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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A
1. 어떻게 해
2. 나만이 걸었네
3. 그대를 두고 갈 때
4. 우체통
5. 눈물이 흘러요
6. 명동거리(경음악)
Side. B
1. 그 이름은 누구일까
2. 파도소리
3. 밤은 깊어도
4. 변하지 말고 사랑해요
5. 사랑의 상처
6. 하얀 방(경음악)
180g Virgin Vinyl
日本 東洋化成 Pressing
인서트, 스티커,브로마이드 포함
Digital Remastered By Yejeon(22년)
고려대 법대 1호 학사가수 김상희
60-70년대를 풍미했던 김상희의 인기에는 차분한 가창력과 더불어 고려대학교 법대 출신 1호 여가수란 고학력 프리미엄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녀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학 동창이란 사실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인기가수 김상희가 신중현 사단의 핵심 여가수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대중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활동 기간이 짧긴 했지만 그녀는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여성 로커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시절이 있었다. 파격적인 변신의 이유는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했던 펄시스터즈가 메이저 레이블로 전속을 옮기면서 생긴 빈자리 때문이었다.
학사 가수 김상희의 데뷔과정
김상희는 인기에 안주하기보다는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실험을 시도했던 보컬리스트였다. 늘씬한 164cm의 체구에서 뿜어댔던 힘차고 감미로운 음색으로 들려준 중음역의 노래들과 꾸밈없는 담백했던 모습은 당대 대중에게 친근함을 안겨주었다. 스탠더드 팝 계열 혹은 인기 가수의 전형으로 기억되는 그녀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여성로커였다면 믿어지겠는가? 그녀는 사이키델릭 로커를 넘어 팝, 뮤지컬, 민요, 가곡과 더불어 재즈까지 섭렵했던 비범한 보컬리스트였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희(본명 최순강)는 활발한 성격에 리더십까지 겸비해 ‘여판사가 되라’는 권유가 많았다. 고려대 법대 입학을 앞둔 1961년 초, 김상희는 KBS의 전속가수 모집 광고를 보고 심심풀이로 응모해 선발되었다. 심사위원인 작곡가 손석우의 눈에 들었던 그녀는 데뷔 곡 <십오야 밝은 달>을 발표하며 정식 데뷔했다. 또한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는 몰라요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간장’의 라디오 CM송을 국내 최초로 취입한 가수이기도 하다. 가수임을 숨기기 위해 본명을 쓰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글자 姬와 더불어 친한 친구들 이름에서 金과 相 한자씩을 따와 예명을 김상희로 정했다.
얼굴을 알려질까 두려워 공개방송은 기피하고 녹음방송에만 응하는 소극적 활동으로 한동안 일관했다. 법관을 꿈꿨던 그녀는 건강악화로 고시준비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5년 <울산 큰애기>, 1966년 <대머리 총각>, 1967년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뜨거워서 싫어요>, 1968년 <단벌신사> 등 감미로우면서도 발랄한 음색의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스타덤에 올랐다. 1968년 KBS PD 유훈근과 결혼한 김상희는 1969년에도 <빨간 선인장>과 <빗속의 연가>등을 히트시키며 성인 이미지로 변신을 꾀했다.
인기가수 김상희의 파격적 변신
1969년은 김상희의 음악인생에 대전환이 시도된 중요한 해였다. 그 즈음에 신중현은 한국적인 소리를 록에 접목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1969년에 데뷔해 돌풍을 일으켰던 김추자는 펄시스터즈에 이어 신중현에게 탄탄대로를 안겨준 대표적인 가수였다.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한 신중현은 전속을 옮겨버린 펄시스터즈를 대신할 가수로 탁월한 가창력과 품격 있는 무대 매너로 정평이 난 김상희를 눈여겨보았다. 마침 음악적 변신이 필요했던 김상희는 신중현의 제의를 수용했다. 신중현에게 1개월 동안 사이키델릭 창법을 사사한 김상희는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벗고 터프한 여성 로커로 변신하는 대모험을 시도했다. 김상희는 지상파 방송 PD인 남편의 지원 아래 방송과 공연의 사회자(MC)활동을 병행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실제로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김상희는 ‘4년 연속 가수납세액 랭킹1위’라는 부와 명예를 얻으며 인기가도를 내달렸다.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을 노래한 김상희
적극적으로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던 김상희는 1969년 서울 명동에서 개최한 신중현 사이키델릭 리사이틀 무대에 올랐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작렬하는 가운데 에로틱한 제스처로 무장한 김상희는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을 유발시켰다. 신중현이 창작한 파격적인 사운드가 담긴 독집 ‘김상희 최신가요 힛퍼레이드’를 1969년 8월에 신향음향제작소를 통해 발매했다. 신중현사단 가수의 사이키델릭 로커로 변신한 김상희의 첫 앨범이다. 앨범에는 연주곡 2곡을 포함해 대부분 신중현의 창작곡으로 이뤄져 있다.
