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루 키니(Andrew Kinney) 대령이 공화국 여군관 김성자의 손에 키스했을 때는 순전히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였다. 천년의 고도(古都) 개성(開城)의 잘 보존된 한옥 지붕위로 붉은 노을이 타고 있었다. 늙은 용린(龍鱗)을 두른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병풍처럼 서 있는 아늑한 산 능선에 비스듬히 기운 무인석(武人石)이 알 수 없는 왕릉을 향해 시립(侍立)해 있는 것 또한 고난을 오래 참고 견뎌온 한국민의 저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치열했던 일 년간의 전흔(戰痕)은 보이지 않았고 대령이 직접 몰고 온 잠자리 같은 작은 헬기가 고즈넉이 논바닥에 앉아 있는 주변에 닭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쪼고 있었다.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대령님!”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김성자는 삐딱하게 눌러쓴 여군 빵모자를 고치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지만 잘생긴 미국인의 손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인들 몰래하는 비밀 데이트였다. 동경의 합동 전략 기획 및 작전 그룹(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ations Group) 사무실을 무거운 마음으로 나와 한국으로 출발할 때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장마로 물안개가 가득한 대구에서 며칠을 보내면서도 비행에 방해되는 나쁜 기상보다도 주어진 임무가 더 걱정이었다. 그런데, 살벌한 무풍지대 개성에서 이런 미인을 만나다니!
최초의 휴전 이야기를 꺼낸 미모의 인민군 여군대위 김성자와 미 공군대령 키니가 개성의 외곽에서 다정한 말씨를 나눈 51년 7월 8일 밤, 대구의 전쟁지도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제는 더 이상 바보취급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제 강력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육군 정보처의 주요 장교들이 대구의 중국집에 소집되어 긴박한 목소리로 ‘어른의 밀지’를 돌려 읽었다.
“ xxxx ”
“시작은 그들 마음대로 했으나 끝은 우리 뜻대로 할 것이다.”
분하고 억울했다. 휴전이라니! 누구 맘대로!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아닌가? 북진통일의 성업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북한지역에는 이제 완전한 첩보망을 구성하고 있고 인민이 지지하지 않은 인민공화국을 뒤집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었다. 북한 인민의 공화국에 대한 선의적 해석은 5년으로 족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7할의 주민이 월남하여 마을과 도시는 텅 비었다. 이런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북한 내에 거의 모든 주민이 협조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제 2 전선의 형성은 손쉬운 일이었다. 사실, 서해안에서의 빨치산 게릴라전은 전술적 정의로 제 2 전선 구축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3면의 바다에서 제해권을 모두 가진 유엔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안전한 병참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부대를 기동시킨 것은 일종의 외선 전략과 같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민군과 중공군은 서해안 지역과 전선의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십오만의 병력을 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것은 적의 노력을 분산시키는데 주안을 둔 게릴라전의 백미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겠다니 기가 막혔다.
도대체 유엔사의 속 셈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밀 속에서 북한에 전략적 골칫거리를 안겨줌으로써 100일간의 약속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구름과 같은 기세를 적이 언제나 상기 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었지 않은가? 첩보전과 유격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므로 하나을 유기하면 다른 하나는 금방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특히 제한전쟁인 한국전쟁의 특성에서 정략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공작과 모략첩보를 이용하여 같이 피를 흘리고 싸운 아군을 제거한 사건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구월부대 항명사건-동키 2의 제거”와 “대화도 폭격사건-동키 15의 제거”이다. 반공 빨치산 중 가장 강력한 두 개의 부대, 황해도의 D-2와 평북의 D-15는 통탄스럽고 억울하게도 아군의 배신의 손에 괴멸되어 천추의 한을 품은 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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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당국은 먼저 가장 숫자가 많고 내부에 복잡한 세력관계를 가진 구월부대를 주목했다. 지난 5월(1951년) 초도에서 쫓겨나 육본으로 돌아 온 김종벽 대위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미 8군 기타업무부서 특수전과에서는 그가 “키니-김성자 데이트”의 다음 날인 7월 9일 새벽 부지런히 석도로 내려와 뱃몰의 해안가에서 과거 자신의 병력을 규합하고 있는 것을 인지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날 역시 게릴라전을 책임졌던 멕지 대령은 CIA의 밴더풀 대령으로 교체되었다. 밴더풀은 동경의 제일생명 빌딩 2층에 앉아 38 이북의 소란한 일을 애초에 기획한 인물이었다. 이제 멕지로부터 일을 받아 마무리 지을 단계가 온 것이었다. 전쟁은 다시 게임의 룰로 넘어 갔다.
이승만은 휴전이라는 말에 격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한국군 정보부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한국군 자체의 공세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는 보고는 이 게임이 정해진 룰 없이 하늘의 뜻으로 간다는 의미였다. 배후가 없는 전쟁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군복을 입은 그는 알고 있었다. 정규전은 주요전선에서 지루한 고지 쟁탈전을 계속하면서 피로가 쌓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벌려놓은 게릴라전과 심어놓은 방대한 첩보망을 어떻게 매듭지을 것이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수습하지 못해 서로 책임을 미루기 전에, 비밀 소각장에서 서류를 태우듯 그대로 폐기할 수 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다고 누구하나 함부로 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휴전이라는 말이 신문지상에 오르면서 켈로의 존재가 공공연히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다. 미 측은 이것이 한국 측에서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급기야는 잭슨 팀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미군측은 이 팀이 7월초에 구성된 대한군사원조를 위한 기구라고 얼버무렸다.
