인 몰래 퍼가는 쌀 한 줌이다. 휴지 세 뭉치는 몽실이가 실례한 변과 오줌을 처리할 밑씻개용이고, 쌀 한 줌은 배가 고파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뿌려줄 모이이다. 이 친구는 이런 짓거리를 매일 하다시피 한다. 그는 겨울철에 굶주리는 참새들을 위해서 쌀 한 줌을 아침마다 몰래 퍼 나르는 것이다.
그는 버스를 타고가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그냥 지나쳐 보지 않는다. 유심히 살펴보면 너무나 배울 점이 많고 그들도 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만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찮은 꽃 한 송이 속에도 모든 즐거움과 재주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처럼 말이다.
길가에 버려진 한 조작의 빵도 그에게는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다 굶주린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버려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태어나면서 잘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자주 해봐야 하고 자꾸 연습을 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마디 유식한 체 거들었다. “인간은 연습하고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니까.”
그러면서 우리 둘이는 제대로 얼큰해졌다. 텁텁한 우리 쌀 막걸리와 친구의 구수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와 버무려져 심오한 철학으로 발효가 된다.
친구는 같이 한잔해서 참으로 고맙다고 하면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서로의 배려가 무척 중요시 여기고 것이 자기의 개똥철학이라 한다. 어디 심오한 철학이 따로 있겠는가. 티끌이나 먼지 하나에서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지에 이르면 그게 진솔한 삶의 철학일 게다. 하긴 철학이란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학문이 아닐까.
그러면서 친구는 두 번째 어록을 막걸리 한 잔 맛있게 쭈욱 들이키고 토해 놓는다.
“나는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즐거워진다면 그 이상 더 행복할 수 없다.”
우리 친구 중에 몸이 아주 불편하게 아픈 친구가 있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녀야 한다. 친구는 가끔 아픈 친구를 서울 병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온다. 물론 그렇게 하는 다른 친구들 몇이 있지만….어찌 보면 형제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솔선해서 친구를 돌봐준다. 이런 것이 그 친구가 가진 기쁨이라는 배려 철학의 밑기둥이다. 지난 월드컵 때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이상하게 느낀 점은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문을 잡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엊그제 이 친구가 무릎을 다쳐 절뚝거리며 다닌다. 다른 친구가 기르는 토끼가 죽어서 그 시체를 묻어주려다 그랬다. 꽁꽁 언 산속의 땅을 파서 고이 묻어주고 막걸리 한잔 붓고서 내려오다가 눈길에 발을 헛디뎌 부상을 당했다.
가만히 앞에 앉은 친구를 본다. 머리는 2/3나 벗겨져 가고, 머리칼은 반백이 훨씬 넘은지 오래다. 황소의 웃음에서 무상의 행복을 느끼고, 남에게 뭔가 기쁘게 해줄 때 행복을 느끼며, 슬그머니 쌀 한 줌 퍼 다가 굶주린 새에게 던져주는, 죽은 토끼 장례식을 치러주다가 다리를 다친, 아픈 친구에게 차 봉사를 하고, 이주민 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미치도록 좋아서 죽겠다는 이 친구의 얼굴에서 나는 황소의 미소를 보게 된다.
산부처가 따로 있겠는가. 그 누군가에게 마중물 같은 존재 같은 친구! 내일 친구들 모임을 그 아픈 친구 집 근처에서 한단다.
딱 한 병만 더하자고 조른다. 황소 같은 웃음으로 나를 유혹하면서…. 나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어느덧 해설피 게으른 해의 울음도 울고, 우리 인생을 오늘도 취해만 간다. 마지막 잔의 건배는 내가 제의했다.
“야, 우리 귀로도 맛보기 위해서 잔을 기쁘게 부딪치자!”
영혼이 맑은 친구와 한잔하니 맑게 취해오는 것만 같다.
밖에 나오니, 진눈깨비가 속절없이 해거름을 가리고 있었다.
첫댓글 제가 살아보니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통 정이 많고 악한 사람이 없어요.
영혼이 맑은 친구와 마주하면
제 영혼도 맑아질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