신중현 밴드 덩키스는 김상희의 촉촉하고 안정적인 보컬이 돋보이게 편곡을 시도했다. 특히 제목이 생소하게 느껴질 <나만이 걸었네>, <눈물이 흘러요>, <그 이름은 누구일까>, <파도 소리>, <밤은 깊어도>, <변하지 말고 사랑해요>, <사랑의 상처> 등 7곡은 이 앨범을 통해 처음 공개된 신중현의 창작 신곡이다. 그 중 <나만이 걸었네>는 1973년 시각장애인가수 윤용균이 리메이크했다. <그대를 두고 갈 때>는 김상희보다 먼저 송만수가 1965년 자신의 첫 독집에서 발표한 곡이다. <우체통>은 신중현 첫 밴드 에드포가 1964년에 발표했던 곡이다.
혹평과 찬사로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
김상희는 자신의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의상과 창법과 그리고 무대 퍼포먼스로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주로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로 노래했던 김상희는 이 앨범 발표 후 핫팬츠 등 발랄하고 파격적인 의상으로 변신했다. 서울 무교동의 코파카바나 클럽과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신중현의 소울 사이키 가요를 격동적으로 부르는 그녀의 파격적인 모습에 대중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일부에는 ‘펄시스터즈의 모방’이란 혹평이 있었지만 ‘결혼 후 오히려 가수 나이를 5년이나 젊어 보이게 만든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이라는 찬사가 동반되는 극과 극의 반응이 동반되었다. 현대적 감각의 여성사이키델릭 록커로 변신한 김상희의 새로운 모습은 단연 장안의 최고 핫이슈로 떠올랐다.
김상희와 펄시스터즈의 신경전
이때부터 김상희와 펄시스터즈는 국내 사이키델릭 여왕 자리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펼쳤다. 1969년 10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신중현 리사이틀 쇼 무대에서 결국 대형사고가 터졌다. 공연장에 늦게 도착한 김상희 때문에 펄시스터즈와 출연 순서가 바뀔 상황을 놓고 다투다가 욕설과 삿대질이 오간 선후배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며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김상희와 펄시스터즈의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조성했던 충돌은 이후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되는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인기정상을 다투던 가수들 간의 대단한 라이벌 의식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방송 금지된 <어떻게 해>
이 음반의 백미는 타이틀곡 <어떻게 해>다. 호사다마라 할까. 음반 발매 후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며 질주했던 <어떻게 해>가 히트곡 <단벌신사>과 더불어 방송금지의 수난을 당했다. 당시 학생층에서는 히트곡의 노래가사를 바꿔 부르는 소위 ‘노가바’가 유행했다. 히트의 조짐을 보였던 <어떻게 해>도 가사를 짓궂은 남성들에 의해 ‘누워서 해’, ‘서서해’등으로 저속하게 개사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곡보다 오히려 개사된 버전이 점차 학생층에 유행되어 불리자 결국 <어떻게 해>는 ‘창법저속’이란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이 내려졌다. 자연스럽게 김상희의 로커 활동은 최대위기를 맞이했다.
김상희는 패티김과 함께 '일본 EXPO 70'의 한국행사인 ‘동경 아리랑페스티발’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초대받으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본 현지에서 진행된 그녀의 무대에 관심을 보인 일본 캐논 음반사에서 김상희의 여러 음반이 발매해 주목받았다. 김상희는 당시 세계적인 트럼펫 주자였던 히노데루 마사와 합동콘서트에 이어 홍콩, 태국 등 동남아순회공연까지 성사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71년 결국 짧은 사이키델릭 로커 활동을 접은 김상희는 주류무대로 복귀했다. 당시 그녀는 국내최초의 전속 6인조악단 ‘김상희와 그녀의 악단’을 결성해 국내 무대와 더불어 미국, 일본, 홍콩 등 해외투어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국제적인 가수로 명성을 쌓아갔다.