이제 휴전의 성사를 위해서 게릴라들과 첩보기구들의 처리는 긴박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현 전선에서 서해지구 빨치산들이 이룩한 도서 지역의 해방구를 모두 포기하고 38 이남으로 철수 한다는 것은 전략적 자살이며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것이 이기려고 한 전쟁이었는가? 예상대로 1951년 7월 10일에 공개된 휴전에 관한 논의는 빨치산 작전에 절대적인 차질을 안겨 주었다. 고향에 돌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상실한 북한 빨치산들은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미군 당국의 고민은 내륙에 제 2 전선 구축이 이제는 불가능해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중간지대의 세력과 같은 이들 북한 출신 빨치산을 처리하는 일이 그들의 과업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숙제는 이미 준비된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김종벽은 석도의 옛 동지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후임으로 동키 2를 지휘했던 이도일은 미군의 작전지시의 일부를 마지못해 이행하여 석도와 초도에 몰려 있던 빨치산들의 건제를 유지하고 일부 부대를 재배치했으나 빨치산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지난 3월 구월산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거부한 후 쌀의 급식 등 보급 수준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피난 나온 많은 사람들이 ‘먹는 문제’의 해결 때문에 동키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육지에 나가봐야 험악한 전쟁 중 별 뾰족한 생계수단이 없었고 오히려 국방군에 재 징집되어 소모적인 일선에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향에서 적에게 잡히면 자신의 얼굴을 증거 하는 사람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고, 남한에 투신하면 전쟁의 제물이 될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말 잘 안 듣는 당나귀가 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미 적지역이 되어 있는 고향에서 분단의 반대쪽을 섬멸시키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복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그러나 김종벽이 나타나 휴전이라는 말을 꺼내자, 빨치산 동키 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제 저하된 사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휴전으로 인한 실향(失鄕)이 자리 잡았다. 스스로의 운명이 용도폐기인 것도 감지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구월산은 까맣게 멀어져 보였다. 김종벽의 출현을 알게 된 백령도의 서해지구 게릴라 사령관 버크(William Burk) 중령은 그가 즉시 섬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미군측은 그가 휴전회담에 반대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한국군 채널의 모종의 지시를 받고 왔을 거라고 의심했다. 버크는 석도의 베이어 대위에게 그의 추방을 확인하도록 했다. 그 날 아침 김종벽은 빨치산들과 같이 해상관측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섬 북사면의 천년 묵은 거대한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그와 면담을 요청한 베이어(Beyer, Joe)대위와 프로스트(Frost, Hubert H.)중사 등의 미 고문관들과의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이 섬으로 피난 온 나의 부모님을 모셔가기 위한 것이오. 선박이 준비되는 대로 곧 떠나겠소.”
그러나 버크는 그가 즉시 섬을 떠나도록 재차 재촉했다. 말을 듣지 않자 한국군 헌병이 체포에 나섰다. 파견 나온 헌병 지(池) 중위 일행이 그를 연행하려 하자 이를 막고 700 여명의 빨치산이 김종벽을 에워쌌다. 곧 무장 충돌이 일어날 판이었다. 김종벽의 아내이며 동지인 이정숙이 앞으로 나서서 긴박한 순간을 저지했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죽고 같이 삽시다.”
김종벽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에게도 혼란스런 이 눈물은 진정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빨치산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휴전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게릴라 작전의 양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해안선의 습격 및 파괴와 같은 제 1 전선의 성격에서 벗어나, 내륙에 들어가 은밀한 활동을 하도록 하는 작전요구가 하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구월산과 멸악산맥 지역은 게릴라 활동이 어렵도록 적의 후방지역 경계부대가 대침투 작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익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났던 안악과 신천 지역에서의 주민의 협조는 전혀 기대 할 수 없었다. 버크는 불만이었다. 당나귀들이 돌려야 할 맷돌에 이끼가 끼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이라는 게릴라 활동의 동기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상황에서 이 맷돌을 돌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1년 여름부터 서해 각 도서에 퍼져 있는 게릴라에 대한 주요 작전명령은 현 위수지역을 이탈하지 않고 섬의 경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키 들이 지키는 안전한 섬을 공작기지로 켈로와 잭 팀, 기타 특수 레인저들이 자신들의 용기와 행운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종벽의 동키 2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서해지구 미군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거의 무모하다고 생각될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러분, 이제 우리 애국청년들은 자주(自主), 자조(自助)의 힘으로 싸웁시다.”
과연, 그가 말한 대로 이와 같은 사상적 지주 때문이었을까? 그는 52년 초 박창암 대령과 같이 하와이에서 특수전 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혜택을 누렸다. 그가 반미적 성향이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 했을까? 그는 미 고문관들과 인간적 유대관계도 깊었고 누구보다도 미군의 군사 시스템과 그 합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군 소속으로서 한국군 정보부서 내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한국군 전쟁 지도부 최상층에서 미군과 합의된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빨치산 모두가 휴전의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는 운명에서 닥쳐 올 가혹한 사태를 예감해서 인가?
할 수 없이 물러간 헌병들을 뒤로하고 구월산 빨치산들은 일종의 승리감을 느끼며 오락 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바다 건너 구월산 위로 빨간 반달이 떠올랐다. 장마 비가 오락가락하며 흐트러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밀려오는 깊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즉시로 미군의 보급은 끊어졌고 버틸 수 있는 식량은 열흘 분 정도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섬 안에는 이제 먹을 것이 없었다. 버크는 만약 그들이 구월산으로 들어가면 보급품을 공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이 복받쳤다. 굶주림에 지친 빨치산들의 귀에 풍요로운 신미도 소문이 들려 왔다. 그리고 대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KLO 고트 부대장 이지녕의 충고도 작용했다. 그것은 매우 은밀한 힘, 어떤 자유감에 대한 유혹이기도 했다. 이지녕은 김응수의 제왕적 태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획득된 정보나 전과(戰果)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장사군 같은 사람이었다. 또한 평북지역의 용맹한 기질로 뭉쳐진 이 ‘애도부대’(동키 15)를 질시감(嫉視感)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구월의 사람들은 자주자조의 힘을 그 섬에서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을 들었다.
7월 21일 밤 수습회의가 열렸다. 굶주림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 섬을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7백 여 명의 빨치산 중 지리산 공비토벌대의 일부 등 의견이 엇갈린 사람들은 남하하여 육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지녕의 도움으로 커다란 하시끼(荷引) 범선 두 척이 마련되어 탈출은 22일 밤으로 정했으나 휴전 소식을 듣고 비관한 김종벽 부친의 음독자살 사건으로 하루가 연기 되었다. 23일 새벽, 어둠 속에 ‘모틀구미’ 해변에 집결한 인원은 주로 신천, 안악, 재령지역 출신이었다. 미군의 화기로 중무장한 이들은 소리 없이 석도를 빠져 나가 여명의 바다를 항해했다. 나누어 탄 두 척 범선은 남풍을 받고 순항했다. 그러나 황혼 무렵에는 바람이 거세 파도가 높아졌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하루 종일 받고 달아 오른 화기(火器)들이 배위에 뒹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무기보다는 쌀이 어른거렸다. 자정 무렵에 배는 하취라도(下吹螺島)에 다다라 정박했다. 7월 24일 하루 종일 섬에 지내며 병력을 재편하니 모두 340명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이 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우연인지, 동력선을 타고 보급을 싣고 대화도로 북상하던 이지녕이 하취라도에 기항했다.
“우리 배로 끌어 줄 테니 빨리 갑시다.”
이지녕의 호의가 고마웠다. 동력선에 견인된 두 대의 돛배를 나누어 타고 그들이 대화도에 도달한 것은 이틀간의 거친 항해 끝에 기진한 7월 25일 오후 3시 경이었다.
김응수(동키 15부대장)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전에 황해도 월사리에서 합동작전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들이 백령도 표(豹)부대의 명으로 작전에 투입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전에 초도와 석도에서 겪었던 김종벽으로부터의 모욕감이 되살아나 김응수는 차가운 태도로 구월부대를 맞았다. 그의 눈에 이들이 타고 온 배가 보였다. 이지녕의 켈로 부대 배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화가 치밀었다.
“어찌된 일이오?”
“우리를 도와준다고 약속해 주시오.”
“무엇을? 이 섬은 300 여명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소.”
“쌀을 좀 주시오. 한 일 주일분이라도......., 신미도에서 만 섬 이상의 쌀을 현물세 창고에서 노획했다는 말을 들었소.”
“전에도 쌀을 40 여 섬이나 드렸는데.......”
“언제?”
“구월부대 감찰참모인 박생년이 말 안하던가요?”
“내가 없던 사이라서.......”
김응수는 말을 끊었다. 자신과 함께 G-2로 온 부관인 장치경과 김대성을 인천에 보내 쌀을 팔아 물건을 조달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배달사고’로 이야기가 번지지 말아야 했다. 그는 병력을 연병장에 들이고 밥을 먹였다. 그 때 백령도의 버크로부터 전문이 날아왔다.
『구월부대는 위수지역을 이탈하여 집단 탈영했다....... 그들의 대화도 도착여부를 알려라.』
그리고는 이어서 전문이 계속 들어왔다. 신속히 이들을 무장해제해서 포획하지 않으면 동키 15도 같은 반란집단으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할 시간적 여유 없이 다시 무지막지한 전문이 도착했다.
『구월부대가 위치한 지점에 폭격을 위한 대공표지를 설치하라. 만일 표지를 설치하지 않으면 무차별 폭격하겠다.』
김응수는 김종벽에게 남하를 종용했다. 그는 버크 사령관이 김종벽과 자신이 짜고 이 일을 도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남하는 불가능하오! 가능하다면 압록강 하구의 신도(薪島)나 신미도(身彌島)에 상륙했으면 하오. 우리는 같은 민족이며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전우가 아니오?”
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최광조가 말했다.
“우리병력도 주변의 가도(?島), 소화도(小和島), 참채도(삼차도) 등에 다 찢어져 있는데, 구월부대가 신미도 앞에 나가 막고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하 지휘자인 유태영은 이에 반대하며,
“이들은 우리보다 좋은 무기를 들었고, 미군의 더 좋은 보급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탈환하려고 싸우고 있는데, 저들도 저들의 고향을 전장으로 해야지 왜 낯 설은 이곳에 와서 지휘체계를 흔들어 놓는 겁니까? 당장 무장해제 해서 내려 보내자 구요.”
버크의 명령이 시행되었다. 다음 날, 김응수의 지휘소로 유인된 구월부대의 간부들은 총을 빼앗기고 포박 당했다. 병력전체를 무력화시키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버크는 전원 포로취급해서 식사도 주지 말고 헌병들이 신병을 인수하러 갈 때까지 감시하라는 전문을 보내왔다. 빨치산들은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전우였으며 동족인 구월부대원의 얼굴에 보이는 멸시와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동키 15는 자신도 아껴 먹던 흰밥을 나누어 주며 그들을 위로 하려 하였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들로부터 우리보다 더 좋은 보급품과 장비를 가지고 더 안전한 위치에서 살던 사람들이 무슨 불만으로 작전지역을 이탈하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투쟁의지는 희박해지고 생존의지는 강해진다는 것을 이번 전쟁의 경험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7월 29일 석도에 있던 한국 해병이 들어와 동력선인 운양호에 간부 10명을 포함한 140명을 싣고, 끌고 온 가축 운반용 전마선에는 173명의 구월부대원을 실었다. 간헐적인 장마비에 섬은 젖어 있었다. 두 손이 포박되어 대화도의 울퉁불퉁한 바위로 된 선창을 걸어 내려가는 김종벽 일행을 평안도 빨치산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동키 15의 일부 대원들은 선창에 도열하여 비를 맞으며 우군의 포로가 된 우군에게 경례를 붙였다. 구월 부대 군악대 17명은 김응수의 재량으로 대화도에 잔류시켰다. 군악대장인 정철은 이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 장연 출신의 학자인 정운경은 언변과 인품이 좋아 잔류를 거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빼어난 미모의 그의 누이 정수경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름이 지나고 닥쳐올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이라는 물속의 그물이 서서히 썰물위로 나타나는 것을 모르는 숭어 꼴이었다.
남풍이 불어오는 바다는 점점 파도가 높아지고 있어 항해가 어려웠다. 대화도의 등대는 아득히 멀어졌다. 등대 빛 같은 섬광이 뚫어진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햇빛과 비가 교대로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뱃사람 출신 빨치산들은 고막에서 느끼는 장력의 긴장감으로 그 해의 첫 태풍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항해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다 사람을 태운 예인선을 끌고 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항해는 강행되었다. 배가 참채도를 지나 납 섬에 이르자 베이어 대위가 탄 쾌속정이 나타나 구월부대의 간부 10명을 태우고 급히 남하했다.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하더니 어떻게 저희만 두고 가십니까?”