신중현 사단의 로커로 변신한 김상희의 첫 음반
김상희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신중현 사단 가수로 짧게 활동했다. 2년의 기간 동안 김상희는 신중현과 협업해 총 3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음반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초 희귀 음반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김상희의 신중현 트릴로지 앨범들이다. 신중현의 작품집이란 브랜드 파워, 남은 수량이 거의 없는 희귀 음반이란 점, 그리고 당대의 인기 가수 김상희의 파격적 변신이 어우러진 신선함 때문에 김상희 트릴로지 앨범들은 모두 비싼 몸값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 앨범은 신중현 사단의 로커로 변신해 발표한 김상희 트릴로지 중 첫 음반이다. 반세기가 넘은 무려 54년 만에 재발매가 성사된 이 앨범은 변화가 극심했던 1969년 당시에 급부상했던 신중현의 파워 브랜드와 김상희의 과감한 변신이 맞물린 덕에, 지금은 음반 수집가들이 탐내는 표적이 되어 있다.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대중음악자료 수집연구가
임아영 - 데뷔앨범 23년 1월 12일(목) 입고예정 가격/44,500원
Side. A
1. 오 못 믿어 (임아영)
2. 미련 (임아영)
3. 문이 열릴 때 (임아영)
4. 마른 잎 (임아영)
5. 내 마음 모두 주오 (임아영)
Side. B
여보세요 (박인수)
그대는 바보 (임성훈)
봄비 (박인수)
명동거리 (임성훈)
떠도는 사나이 (임성훈)
180g Virgin Vinyl
日本 東洋化成 Pressing
인서트, 스티커, 브로마이드 포함
Digital Remastered By Yejeon(22년)
신중현 사단의 전설적인 여가수
신중현 사단의 전설적인 여가수로 회자되는 임아영의 데뷔 앨범이다. 1970년 발매된 이 앨범은 오랜 기간 신중현사단의 희귀앨범으로 분류되었지만 최근 온라인 경매시장에서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고가에 낙찰되며 존재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본명이 최현경인 임아영은 신중현사단의 최고 인기 남자가수였던 장현의 히트곡으로 익숙한 신중현 곡 <미련>과 <마른 잎>을 가장 먼저 발표했던 오리지널 가수라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가치를 지닌다. 신중현도 오랫동안 그녀의 짧은 활동을 아쉬워했을 정도로 임아영은 맑고 청아한 여성적 매력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매력적인 기대주로 손색이 없었다.
당시 한양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이었던 그녀는 ‘노래 잘하는 여대생 DJ’로 대중음악계에 입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가 임아영의 노래실력을 직접 체크했던 신중현은 단번에 그녀의 음색에 반했다. 이에 1970년 자신이 함께 운영했던 밴드 퀘션스와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모은 캄보밴드 그리고 임아영이 부를 신곡까지 동시에 준비하며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수록된 컴필레이션 음반인 이 앨범의 재킷이 신인가수 임아영의 단독사진으로 장식한 점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획이었다. 이는 신중현과 제작자 킹박이 여대생 신인가수 임아영에 대해 얼마나 큰 기대를 품었는지를 증명한다.
앨범 발표 후 단숨에 기대주로 급부상
1970년 11월 초반이 처음 발매되었으니 이 음반의 재발매는 반세기가 훌쩍 넘긴 무려 53년만의 부활인 셈이다. 총 10곡의 수록곡 중 임아영이 부른 5곡은 1면에, 2면에는 이 앨범보다 2달 먼저 발매되었던 신중현 밴드 퀘션스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던 노래들을 재 수록해 부족한 노래 숫자를 채웠다. 2면에는 퀘션스의 객원가수 박인수가 노래한 명곡 <봄비>와 <여보세요> 2곡과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 임성훈의 데뷔곡들인 <그대는 바보>, <명동거리>, <떠도는 사나이> 3곡까지 총 5곡이 수록되었다. 이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오 못믿어> 등 맑고 청아한 임아영의 노래들이 방송을 타면서 단숨에 각종 언론에 소개되면서 당대 젊은 세대들에게 주목받았다.