운양호와 예인되어 따라 온 가축운반 전마선에 남은 대원들은 흐느꼈다. 쾌속정이 사라진 수평선 너머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G-2와 간부들이 빠져 나가고 없는 구월부대원을 태운 운양호는 거센 풍랑을 뚫고 인천을 향했다. 난바다에서 배의 고물과 이물이 동시에 파도에 들리는 삼각파도가 일어나자 곰 이라는 별명의 기관장은 일단 배를 석도로 돌렸다. 이들을 연행하는 해병들 역시 겁에 질려 있었다. 7월 29일 칠흑 같은 밤 석도 앞에 이른 배는 어떤 이유인지 상륙이 거부되어 지체하고 있었다. 잠시 고요했던 혼돈의 바다에 폭풍이 갑자기 다가와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고 엔진고장을 일으킨 운양호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한밤중 끌고 오던 전마선의 줄이 풀렸다. 173명을 태운 전마선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인당수의 소용돌이 같은 물속의 커다란 입이 이들을 삼켰다. 풍랑이 잠시 가라앉은 7월 30일 아침 운양호는 가까스로 석도에 접안했다. 그러나 전마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소용돌이에 걸려 밤새 맴돌다 석도에서 서북 쪽 가시거리에 있는 덕 섬 풀 수중둔덕에 걸려 좌초 한 후 침몰하고 말았다. 2명이 천우신조로 부유하던 널빤지를 잡고 살아났고 171명 전부는 물속의 원혼이 되어 폭풍 속에서 울부짖었다. 뱃사람들은 석도의 고목을 베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이어가 미리 데려간 10명의 구월산 간부는 백령도에서 C-46 수송기로 여의도로 보내져 작전 기지사령부의 특설영창에 갇혔다. 이상하게도 이들을 아무도 신문하지 않았다. 들이닥쳐야 할 서슬이 퍼런 CIC나 방첩기관도 보이지 않았고 그 특설 영창이라고 하는 것은 백령도에서 휴가 받은 미군이 쉬는 ‘여의도 호텔’이었다. 며칠 후 김종벽은 대구로 보내져 헌병사령부에서 간단한 조사 후 원대 복귀되고, 이정숙은 여경대장 노 마리아라는 사람의 배려로 바로 출감했다. 운양호로 인천항에 도착한 나머지 간부 8명과 130명의 구월산 대원은 기차로 후송되어 8월 13일 거제도 10수용소에서 신문을 받고 61, 62 포로수용소에 인민군들과 같이 수용되었다. 이들이 풀려 난 것은 이듬해인 1952년 815특사로 인해서였다.
1) 김종벽,(1914-2004) 구월부대장, 황해도 장연 생, 전쟁전후의 그의 행보는 인천 상륙 전 비밀작전에 참여한 ‘연정’과 매우 유사하다. 해주와 은율에서 소련군 통역으로 일하다 1946년 8월 월남하여 육사 8기로 임관, 청량리 소재의 육군정보학교에서 2주간 훈련을 받은 후 정보국 첩보과 북한반에 보직되었다. 한국전 발발 후에는 육군본부 정보파견대 4863 부대에 소속 황해도에 파견되어 자신의 고향인 장연지역의 반공 빨치산을 규합, 구월산 부대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차후 미군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후 HID 교육대장을 역임한다. 2) 이정숙(李貞淑) ‘구월산의 여대장’이라고 불린 그녀는 김종벽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었다. 전후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1959년 37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사했다. 3) 켈로의 대화도 파견대장 이지녕이 어떻게, 왜 배를 구월부대에 제공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구월부대 사건 직후 이지녕은 대화도 파견 켈로 고트대장에서 해임되고 그의 동생인 이연길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지녕 또한 얼마 후 전사했다. 이연길씨는 황장엽 망명을 성사시킨 실제 배후 인물이다. 4) “구월산” p 195, 1955, 국방부 정훈국 5) 표부대 W. Able 즉 Section A는 빨치산들에게 동키의 명칭을 부여하고 이들의 상위부대로 백령도에 기지를 둔 모체 부대를 Leopard라고 명명한다. 6) 최광조(1909 - 1951), 동키 15의 실질적 지도자, 평북 정주 출신으로 빨치산 세력을 규합하여 애도 전투에서 1개 중대 규모의 빨치산으로 적 증강된 대대병력을 섬멸하는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1951년 11월 30일 대화도에 중공군 1개 사단이 상륙시 최후까지 저항하다 산화했다. 그의 무훈은 나중에 끼어든 육본 파견 G-2들과 미군들이 가로채어 그 억울한 투혼을 달랠 길이 없다. 7) 빨치산의 식량문제는 항상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미군의 보급기준에는 한사람의 빨치산에 하루 9홉의 쌀이 주어지도록 명시되어 있었으나, 빨치산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쌀은 달러로 환산되어 동남아 지역에서 구매한 ‘알랑미’를 보급토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 부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군 보급계통 전체에 만연한 비리였다. 그리고 당시 대화도까지는 미군의 보급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응수는 신미도에서 노획한 양곡 중 51년 6월 찾아온 구월산부대의 감찰참모인 박생년에게 쌀 25가마, 옥수수 20가마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위 사십 도선 p 179” 그러나 김종벽 “한국의 레지스탕스 p 140”에는 쌀을 받지 못했고, 김응수가 쌀을 팔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1968년 초판의 북위 사십 도선에는 김응수가 이에 대한 반박의 글을 부록으로 올렸으나 그 후 재판되어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일러두기; 이른바 “구월부대 항명사건” 또는 “미군과 동키15의 배신”이라는 이 처참한 사건은 저마다 진실을 보는 눈이 다르다. 필자가 동키 2와 동키 15의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규합했을 때 이 불행한 사건에는 매우 의도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앞으로 기술하게 될 대화도에 대한 소련 공군의 폭격사건과 맞물려 이런 심증을 증폭시킨다. 폭풍이오는 날 배의 접안을 거부한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전마선의 예인줄이 풀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폭풍을 기다렸다가 줄을 끊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이 시기는 공중 침투하는 미군기에서 연속적인 폭발 추락사건이 일어나고 서해상에서 미정보부대원을 태운 배가 폭파되어 십 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때라 한미간의 정보기관의 불신이 팽배한 와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갈등의 배경은 휴전이었을 것이다
엔드루 키니(Andrew Kinney) 대령이 공화국 여군관 김성자의 손에 키스했을 때는 순전히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였다. 천년의 고도(古都) 개성(開城)의 잘 보존된 한옥 지붕위로 붉은 노을이 타고 있었다. 늙은 용린(龍鱗)을 두른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병풍처럼 서 있는 아늑한 산 능선에 비스듬히 기운 무인석(武人石)이 알 수 없는 왕릉을 향해 시립(侍立)해 있는 것 또한 고난을 오래 참고 견뎌온 한국민의 저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치열했던 일 년간의 전흔(戰痕)은 보이지 않았고 대령이 직접 몰고 온 잠자리 같은 작은 헬기가 고즈넉이 논바닥에 앉아 있는 주변에 닭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쪼고 있었다.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대령님!”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김성자는 삐딱하게 눌러쓴 여군 빵모자를 고치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지만 잘생긴 미국인의 손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인들 몰래하는 비밀 데이트였다. 동경의 합동 전략 기획 및 작전 그룹(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ations Group) 사무실을 무거운 마음으로 나와 한국으로 출발할 때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장마로 물안개가 가득한 대구에서 며칠을 보내면서도 비행에 방해되는 나쁜 기상보다도 주어진 임무가 더 걱정이었다. 그런데, 살벌한 무풍지대 개성에서 이런 미인을 만나다니!
최초의 휴전 이야기를 꺼낸 미모의 인민군 여군대위 김성자와 미 공군대령 키니가 개성의 외곽에서 다정한 말씨를 나눈 51년 7월 8일 밤, 대구의 전쟁지도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제는 더 이상 바보취급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제 강력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육군 정보처의 주요 장교들이 대구의 중국집에 소집되어 긴박한 목소리로 ‘어른의 밀지’를 돌려 읽었다.
“ xxxx ”
“시작은 그들 마음대로 했으나 끝은 우리 뜻대로 할 것이다.”
분하고 억울했다. 휴전이라니! 누구 맘대로!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아닌가? 북진통일의 성업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북한지역에는 이제 완전한 첩보망을 구성하고 있고 인민이 지지하지 않은 인민공화국을 뒤집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었다. 북한 인민의 공화국에 대한 선의적 해석은 5년으로 족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7할의 주민이 월남하여 마을과 도시는 텅 비었다. 이런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북한 내에 거의 모든 주민이 협조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제 2 전선의 형성은 손쉬운 일이었다. 사실, 서해안에서의 빨치산 게릴라전은 전술적 정의로 제 2 전선 구축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3면의 바다에서 제해권을 모두 가진 유엔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안전한 병참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부대를 기동시킨 것은 일종의 외선 전략과 같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민군과 중공군은 서해안 지역과 전선의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십오만의 병력을 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것은 적의 노력을 분산시키는데 주안을 둔 게릴라전의 백미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겠다니 기가 막혔다.
도대체 유엔사의 속 셈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밀 속에서 북한에 전략적 골칫거리를 안겨줌으로써 100일간의 약속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구름과 같은 기세를 적이 언제나 상기 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었지 않은가? 첩보전과 유격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므로 하나을 유기하면 다른 하나는 금방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특히 제한전쟁인 한국전쟁의 특성에서 정략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공작과 모략첩보를 이용하여 같이 피를 흘리고 싸운 아군을 제거한 사건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구월부대 항명사건-동키 2의 제거”와 “대화도 폭격사건-동키 15의 제거”이다. 반공 빨치산 중 가장 강력한 두 개의 부대, 황해도의 D-2와 평북의 D-15는 통탄스럽고 억울하게도 아군의 배신의 손에 괴멸되어 천추의 한을 품은 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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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당국은 먼저 가장 숫자가 많고 내부에 복잡한 세력관계를 가진 구월부대를 주목했다. 지난 5월(1951년) 초도에서 쫓겨나 육본으로 돌아 온 김종벽 대위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미 8군 기타업무부서 특수전과에서는 그가 “키니-김성자 데이트”의 다음 날인 7월 9일 새벽 부지런히 석도로 내려와 뱃몰의 해안가에서 과거 자신의 병력을 규합하고 있는 것을 인지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날 역시 게릴라전을 책임졌던 멕지 대령은 CIA의 밴더풀 대령으로 교체되었다. 밴더풀은 동경의 제일생명 빌딩 2층에 앉아 38 이북의 소란한 일을 애초에 기획한 인물이었다. 이제 멕지로부터 일을 받아 마무리 지을 단계가 온 것이었다. 전쟁은 다시 게임의 룰로 넘어 갔다.
이승만은 휴전이라는 말에 격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한국군 정보부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한국군 자체의 공세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는 보고는 이 게임이 정해진 룰 없이 하늘의 뜻으로 간다는 의미였다. 배후가 없는 전쟁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군복을 입은 그는 알고 있었다. 정규전은 주요전선에서 지루한 고지 쟁탈전을 계속하면서 피로가 쌓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벌려놓은 게릴라전과 심어놓은 방대한 첩보망을 어떻게 매듭지을 것이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수습하지 못해 서로 책임을 미루기 전에, 비밀 소각장에서 서류를 태우듯 그대로 폐기할 수 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다고 누구하나 함부로 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휴전이라는 말이 신문지상에 오르면서 켈로의 존재가 공공연히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다. 미 측은 이것이 한국 측에서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급기야는 잭슨 팀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미군측은 이 팀이 7월초에 구성된 대한군사원조를 위한 기구라고 얼버무렸다.