신중현이 발굴한 새로운 여성 기대주로 알려지면서, 당시 언론에서는 “펄시스터즈, 김추자를 이을 1971년 가요계에 큰 활약이 기대되는 비장의 신인”으로 소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쌍둥이 자매 듀엣인 바니걸스와 임아영은 함께 여러 언론에 동반 소개되며 장래가 촉망되는 신중현사단의 신인가수로 집중 조명되었다. 특히 단아한 외모의 학사가수 임아영은 앨범 발매 이후 신인으로는 드물게 한국일보에서 발행했던 주간여성 1971년 2월 10일자의 표지모델로 전격 채택되어 음악계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대박조짐을 보였던 히트앨범
신인가수 임아영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더불어 이 음반은 발매 몇 달 만인 1971년 초에 재반이 추가 제작되었을 정도로 대박조짐까지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던 제작자 킹박은 1970년 임아영과 같은 해에 등장해 TBC 신인여가수상을 수상했던 장미리와 매력적인 저음을 구사했던 신중현사단의 기대주 장현을 함께 묶은 컴필레이션 음반까지 1971년에 제작해 재미를 톡톡하게 보았다. 당시 킹박은 수록할 노래가 부족했던 왕손가수 이석과 허니비 시스터즈의 음반에도 임아영의 노래를 추가시켰을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흥행을 보증했던 세간의 핫이슈로 각광받았다.
배우와 문광부 장관 출신 유인촌의 형수
미인은 아니었지만 임아영은 서글서글한 눈망울의 친근한 외모, 한양대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인 여대생 학사가수라는 점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화려한 가창력을 구사하는 대형가수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중독성 강한 예쁜 음색을 지녔던 그녀는 1971년 방영했던 드라마 주제가 <학부인>을 취입해 히트시키며 기세등등했다. 가수 활동과 병행해 1971년 11월부터 MBC FM의「골든 디스크」프로그램에서 DJ를 맡아 영역을 넓혀나가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그녀는 은퇴선언을 발표했다. 전도양양했던 신인가수 임아영은 자신이 진행했던 해당 프로그램의 담당 PD 유길촌과 사랑에 빠져 1972년 전격적으로 결혼에 골인했던 것. 유길촌 PD는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던 원로배우 유인촌의 친형이다. 임아영은 유인촌의 형수인 셈이다. 임아영은 가수활동과 인기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데뷔 2년 만의 가수활동 중단 선언은 그녀를 발굴한 신중현은 물론이고 당시 그녀의 노래를 사랑했던 많은 대중의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켰다.
은퇴 후 장현이 다시 불러 히트
기교 없이 고음역의 맑은 보컬을 구사한 임아영의 노래들이 수록된 이 음반은 현재 고가의 희귀 음반으로 대접받고 있다. 뒤늦게 독보적 음색을 지닌 신중현사단의 여가수로 재평가된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짧은 활동으로 인해 많은 노래를 남기지 못한 것도 임아영 음반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아영의 은퇴 이후 그녀가 취입했던 노래들은 신중현사단의 또 다른 기대주 장현이 차지했다. 장현은 1970년 11월 15일 같은 날에 임아영과 함께 데뷔앨범을 발표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가수이다. 임아영의 데뷔앨범 고유번호가 ‘KST-5’이고 장현은 바로 다음 번호인 ‘KST-6’이다.
장현은 1972년 10월 '장현 and The Men' 앨범에서 임아영의 <미련>을 다시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이에 1974년 킹박은 장현에게 임아영의 발표했던 모든 노래들을 리메이크 시킨 기획음반「장현과 임아영 같이 불러보는 노래」까지 제작했다. 은퇴 후에도 상품성이 강력했던 임아영에 대해 킹박의 아쉬움도 강력했다. 그 앨범도 지금은 실물 확인이 쉽지 않은 초 희귀 음반이 되었다. 여하튼 장현은 임아영의 먼저 불렀던 <미련>에 이어 <마른잎>까지 연속 히트시키며 스타덤에 오르는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미련>과 <마른잎>이 장현의 대표곡으로 기억되는 것은 임아영의 곡들을 히트시키며 방송과 공연무대에서 중요 레퍼토리로 선곡했기 때문이다. 신중현 디스코드라피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 앨범인 임아영 데뷔앨범의 재발매는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성사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한국대중음악 자료수집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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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상희와 임아영 각각 1장씩(모두 2장) 예약주문합니다
입고되었습니다.
각한장씩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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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위의 곰 킵용 입금햏어요
예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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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1장 예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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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1장씩 예약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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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다 1장씩 예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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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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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예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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