이제 휴전의 성사를 위해서 게릴라들과 첩보기구들의 처리는 긴박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현 전선에서 서해지구 빨치산들이 이룩한 도서 지역의 해방구를 모두 포기하고 38 이남으로 철수 한다는 것은 전략적 자살이며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것이 이기려고 한 전쟁이었는가? 예상대로 1951년 7월 10일에 공개된 휴전에 관한 논의는 빨치산 작전에 절대적인 차질을 안겨 주었다. 고향에 돌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상실한 북한 빨치산들은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미군 당국의 고민은 내륙에 제 2 전선 구축이 이제는 불가능해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중간지대의 세력과 같은 이들 북한 출신 빨치산을 처리하는 일이 그들의 과업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숙제는 이미 준비된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김종벽은 석도의 옛 동지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후임으로 동키 2를 지휘했던 이도일은 미군의 작전지시의 일부를 마지못해 이행하여 석도와 초도에 몰려 있던 빨치산들의 건제를 유지하고 일부 부대를 재배치했으나 빨치산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지난 3월 구월산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거부한 후 쌀의 급식 등 보급 수준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피난 나온 많은 사람들이 ‘먹는 문제’의 해결 때문에 동키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육지에 나가봐야 험악한 전쟁 중 별 뾰족한 생계수단이 없었고 오히려 국방군에 재 징집되어 소모적인 일선에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향에서 적에게 잡히면 자신의 얼굴을 증거 하는 사람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고, 남한에 투신하면 전쟁의 제물이 될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말 잘 안 듣는 당나귀가 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미 적지역이 되어 있는 고향에서 분단의 반대쪽을 섬멸시키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복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그러나 김종벽이 나타나 휴전이라는 말을 꺼내자, 빨치산 동키 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제 저하된 사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휴전으로 인한 실향(失鄕)이 자리 잡았다. 스스로의 운명이 용도폐기인 것도 감지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구월산은 까맣게 멀어져 보였다. 김종벽의 출현을 알게 된 백령도의 서해지구 게릴라 사령관 버크(William Burk) 중령은 그가 즉시 섬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미군측은 그가 휴전회담에 반대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한국군 채널의 모종의 지시를 받고 왔을 거라고 의심했다. 버크는 석도의 베이어 대위에게 그의 추방을 확인하도록 했다. 그 날 아침 김종벽은 빨치산들과 같이 해상관측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섬 북사면의 천년 묵은 거대한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그와 면담을 요청한 베이어(Beyer, Joe)대위와 프로스트(Frost, Hubert H.)중사 등의 미 고문관들과의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이 섬으로 피난 온 나의 부모님을 모셔가기 위한 것이오. 선박이 준비되는 대로 곧 떠나겠소.”
그러나 버크는 그가 즉시 섬을 떠나도록 재차 재촉했다. 말을 듣지 않자 한국군 헌병이 체포에 나섰다. 파견 나온 헌병 지(池) 중위 일행이 그를 연행하려 하자 이를 막고 700 여명의 빨치산이 김종벽을 에워쌌다. 곧 무장 충돌이 일어날 판이었다. 김종벽의 아내이며 동지인 이정숙이 앞으로 나서서 긴박한 순간을 저지했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죽고 같이 삽시다.”
김종벽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에게도 혼란스런 이 눈물은 진정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빨치산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휴전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게릴라 작전의 양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해안선의 습격 및 파괴와 같은 제 1 전선의 성격에서 벗어나, 내륙에 들어가 은밀한 활동을 하도록 하는 작전요구가 하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구월산과 멸악산맥 지역은 게릴라 활동이 어렵도록 적의 후방지역 경계부대가 대침투 작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익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났던 안악과 신천 지역에서의 주민의 협조는 전혀 기대 할 수 없었다. 버크는 불만이었다. 당나귀들이 돌려야 할 맷돌에 이끼가 끼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이라는 게릴라 활동의 동기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상황에서 이 맷돌을 돌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1년 여름부터 서해 각 도서에 퍼져 있는 게릴라에 대한 주요 작전명령은 현 위수지역을 이탈하지 않고 섬의 경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키 들이 지키는 안전한 섬을 공작기지로 켈로와 잭 팀, 기타 특수 레인저들이 자신들의 용기와 행운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종벽의 동키 2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서해지구 미군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거의 무모하다고 생각될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러분, 이제 우리 애국청년들은 자주(自主), 자조(自助)의 힘으로 싸웁시다.”
과연, 그가 말한 대로 이와 같은 사상적 지주 때문이었을까? 그는 52년 초 박창암 대령과 같이 하와이에서 특수전 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혜택을 누렸다. 그가 반미적 성향이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 했을까? 그는 미 고문관들과 인간적 유대관계도 깊었고 누구보다도 미군의 군사 시스템과 그 합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군 소속으로서 한국군 정보부서 내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한국군 전쟁 지도부 최상층에서 미군과 합의된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빨치산 모두가 휴전의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는 운명에서 닥쳐 올 가혹한 사태를 예감해서 인가?
할 수 없이 물러간 헌병들을 뒤로하고 구월산 빨치산들은 일종의 승리감을 느끼며 오락 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바다 건너 구월산 위로 빨간 반달이 떠올랐다. 장마 비가 오락가락하며 흐트러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밀려오는 깊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즉시로 미군의 보급은 끊어졌고 버틸 수 있는 식량은 열흘 분 정도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섬 안에는 이제 먹을 것이 없었다. 버크는 만약 그들이 구월산으로 들어가면 보급품을 공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이 복받쳤다. 굶주림에 지친 빨치산들의 귀에 풍요로운 신미도 소문이 들려 왔다. 그리고 대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KLO 고트 부대장 이지녕의 충고도 작용했다. 그것은 매우 은밀한 힘, 어떤 자유감에 대한 유혹이기도 했다. 이지녕은 김응수의 제왕적 태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획득된 정보나 전과(戰果)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장사군 같은 사람이었다. 또한 평북지역의 용맹한 기질로 뭉쳐진 이 ‘애도부대’(동키 15)를 질시감(嫉視感)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구월의 사람들은 자주자조의 힘을 그 섬에서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을 들었다.
7월 21일 밤 수습회의가 열렸다. 굶주림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 섬을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7백 여 명의 빨치산 중 지리산 공비토벌대의 일부 등 의견이 엇갈린 사람들은 남하하여 육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지녕의 도움으로 커다란 하시끼(荷引) 범선 두 척이 마련되어 탈출은 22일 밤으로 정했으나 휴전 소식을 듣고 비관한 김종벽 부친의 음독자살 사건으로 하루가 연기 되었다. 23일 새벽, 어둠 속에 ‘모틀구미’ 해변에 집결한 인원은 주로 신천, 안악, 재령지역 출신이었다. 미군의 화기로 중무장한 이들은 소리 없이 석도를 빠져 나가 여명의 바다를 항해했다. 나누어 탄 두 척 범선은 남풍을 받고 순항했다. 그러나 황혼 무렵에는 바람이 거세 파도가 높아졌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하루 종일 받고 달아 오른 화기(火器)들이 배위에 뒹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무기보다는 쌀이 어른거렸다. 자정 무렵에 배는 하취라도(下吹螺島)에 다다라 정박했다. 7월 24일 하루 종일 섬에 지내며 병력을 재편하니 모두 340명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이 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우연인지, 동력선을 타고 보급을 싣고 대화도로 북상하던 이지녕이 하취라도에 기항했다.
“우리 배로 끌어 줄 테니 빨리 갑시다.”
이지녕의 호의가 고마웠다. 동력선에 견인된 두 대의 돛배를 나누어 타고 그들이 대화도에 도달한 것은 이틀간의 거친 항해 끝에 기진한 7월 25일 오후 3시 경이었다.
김응수(동키 15부대장)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전에 황해도 월사리에서 합동작전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들이 백령도 표(豹)부대의 명으로 작전에 투입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전에 초도와 석도에서 겪었던 김종벽으로부터의 모욕감이 되살아나 김응수는 차가운 태도로 구월부대를 맞았다. 그의 눈에 이들이 타고 온 배가 보였다. 이지녕의 켈로 부대 배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화가 치밀었다.
“어찌된 일이오?”
“우리를 도와준다고 약속해 주시오.”
“무엇을? 이 섬은 300 여명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소.”
“쌀을 좀 주시오. 한 일 주일분이라도......., 신미도에서 만 섬 이상의 쌀을 현물세 창고에서 노획했다는 말을 들었소.”
“전에도 쌀을 40 여 섬이나 드렸는데.......”
“언제?”
“구월부대 감찰참모인 박생년이 말 안하던가요?”
“내가 없던 사이라서.......”
김응수는 말을 끊었다. 자신과 함께 G-2로 온 부관인 장치경과 김대성을 인천에 보내 쌀을 팔아 물건을 조달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배달사고’로 이야기가 번지지 말아야 했다. 그는 병력을 연병장에 들이고 밥을 먹였다. 그 때 백령도의 버크로부터 전문이 날아왔다.
『구월부대는 위수지역을 이탈하여 집단 탈영했다....... 그들의 대화도 도착여부를 알려라.』
그리고는 이어서 전문이 계속 들어왔다. 신속히 이들을 무장해제해서 포획하지 않으면 동키 15도 같은 반란집단으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할 시간적 여유 없이 다시 무지막지한 전문이 도착했다.
『구월부대가 위치한 지점에 폭격을 위한 대공표지를 설치하라. 만일 표지를 설치하지 않으면 무차별 폭격하겠다.』
김응수는 김종벽에게 남하를 종용했다. 그는 버크 사령관이 김종벽과 자신이 짜고 이 일을 도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려웠다.
“남하는 불가능하오! 가능하다면 압록강 하구의 신도(薪島)나 신미도(身彌島)에 상륙했으면 하오. 우리는 같은 민족이며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전우가 아니오?”
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최광조가 말했다.
“우리병력도 주변의 가도(?島), 소화도(小和島), 참채도(삼차도) 등에 다 찢어져 있는데, 구월부대가 신미도 앞에 나가 막고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하 지휘자인 유태영은 이에 반대하며,
“이들은 우리보다 좋은 무기를 들었고, 미군의 더 좋은 보급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탈환하려고 싸우고 있는데, 저들도 저들의 고향을 전장으로 해야지 왜 낯 설은 이곳에 와서 지휘체계를 흔들어 놓는 겁니까? 당장 무장해제 해서 내려 보내자 구요.”
버크의 명령이 시행되었다. 다음 날, 김응수의 지휘소로 유인된 구월부대의 간부들은 총을 빼앗기고 포박 당했다. 병력전체를 무력화시키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버크는 전원 포로취급해서 식사도 주지 말고 헌병들이 신병을 인수하러 갈 때까지 감시하라는 전문을 보내왔다. 빨치산들은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전우였으며 동족인 구월부대원의 얼굴에 보이는 멸시와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동키 15는 자신도 아껴 먹던 흰밥을 나누어 주며 그들을 위로 하려 하였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들로부터 우리보다 더 좋은 보급품과 장비를 가지고 더 안전한 위치에서 살던 사람들이 무슨 불만으로 작전지역을 이탈하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투쟁의지는 희박해지고 생존의지는 강해진다는 것을 이번 전쟁의 경험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7월 29일 석도에 있던 한국 해병이 들어와 동력선인 운양호에 간부 10명을 포함한 140명을 싣고, 끌고 온 가축 운반용 전마선에는 173명의 구월부대원을 실었다. 간헐적인 장마비에 섬은 젖어 있었다. 두 손이 포박되어 대화도의 울퉁불퉁한 바위로 된 선창을 걸어 내려가는 김종벽 일행을 평안도 빨치산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동키 15의 일부 대원들은 선창에 도열하여 비를 맞으며 우군의 포로가 된 우군에게 경례를 붙였다. 구월 부대 군악대 17명은 김응수의 재량으로 대화도에 잔류시켰다. 군악대장인 정철은 이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 장연 출신의 학자인 정운경은 언변과 인품이 좋아 잔류를 거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빼어난 미모의 그의 누이 정수경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름이 지나고 닥쳐올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이라는 물속의 그물이 서서히 썰물위로 나타나는 것을 모르는 숭어 꼴이었다.
남풍이 불어오는 바다는 점점 파도가 높아지고 있어 항해가 어려웠다. 대화도의 등대는 아득히 멀어졌다. 등대 빛 같은 섬광이 뚫어진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햇빛과 비가 교대로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뱃사람 출신 빨치산들은 고막에서 느끼는 장력의 긴장감으로 그 해의 첫 태풍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항해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다 사람을 태운 예인선을 끌고 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항해는 강행되었다. 배가 참채도를 지나 납 섬에 이르자 베이어 대위가 탄 쾌속정이 나타나 구월부대의 간부 10명을 태우고 급히 남하했다.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하더니 어떻게 저희만 두고 가십니까?”
운양호와 예인되어 따라 온 가축운반 전마선에 남은 대원들은 흐느꼈다. 쾌속정이 사라진 수평선 너머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G-2와 간부들이 빠져 나가고 없는 구월부대원을 태운 운양호는 거센 풍랑을 뚫고 인천을 향했다. 난바다에서 배의 고물과 이물이 동시에 파도에 들리는 삼각파도가 일어나자 곰 이라는 별명의 기관장은 일단 배를 석도로 돌렸다. 이들을 연행하는 해병들 역시 겁에 질려 있었다. 7월 29일 칠흑 같은 밤 석도 앞에 이른 배는 어떤 이유인지 상륙이 거부되어 지체하고 있었다. 잠시 고요했던 혼돈의 바다에 폭풍이 갑자기 다가와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고 엔진고장을 일으킨 운양호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한밤중 끌고 오던 전마선의 줄이 풀렸다. 173명을 태운 전마선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인당수의 소용돌이 같은 물속의 커다란 입이 이들을 삼켰다. 풍랑이 잠시 가라앉은 7월 30일 아침 운양호는 가까스로 석도에 접안했다. 그러나 전마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소용돌이에 걸려 밤새 맴돌다 석도에서 서북 쪽 가시거리에 있는 덕 섬 풀 수중둔덕에 걸려 좌초 한 후 침몰하고 말았다. 2명이 천우신조로 부유하던 널빤지를 잡고 살아났고 171명 전부는 물속의 원혼이 되어 폭풍 속에서 울부짖었다. 뱃사람들은 석도의 고목을 베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이어가 미리 데려간 10명의 구월산 간부는 백령도에서 C-46 수송기로 여의도로 보내져 작전 기지사령부의 특설영창에 갇혔다. 이상하게도 이들을 아무도 신문하지 않았다. 들이닥쳐야 할 서슬이 퍼런 CIC나 방첩기관도 보이지 않았고 그 특설 영창이라고 하는 것은 백령도에서 휴가 받은 미군이 쉬는 ‘여의도 호텔’이었다. 며칠 후 김종벽은 대구로 보내져 헌병사령부에서 간단한 조사 후 원대 복귀되고, 이정숙은 여경대장 노 마리아라는 사람의 배려로 바로 출감했다. 운양호로 인천항에 도착한 나머지 간부 8명과 130명의 구월산 대원은 기차로 후송되어 8월 13일 거제도 10수용소에서 신문을 받고 61, 62 포로수용소에 인민군들과 같이 수용되었다. 이들이 풀려 난 것은 이듬해인 1952년 815특사로 인해서였다.
1) 김종벽,(1914-2004) 구월부대장, 황해도 장연 생, 전쟁전후의 그의 행보는 인천 상륙 전 비밀작전에 참여한 ‘연정’과 매우 유사하다. 해주와 은율에서 소련군 통역으로 일하다 1946년 8월 월남하여 육사 8기로 임관, 청량리 소재의 육군정보학교에서 2주간 훈련을 받은 후 정보국 첩보과 북한반에 보직되었다. 한국전 발발 후에는 육군본부 정보파견대 4863 부대에 소속 황해도에 파견되어 자신의 고향인 장연지역의 반공 빨치산을 규합, 구월산 부대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차후 미군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후 HID 교육대장을 역임한다. 2) 이정숙(李貞淑) ‘구월산의 여대장’이라고 불린 그녀는 김종벽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었다. 전후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1959년 37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사했다. 3) 켈로의 대화도 파견대장 이지녕이 어떻게, 왜 배를 구월부대에 제공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구월부대 사건 직후 이지녕은 대화도 파견 켈로 고트대장에서 해임되고 그의 동생인 이연길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지녕 또한 얼마 후 전사했다. 이연길씨는 황장엽 망명을 성사시킨 실제 배후 인물이다. 4) “구월산” p 195, 1955, 국방부 정훈국 5) 표부대 W. Able 즉 Section A는 빨치산들에게 동키의 명칭을 부여하고 이들의 상위부대로 백령도에 기지를 둔 모체 부대를 Leopard라고 명명한다. 6) 최광조(1909 - 1951), 동키 15의 실질적 지도자, 평북 정주 출신으로 빨치산 세력을 규합하여 애도 전투에서 1개 중대 규모의 빨치산으로 적 증강된 대대병력을 섬멸하는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1951년 11월 30일 대화도에 중공군 1개 사단이 상륙시 최후까지 저항하다 산화했다. 그의 무훈은 나중에 끼어든 육본 파견 G-2들과 미군들이 가로채어 그 억울한 투혼을 달랠 길이 없다. 7) 빨치산의 식량문제는 항상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미군의 보급기준에는 한사람의 빨치산에 하루 9홉의 쌀이 주어지도록 명시되어 있었으나, 빨치산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쌀은 달러로 환산되어 동남아 지역에서 구매한 ‘알랑미’를 보급토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 부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군 보급계통 전체에 만연한 비리였다. 그리고 당시 대화도까지는 미군의 보급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응수는 신미도에서 노획한 양곡 중 51년 6월 찾아온 구월산부대의 감찰참모인 박생년에게 쌀 25가마, 옥수수 20가마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위 사십 도선 p 179” 그러나 김종벽 “한국의 레지스탕스 p 140”에는 쌀을 받지 못했고, 김응수가 쌀을 팔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1968년 초판의 북위 사십 도선에는 김응수가 이에 대한 반박의 글을 부록으로 올렸으나 그 후 재판되어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일러두기; 이른바 “구월부대 항명사건” 또는 “미군과 동키15의 배신”이라는 이 처참한 사건은 저마다 진실을 보는 눈이 다르다. 필자가 동키 2와 동키 15의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규합했을 때 이 불행한 사건에는 매우 의도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앞으로 기술하게 될 대화도에 대한 소련 공군의 폭격사건과 맞물려 이런 심증을 증폭시킨다. 폭풍이오는 날 배의 접안을 거부한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전마선의 예인줄이 풀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폭풍을 기다렸다가 줄을 끊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이 시기는 공중 침투하는 미군기에서 연속적인 폭발 추락사건이 일어나고 서해상에서 미정보부대원을 태운 배가 폭파되어 십 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때라 한미간의 정보기관의 불신이 팽배한 와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갈등의 배경은 휴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